불혹의 장만옥, 그를 위한 영화

올리비에 아싸야스의 영화 <클린>

김윤은미 | 기사입력 2004/12/06 [00:05]

불혹의 장만옥, 그를 위한 영화

올리비에 아싸야스의 영화 <클린>

김윤은미 | 입력 : 2004/12/06 [00:05]
<클린>은 장만옥이 주연했다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끄는 영화다. 이제 마흔이 된 한 여배우의 연기 경력을 종합하는 영화란 인상이다. 영화 자체는 눈에 띄게 인상적이지는 않지만 “오직 장만옥만을 위한 영화”라는 감독 올리비에 아싸야스의 선언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장만옥의 매력은 빛을 발한다.

1980년대의 전설적인 록스타였던 리와 에밀리(장만옥) 부부. 이제 그들에게는 앨범 계약조차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마약에 빠져있으며 에밀리는 리를 마약으로 망쳐놓았다는 소문에 시달리고 있다. 캐나다 투어 중 어느 날 그들은 말다툼을 하고 에밀리는 모텔을 뛰쳐나가는데 그날 밤 리가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숨진다. 다음 날 아침 그녀에게는 남편을 잃은 슬픔과 마약소지죄로 선고 받은 6개월의 형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에밀리 때문에 리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시어머니는 그녀와 아들이 만나는 것을 반대하는 상황. 에밀리는 마약을 끊고 직장을 구하는 등 변모하기 위해 애쓰는 한편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클린>은 이런 에밀리의 변화를 어떤 극적 갈등이나 반전 없이 끌고 나간다. 음악 판, 마약중독, 시부모와의 갈등 등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나열식으로 처리되어 결과적으로 에밀리가 처한 상황의 절실함이 영화에 육화되지 않는다. 마약중독에서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또한 마약으로 인해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남편을 잃었고 아들과 제대로 만나기 어렵게 되었다면 그 고뇌란 상당히 클 것인데. 그런데 그러한 고뇌는 장만옥의 몇몇 대사나 단 몇 초간 금단증상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장면을 통해 제시될 뿐, 여타 에피소드들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진부한 것은 아니다. <클린>은 소위 ‘씬’이 돌아가는 상황이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고뇌에 대해 상당히 잘 안다. 왕년의 록스타 리의 앨범은 그가 죽고 나자 비로소 인기를 누리는데, 그 과정에서 리의 삶은 과도하게 낭만적으로 포장되어 팔려나간다. 즉 자살이 음악적 가치를 창출하는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셈이다. 에밀리가 젊은 시절 케이블방송에서 “머리 빈 여자”처럼 나와서 쇼를 했던 과거를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대중음악과 작가주의의 경계에 선 뮤지션들의 변화과정에 대한 스케치다.

마약중독에 대한 이해 또한 얄팍하지 않은데, 에밀리는 자신에게 적의를 품은 아들에게 “다르게 살아야 할 방법을 모르니까 약을 하게 된다”고 차분하게 설명해준다. 이처럼 <클린>은 상당히 지적인 영화다. 아마도 에밀리에게 일어날 법한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사실적으로 모두 잡아내겠다는 의도가 더 컸기에 심리적인 부분의 절실함을 상세하게 전달하지 않은(못한) 것이 아닐까.

배우들의 연기와 사운드트랙은 영화의 빈 곳을 메워준다. 장만옥의 연기가 훌륭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에밀리는 마약 금단증상과 남편을 죽였다는 사회적 비난으로 괴로운 데다가 돈이 없어 막막하지만 어떻게든 그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고집스럽고 굳건한 여성 캐릭터다. 장만옥은 충분히 그 역할을 소화해냈다. 그런 며느리의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그녀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하는 시아버지 역의 닉 놀테는 무뚝뚝한 겉모습과 여린 속마음을 지닌 노인의 캐릭터를 능숙하게 연기했다.

에밀리가 “이제 나는 변했다”라고 항변하는 모습이나, 시아버지가 에밀리에게 “사람은 변할 수 있어”라고 격려하는 말은, 전적으로 그들의 연기만으로 절실함을 성취했다. 조숙하고 차갑지만 점차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는 아들이나 에밀리를 돕는 친구 엘레나 또한 조연이지만 영화를 탄탄하게 만드는 데 한 몫 했다. 한편 영화 전체를 감싸는 몽환적인 사운드는 에밀리의 상태와 잘 어울리며, 나열식의 에피소드들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어주는데 일조했다.

이 영화에서 장만옥은 자유로워 보인다. <화양연화>의 차이니즈 스타일의, 목까지 꽉 잠기는 옷을 입었던 그녀의 모습은 없다. 대신 <클린>에서 그녀는 나이 든 관록의 뮤지션답게 머리를 흐트러뜨린 채 담배를 피우면서 외롭게 거리를 떠돈다. 그런 에밀리의 모습에는 이제까지 그녀가 찍었던 영화들에서 선보였던, 고독하면서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여성의 면면들이 겹친다. 캐나다에서 파리, 파리에서 샌프란시스코처럼 제 1세계의 대표적인 도시들을 떠돌며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서구적인 편견을 투영하지 않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여성상을 성취했다. 이는 장만옥이라는 배우가 동양여성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을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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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키 2004/12/07 [01:18] 수정 | 삭제
  • 장만옥은 이마베프를 감독한 올리비에 아사야스와 결혼했다가 이혼했지만 여전히 동반자적인 관계라고 하더군요. 영화 속에서만 매력적인 배우가 아닌 것 같아요.
  • Twinkling 2004/12/06 [23:01] 수정 | 삭제
  • 장만옥은 동서양을 오가는 보기드문 동양배우죠.
    그녀의 매력에 푹 빠졌어요. 이 영화도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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