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주와 ‘가족같은’ 관계

입주 가정부로 일하는 조선족 여성-끝

이주영 | 기사입력 2005/03/07 [22:32]

고용주와 ‘가족같은’ 관계

입주 가정부로 일하는 조선족 여성-끝

이주영 | 입력 : 2005/03/07 [22:32]
많은 사람들은 가정에서 가족을 보살피는 가사노동이 흔히 ‘주부’들에 의해 무보수로 행해져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사노동은 197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와 함께 핵가족 모델이 대도시에서 정착되면서부터 주로 전업주부가 담당하게 됐다. 1970년대 이전까지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은 가정에는 가정부가 있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안의 딸이거나, 보살펴줄 자식이나 남편이 없는 중년여성인 경우가 많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에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청소년기의 딸을 친척집에 보내 마치 딸처럼 그 집에 거주하여 가사 일을 배우면서 도와주도록 하고, 결혼할 때가 되면 결혼비용을 지원 받는 것으로 임금을 대신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딸들이 집안일을 어떤 방식으로든 도와야 했던 대가족 내에서 혈연, 지연으로 엮인 가사노동자들은 가족구성원들과 차이가 없었다. 1970년대 이후 중산층 핵가족 모델이 정착되면서 한 지붕아래 살아가는 ‘가정’에 대한 이미지나 상상력이 급격하게 변화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가정이 가족들의 사적인 관계만을 위한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따라서 최근 입주가정부에 대한 수요가 새롭게 증가하면서, 혈연이나 지연으로 엮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같은 국적을 갖지 않은 해외에서 이주해 온 가사노동자들과 함께 사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가정’에 대한 이미지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다른 해외 이주자들과 비교해서 ‘같은 민족’인 조선족 여성들이 더 쉽게 입주가정부로 일할 수 있게 된 것도, 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동남아시아에서 온 다른 젊은 입주가정부들에 비해서 할머니, 이모 혹은 친척 딸과 같은 가정 내의 관계를 더 쉽게 상상할 수 있다는 측면도 작용한다.

한국가정에서 ‘가정부’라는 역할

많은 조선족 입주가정부들이 한국인 고용주의 가족들과 맺는 친밀한 관계를 ‘가족과 같은 관계’로 표현한다. 이복자씨(가명, 67세)는 기억도 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부모와 함께 경상도에서 중국의 헤이룽장성 지역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이복자씨는 한국에 큰댁이 있어 친척방문 비자를 발급 받아 한국에 비교적 수월하고 들어올 수 있었고, 말씨도 경상도 사투리를 써서 조선족이라고 스스로 밝히지 않으면 한국인과의 차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복자씨는 남편과 사별한 후 막내아들의 대학학비를 벌기 위해 1995년에 한국에 들어온 이래 여러 곳에서 식당 일을 하거나 가정집에서 일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고용주의 가족들과 정말 ‘가족 같이’ 지냈던 것을 좋은 기억으로 가지고 있다. 남편과 아내 양쪽이 경상도 출신이었기 때문에 밖에서도 아이들의 ‘진짜 할머니’처럼 알고 있었고 집안에서도 아이들이 친할머니처럼 대했다고 말한다.

“부산에 외갓집이란 친할머니집이랑 다 부산에 있거든요. 그래 부산에 전에 할머니가 오시며는 외할머니는 외할머니라 하는데 친할머니 오시며는 우리 할머니 어디갔는가고, 내보고 우리 할머니래. 그(친) 할머니가 ‘너네 할머니가 누군데, 내가 너네 할머닌데, 내가 너네 할머니가 아니고 누구가’ 그러재. 경상도 할머니야. 그러면 (애들이) ‘우리 할머니 우리 집에 계시는데’ 그래들. ‘내가 너네 할머니지 느그들, 그럼 나는?’ 그러면 ‘할머니는 부산 할머니’ 그러지(이복자씨).”

한국인 고용주들은 대개 나이가 많은 조선족 가정부를 ‘아줌마’로 부르지만, 아이들은 ‘할머니’라고 부르면서 이들을 한국 가정에서 ‘할머니’와 관련된 문화적 규범들에 맞추어 대하게 된다. 이복자씨는 아이들의 부모가 어른에 대한 예의를 가르치기 위해서 아이들에게 항상 이복자씨를 예의 바르게 대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집안에서 ‘할머니’로서의 어른 대접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복자씨는 가정부로써 고용주가 요구하는 대로 일을 해야 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집안의 어른대접을 충분히 받는 입장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유사가족관계’ 속에서 이복자씨가 아이들을 마치 자신의 친손자, 손녀들을 대하듯이 진짜 애정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대해야 한다는 기대가 생기게 된다. 유사가족관계 속에서는 가정부의 애정이 가족관계에서 할머니가 손자, 손녀에게 애정을 갖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듯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게 된다.

황영길씨(가명, 54세)는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있었던 가정집에서 항상 해외에 출장 나가는 부부 집에서 여자아이 둘을 보살피면서 아이들의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황영길씨가 그 집에서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외할머니’가 큰딸을 보기 위해 안동에서 올라오신다는 말만 들었는데, 외할머니는 알고 보니 입주가정부를 감독하기 위해서 계속 집에 머무를 계획이었다고 한다. 황영길씨는 고용주의 어머니가 “딸을 위해서 딸이 지불하는 돈의 값어치를 하는가”를 항상 감시하는 입장에 있다고 말한다.

“할머니랑 그런게 안 맞아요. 70세 전, 60세 전에 있는 분들은 좀 낫죠. 6.25때 고생한 분들은 아낄 수 있는 거 아낄려고 그러고, 콩나물 꼬리 떼는 것도 내가 너무 많이 뗀다는 거야(황영길씨).”

남편 혹은 남편 쪽의 친가 모두 집안의 가사노동에 대해 전혀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황영길씨와 고용주의 친어머니 사이의 관계는 마치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고부갈등을 연상시킨다. 황영길씨가 행하는 ‘유사며느리의 역할’은 가정 내에서 남편에 대한 보살핌 노동을 둘러싼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가 며느리에게 억압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황영길씨는 자신이 일하는 가정 내에서 고용주와 갈등이 생겼을 때,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 주면서 갈등을 중재해 줄 사람이 없다는 측면에서 더 억압적인 입장에 놓여있는 셈이다.

조선족 가정부를 고용하는 한국인이나, 조선족 입주가정부 양쪽 모두 가정에서 서로 좋은 관계를 맺게 되었을 때 ‘가족과 같이 지냈다’라고 말한다. 한국인 가정에서 고용주 가족들이 조선족 ‘아줌마’를 ‘한 가족처럼’ 대하는 것은 정말로 가족처럼 애정을 갖는 측면도 있겠지만, 대체로 가정부가 일을 하는 공간 자체를 가족들만의 사적이고 애정이 교류되는 공간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서로 못 볼 것 가리지 않고 편하게 부대껴가며 사적인 ‘나’로 행동하게 되는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가정부를 공적인 고용관계를 맺은 사람처럼 대한다면, 사실 서로에게 그처럼 불편한 관계가 없을 것이다.

이는 아무리 가정부의 고용조건이 합리적이지 못해도 쉽게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합리화된 형태의 고용관계로 바꾸어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정부에게 ‘공적으로’ 대해야 한다면, 가정을 사적인 친밀함을 위한 공간으로 인식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가정부가 활동하는 공간을 분리해내고 싶어할 것이고 따라서 가정부의 역할과 존재는 쉽게 무시될 것이다.

조선족 가정부들이 고용주와 ‘가족과 같이 지내는’ 관계를 선호하는 것도 실제 자신이 가족과 같다고 오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와 일에 대해 인정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복자씨는 자신의 며느리가 출산을 하는 바람에 입주 가정부 일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고용된 집 남편의 부산 친어머니가 전화를 걸어 자신의 손자, 손녀들을 돌보아서 번 돈으로 가정부를 구해서 이복자씨의 손자를 키우면 되지 않느냐고 하면서 계속 일해 달라고 설득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며느리가 임신했을 때도) 한 반년 가정부로 댕겼어. 또 다시 (예전에 있던) 그 집에 애들을 또 다시 봐줬어. 그랬는데, 아유, 또 그 집에서 못 가게 하는 거야, 뭐 다 애들도 정 붙었지, 너무 좋은데 가지 말라고. 월급도 올려 줄 텐데 가지 말라고. 그런데 우리 애(손자) 낳는데 난 또 어떻게 그랬더니, 그럼 월급을 주고 우리 애를 남한테 맡기래는 거야. 그리고 우리 애(고용주의 자녀)를 봐달라는 거야. (웃음) 내 맘은 그렇지만은 어쩌겠는가고, 그러고 나서는 담에 가서는 말썽거리가 되고, (왜냐하면) 그저 우리 애를 안 봐주고 자기 애만 봐줬다고 그럴 거 아니야.”

이복자씨에게 돈이 아닌 순전히 애정 때문에 돌보아야 하는 친손녀와 돈을 위해 돌보았던 고용주의 아이들은 엄연히 다르다. 이복자씨가 아무리 고용주의 아이들을 돌보면서 진짜 애정을 주었다고 해도 진짜 친할머니-손자, 손녀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복자씨가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일에서 요구되는 숙련에 의해서 눈치를 보면서 더 참아내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고용주의 어머니가 이복자씨라면 친손녀를 돌보는 것과 똑같이 자신의 손녀를 돌보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복자씨는 이런 반응에 대해 자신의 일이 크게 인정 받았다고 여기고 있다.

아이들에게 갖는 진짜 애정

이복자씨가 자신의 아이들을 친손자와 똑같이 보살펴줄 것이라는 고용주의 기대는 고용주가 가정부에게 돈을 주고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 “애정”임을 보여준다. 실제, 아이들과 고립된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조선족 가정부들은 아이들에게 진짜 애정을 느끼기 쉽고 아이들도 자신들을 실제로 보살펴주는 조선족 아줌마들을 어머니보다도 더 친밀하게 느낀다. 허순옥씨(가명, 55세)는 세 아이들이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큰 아이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한 집에서 아이들을 보살피면서 아이들과 얼마나 가깝고 다정하게 지냈는가를 이야기해 주었다.

“애들은 내말 잘 듣고, 애들이 그리고 다 착했어요. 그저 ‘아주마, 아주마’ 하면서 ‘아주마가 우리 어머님보다 더 낫습니다’ 그 여자아이 그래요. ‘난 아주마가 우리 엄마 갖고 우리 엄마가 어머니 같지 않다’ 그러면 무슨 소리 하는 거냐 막 하고. 그러면 ‘어찌 그런지 나는 아주마 둘도 없습니다’ (그러지). 어머니가 팩하고 좀 차지요. 자식이래도 그렇게 대하니까 좀 차있잖아요(차갑잖아요). 나는 또 안 그렇지. 나는 또 따뜻하게 아들 대해주고 얘기해주고 그러니까.”

조선족 가정부들이 자신들이 보살피는 아이들에게 가지는 애정은 때로는 조금 조건이 나쁘더라도 참고 일자리를 옮기지 않는 등 초과노동을 견디게 만들기도 하지만, 고용주가 쉽게 조선족 가정부들을 해고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조선족 가정부들이 자신의 가족들, 아이들과 떨어져있는 상황이나 일에서 요구되는 숙련의 과정에서 가지게 된 아이들에 대한 애정은 쉽게 숙련의 과정에서 ‘얻어진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고용주들은 자신들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가족관계의 메타포 속에서 친할머니가 손자에게 애정을 주듯이 조선족 ‘할머니’ 혹은 ‘이모’가 아이들에게 그 관계에서 합당한 애정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한국인 고용주는 ‘자식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해외로 이주해온 열성적인 어머니’인 이들이 다른 아이들에게도 애정을 가지고 열심히 돌보아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처음 사람을 쓸 때 아이들 교육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어봐요. 우리 이모도 아이 교육에 굉장히 열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아이들한테 굉장히 많이 전화하고, 우리 집에서 번 돈도 중국에 보내서 지금 그 딸이 연변에 의대에 입학하는 거거든요. 그런 거 보면 정말 한국인들하고 같죠. 왜 우리나라 어머니들이 자식에 대해서 유별나다고 하잖아요. 조선족 사람들도 아이들 교육 때문에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자기애한테 잘하는 사람은 남의 애한테도 잘해주고 그러는 거지요(이숙인씨, 가명, 38세, 한국인 고용주).”

‘한국의 하층 가정부’로서의 조선족 아줌마를 넘어서

조선족 가정부가 한국인 가정에서 고용되어 일을 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들이 고용주와 ‘가족과 같은 관계’를 맺으면서 그 관계에서 당연시되는 ‘애정표현과 보살핌노동’을 하도록 요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좀더 나아가서는 그 가족관계 안에서는 꼭 혈연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 안에서는 ‘그렇게 관계 맺도록’ 요구되는 가족 내 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가족문화에서 할머니, 아내, 어머니, 며느리의 역할인 가족구성원에 대한 보살핌노동은 그들이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 가족관계는 다른 가족 구성원과의 사이에서 권력관계를 담고 있다. 그래서 그 권력 관계 내에서 이들의 보살핌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이들의 보살핌이 쉽게 무시될 수 있다. 가족구성원 사이의 권력관계는 여성들의 보살핌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성역할(gender) 관계를 포함하는 것이다.

가정 안에서의 권력의 실천과 보살핌 노동의 관련성에 대한 성찰이 없이 조선족 가정부들이 가정에서 행하는 보살핌 노동을 바라본다면 이들의 보살핌 노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해 성찰할 수 없다. 현재 한국에서 조선족 여성 이주자들이 점차 가정부로 일하게 되면서, 이들에게 ‘가정부로’ 일할 기회만 주어지는 현실에 대해 주목하기보다는 이들을 ‘가사노동자’에 적합한 계층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지배적인 것이 현실이다.

조선족 가사노동자들을 하층 서비스 노동자로 바라보는 시선은 이들을 차별하는 국경과 정부의 외국인노동자정책에 의해서도 만들어지지만, 보살핌 노동을 애정이 수반되는 ‘노동’의 하나로 보기보다는 어떤 사람, 어떤 역할을 가진 사람들이 당연하게 행하는 것으로 경시하는 태도에서도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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