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세계의 허상

비디오 가게에서 만난 <원 트루 씽>

이유지현 | 기사입력 2005/01/09 [21:09]

‘아버지’ 세계의 허상

비디오 가게에서 만난 <원 트루 씽>

이유지현 | 입력 : 2005/01/09 [21:09]
‘그’의 기본 이미지는 말쑥하고 깔끔한 정장차림이다. 그 옷에서 집 옷으로 갈아입어도 정중한 냄새가 남아있는 것 같다. ‘그녀’의 기본 이미지는 맨발에 티셔츠 쪼가리 차림이다. 그 옷에서 밖의 옷으로 갈아입어도 반찬냄새가 남아있는 것 같다. ‘그’는 먼저 수저를 든다. 고르고 예쁘게 놓여진 반찬은 그의 몫이다. ‘그녀’의 식사모습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게 되지 않는가. 머리통이 굵어진 이후 더 이상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게 되어도 그는 여전히 어려운 존재로 남는다. 반면에 어머니는, 엄마는? 여자라면 누가 이 말 한 번 하지 않고 이십 대를 지나갈까. ‘난 엄마처럼 살지 않아.’

닮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자리

영화 <원 트루 씽>의 주인공 엘렌도 다르지 않았다. 난 엄마의 삶을 살지 않을 거야. 아버지처럼 훌륭한 작가가 되는 꿈을 소녀시절부터 가슴에 품었다. 아버지가 강의를 마치고 마지막인사를 하면 학생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었지. 내가 그의 딸이라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어. 아버지는 문학을 고민했고, 엄마는 과자를 구웠다. 엘렌은 아버지에 이어 하버드를 졸업했고 기자의 길을 막 걷기 시작한다. 내 첫 기사를 아버지 읽으셨을까.

그러나 앞으로만 나아가면 되는 이 꽉 찬 삶이 한 순간에 삐걱한다. 엄마의 병, 수술. 아버지는 엘렌에게 집으로 돌아와 엄마를 돌보라고 한다.

“전 막 이 직장에 들어왔어요. 아버지는요? 안식년을 신청하실 수 있잖아요?”
“안돼, 이번 학기는 너무 바쁘고, 야간수업까지 해야 돼. 넌 하버드나 나온 애가 왜 그렇게 인정머리가 없느냐.”

닮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자리를 떠밀려 대신한 후, 엘렌은 서서히 비밀을 알게 된다.

“네가 내 새 책의 서평을 좀 써주겠니?”
“아, 아버지, 정말이요? 그렇다면 너무나 영광이에요.”
“그래, 그럼 이 책들도 같이 읽어봐라, 잠깐, 더 자료를 주마. 그리고, 이것 좀 세탁해주겠니? 단추를 새로 달아야 할거야.”
“.....”
“오늘 저녁에 늦을 거야. 야간수업이 있어서.”
“....”
“자리에 교수님이 안계시네. 요번엔 어떤 여잘까? 글래머러스한 조교가 새로 왔던데.”
“....”

보이지 않았던, 그 이면을 보라

아버지의 생활은 굳건한 성이다. 문학, 수업, 제자, 명성, 어느 것 하나 흔들림 없다. 변함없이 돌아간다. 내 생활은 글 대신, 직장 대신 변기청소와 음식준비, 집안정리, 환자 돌보기로 완전 뒤바뀌었는데. 만약 내가 없다면? 아니, 애초에 어머니가 없었다면? 그래도 그가 그렇게 굳건한 성의 주인일까?

엘렌은 아버지의, 아버지로 대표되었던 문학세계의, 사회적 인정과 성공이라고 보여졌던 세계의 허상을 발견한다. 그것들은 어머니가, 어머니로 대표되는 반복되는 일상이, 자질구레함과 하찮음이라고 여겼던 노동들이 떠안음으로써 지탱되는 얄팍한 세계였던 것이다.

암으로 죽어가는 엄마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겠다며 딸을 붙잡는다.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 아무도, 이 집에서. 아버지를 부정하면 그것은 가족사진에서 그의 얼굴만 도려내는 것과 같아. 그를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다 망쳐버려. 그 얄팍한 세계 뒤에 가려진 엄마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아버지를 부정하지 말라는 것일까, 아버지를 부정함으로써 마주하게 될 가족의 허상을 경고하는 것일까.

아버지는 어디에 있었는가? 이 물음을 시퍼런 기세로 들이미는 것까지, 영화는 아주 멋졌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주는 대답은 다소 기를 꺾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여성들이 처한 서글픈 현실의 현주소일지도. 그럼에도 영화가 전달하는 뜻밖의 목소리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

네가 보고 있는 그 세계는 무엇인가?
보이지 않았던 그 아래를 보라.
거기에 그 세계를 지탱시키는, 비로소 진실의 세계가 있다.

제목: 원 트루 씽 (One true thing, 1998)
감독: 칼 프렝클린
원작: 애나 퀸들렌
각본: 카렌 크로너
배우: 르네 젤위거, 메릴 스트립, 윌리엄 허트, 톰 에버렛 스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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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이 2005/01/10 [02:18] 수정 | 삭제
  • 좋아라~
    일다 비디오 소개 기사들 다 좋았어요. ^^
  • Lucy 2005/01/10 [00:35] 수정 | 삭제
  • 이 영화 저도 추천하고 싶은 영화에요.
    저는 메릴 스트립도 멋지지만, 윌리엄 하트 팬인데요.
    이런 영화에 제격인 배우같아요.
    이렇게 사람들의 위선이랄까, 이면을 고발하는 영화에 종종 나오는데.
    그런 역할을 잘 소화해내고요.
    이 영화, 개운한 영화는 아니지만 공감이 많이 갔어요.
  • 영화강 2005/01/09 [22:11] 수정 | 삭제
  • 나중에 르네 젤위거가 아부지한테 길거리에서 악다구니를 퍼부을 땐 아주 속이 후련했죠. 근데 저도 메릴 스트립이 맡은 역이 무얼 말하고자 하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나중에 열받아하는 딸에게 뭐라고 하잖아요. '나도 다 알고 있다' 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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