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린내 나는 영화가 보고 싶어서 선택한 영화 <달콤한 인생>. 살다보면 화나는 일이 많은 법이다. 혹시나 피 튀기는 영화를 보면 간접적으로나마 분노가 풀리려니 했지만, 불행히도 기대에서 어긋나고 말았다.
<달콤한 인생>은 영화 색감이 참으로 쾌락적이었다. 정확한 비트를 자아내는 소리의 편집 은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탁월한 정서를 자아냈다. 김지운 감독은 감각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데 탁월한 솜씨꾼이다. 하지만 <달콤한 인생>이 다루는 것은 남성의 마음이며 여성의 마음은 배제되어 있다. “움직이는 것이 바람인가, 나뭇잎인가, 내 마음뿐인가”라는, <달콤한 인생>이 던지는 질문의 주체 또한 남성이었다. 잘 나가는 인생의 주인공 선우(이병헌)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으로 한 순간에 절망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선우의 보스인 강 사장은 그의 애인 희수(신민아)를 감시하라는 임무를 선우에게 맡기는데, 희수의 하얀 목덜미에 넋을 빼앗길 정도로 매혹된 선우는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 선우는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분노에 찬 선우는 강 사장에게 총을 겨누고, “나한테 왜 그랬어요.” 라고 묻는다. <달콤한 인생>은 여러모로 김지운 감독의 전작 <장화, 홍련>과 닮은 구석이 많다. 우선 <달콤한 인생>의 선우와 <장화, 홍련>의 수미(임수정)가 닮았다. 선우와 수미는 비일상적인 공간에 위치하는 인물들로, 현실의 부조리함과 원한에 의한 분노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선우는 강렬한 빛과 어둠이 대조되는 누아르의 공간에 속한 인물이며, 수미는 하우스 호러의 주인공이다. 누아르 인물로서의 선우는 단지 달콤한 꿈을 꿀 뿐이지만 호러 속의 수미는 망상과 환각이라는 정신증에 허덕인다. 수미의 분노가 공포의 원천이자 비이성적이고 통제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 선우는 분노 표출의 주체다. 어쩌면 김지운 감독에게는 장르를 통해 선택적으로 젠더(gender)에게 운명을 부하는 습성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김지운이 선택한 영화 공간의 서술을 통해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달콤한 인생>의 공간 미학은 선우의 감정과 선우의 행위에 의해 그 빛깔을 달리 한다. 선우의 순조로운 일상은 적절한 빛이 녹아든 공간을 연출하지만, 선우의 인생에 절망이 끼어듦과 동시에 공간은 강렬한 빛의 대조와 붉은 색을 통해 분노를 드러낸다. 또한 선우가 자신의 분노에 질문을 던지게 되자, 공간은 선우의 모험에 가장 적절한 은유를 제공하고자 애쓴다. 황량한 사막에서 환상적인 총기상점으로, 가느다란 복도를 지나 매끄러운 표면이 가득한 호텔 바 ‘달콤한 인생’으로. 선우는 공간을 이끌어가고 공간은 선우의 욕망에 충실하다. 그러나 같은 비일상적 공간 속에서 수미의 분노는 병리화된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장화, 홍련>속의 장식적 공간은 소녀의 몸에 대한 김지운 감독의 페티쉬를 상징하는 것인데, 병리화된 여성을 철저히 타자화시키는 기제로 작동한다. 그렇다면 <달콤한 인생> 안의 여성은 어떠한가. 누아르 속 팜므 파탈이 한 때 여성욕망의 재현과 관련한 대안적 이미지로 해석될 수 있었다면(물론 성공한 적은 없었다), 김지운 식 누아르에서는 애초에 여성의 활보조차 기대할 수 없었다. 팜므 파탈의 역할을 맡은 것은 희수인데, 선우의 비일상적 공간에 비하면 희수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공간에 속해 있는 일상적인 사람이다. 그녀의 집 안에서 빛과 어둠은 튀지 않게 녹아있으며, 그녀는 일상적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심지어 희수는 ‘버스’를 탄다. 김지운 감독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희수는 롤리타에 가깝다. 그러나 욕망하지 않는 ‘평범한’ 롤리타다. 선우가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남긴 사람들에게 총부리를 겨눈다면, 희수는 기억을 지우라고 명령하는 선우의 폭력 앞에 눈물을 흘리는 보통 사람이다. 여성 관객들은 선우의 욕망을 강요당하는 동시에, 희수의 욕망을 포기하도록 강요당한다. 호러와 누아르, 그리고 주인공의 성별. 김지운 감독의 선택은 명백히 의도적이다. 엔딩 속 선우는 미소 짓지만, 수미의 얼굴은 검은 머리칼로 짙게 가리워져 있었다. 같은 비일상 속에서도, 수미는 정신병원에 가지만 선우는 칼에 찔리고 총에 맞아도 쉬이 죽지 않는다. 여자들도 마음 편히 분노를 터뜨릴 수 있는 영화는 언제쯤 더 많이 볼 수 있을까.
이 기사 좋아요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