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우면서도 얄팍하지 않은

우미노 치카의 <허니와 클로버>

김윤은미 | 기사입력 2005/01/09 [21:05]

가벼우면서도 얄팍하지 않은

우미노 치카의 <허니와 클로버>

김윤은미 | 입력 : 2005/01/09 [21:05]
소리 소문 없이 열풍이 부는 만화가 있다. 우미노 치카의 <허니와 클로버>도 그렇다. 기존의 장르 법칙을 깨는 파격적인 맛이 없고 홈 드라마적인 따뜻함이 강하지만 은근히 신선하다. 이 만화는 가는 펜 선 때문에 막 그린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신체 균형과 배경에 신경을 쓴 것이 분명한 그림체, 괴짜 같지만 마음 여린 캐릭터들, 풋풋한 내면의 독백이 귀엽고 달콤하다는 인상을 주는 수준에서 적절하게 배합돼 있어서 신선하게 다가온다.

좁은 아파트에 모인 대학생들의 일상

총 넓이 3평에 부엌 1.5평의 방음 시설 전혀 없는 좁은 아파트에서 가난한 대학생들이 모여 산다. 무전취식의 귀재에 아침 수업에 늘 지각하는 대학 7학년이 된 모리다, 냉정하고 영리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순정파 짝사랑남인 마야마, 경쟁이라면 무조건 자신 없어하는 성실하고 소심한 ‘토종개’ 신입생 다케모토. 여기에 하나모토 교수와 그가 돌보는 천재 조각가 하구미, 마야마를 짝사랑하는 철인여자 야마다까지 합세해서 시끌벅적한 일상이 펼쳐진다.

작가는 각 캐릭터들의 특성을 과장해서 시종일관 웃음을 자아낸다. 하구미에 대한 사랑을 잘 눈치 채지 못하는 순진한 다케모토에 대해 ‘다케모토의 하트는 사랑에 관한 한 10년 전 맥(mac) 수준이었다’라고 표현하거나 귀여운 하구미를 보자마자 커다란 잎을 씌우고 ‘콜로보클’(머위 잎 아래 사는 사람)이라고 외치거나 저도 모르게 키스한 후 도망가 버리는 모리다에 대해 ‘그의 사랑은 보통 사람은 도무지 이해 불가능한 패턴이다’라고 산뜻하게 설명해주는 작가의 유머 센스는 꽤 탁월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을 끄는 캐릭터는 냉정한 마야마를 오랫동안 포기하지 못하는 야마다일 것이다. 야마다는 특기가 상대를 ‘힐로 내려찍기’인데다가 술만 마시면 금세 주정을 부리는 털털한 캐릭터다. 작가는 야마다가 누구와 싸울라치면 그녀를 파이팅 게임의 공격적인 캐릭터로 그려서 웃음을 선사하면서도, 그녀가 마야마의 등에 업힌 채 눈물콧물 쏟아대며 슬퍼하는 모습 또한 잊지 않는다. 조연인 여자 캐릭터의 기나긴 짝사랑을 추하지 않고 따뜻하고 귀엽게 그려낸 것은 여타 순정만화에서 찾기 어려운 성과다. 소위 ‘남성적인’ 여자 캐릭터들도 남자주인공과의 사랑에 있어서는 성공하는 것이 주된 경향이니까.

인물의 심리를 읽어내는 균형적인 시선

<허니와 클로버>에는 전형적인 삼각관계가 두 개나 존재하면서도 진부함을 벗어나서 변칙적인 즐거움을 선사한다. 하구미를 동시에 좋아하는 모리다와 다케모토, 리카를 좋아하는 마야마와 마야마를 좋아하는 야마다. 이 삼각관계는 사랑을 얻기 위한 쟁탈전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부분, 예컨대 상대의 핸드폰 울림마저도 신경 쓰게 되는 미묘한 심리전으로 그려진다.

이들은 라이벌을 신경 쓰고 나면 자신이 비겁하고 소심하게 굴게 되는 건 아닌지 자꾸 걱정하고, 짝사랑의 부질없음을 몇 번이고 확인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인지한다. 작가는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자기 점검 및 자기혐오나 죄책감, 슬픔과 같은 감정을 인물의 내면으로 너무 깊숙하게 들어가지 않은 수준에서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이런 균형적인 시선 덕에 이 만화는 꽤 현실적이라는 느낌 또한 준다. 모리다 등의 대학생활은 텔레비전 시트콤에서 그려지는 연애와 놀기에 몰두하는 환상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의 일상은 배고픈 자취생들의 모습 그 자체다. 다케모토가 애써 직장을 구하자마자 직장이 부도가 나거나 마야마가 자리를 찾지 못해 연구생으로 대학에 눌러앉게 되는 상황은 미래가 불안정한 대학생의 현실을 비켜가지 않는다.

각 에피소드가 끝날 때 마다 등장하는, 감정이 잘 묻어나는 내면의 독백은 이 만화가 정통순정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순정’이란 단어의 원래 뜻에 가장 가까운 만화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제 청춘의 길목에서 어른으로 막 넘어가는 시점이기에, 이들의 일상에는 따뜻한 순간이나 가슴 찡한 순간처럼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순간이 다가온다. 인물들이 그 순간에 느끼는 소중함이나 연민, 그리움과 같은 감정은 자아를 파고드는 깊이는 없지만 진솔하다. 그래서 보고 있노라면 ‘허니’와 ‘클로버’라는 제목처럼 ‘귀엽다’, ‘달콤하다’라는 느낌이 든다. 물론 그 달콤함은 가벼우면서도 얄팍하지 않은, 은근히 섬세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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