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결혼해.”
‘섹스&더 시티’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캐리가 친구에게 하는 말이다. 상대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비혼 생활을 대표하는 마놀로 블라닉 문제로 친구에게 모욕을 당하고 고민하는 캐리의 모습은 현재의, 어쩌면 미래의 내 모습과 너무 닮아 있다. 죽어도 연락 없던 친구들도 이런 문자를 보내면 당장 연락을 한다. 현실감각이 없다거나, 철이 없다거나, 지 잘난 맛에 산다거나, 혼자 앞서가는 척하는, 걱정스럽고 마음이 불편한, 앞으로 두고 보자 하는 그런 느낌을 주는 아이라는 듯한 인상을 나도 적지 않게 받았다. 캐리가 말했듯. 그 모든 건 선택일 수도 있다. 내 생각에는 선택이 아닌 강요 같지만. 스물 일곱. 모 광고에서 읊었던 것처럼 그 “좋은 나이”는 꼭 앞에 ‘연애하기’나 ‘결혼하기’가 전제되었을 때 성립되는 건 아닐 텐데 말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축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택하고 유지하는 사랑하는 나의 친구들과 나의 엄마와 선생님과 언니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을 받아들이고 축복하고 싶은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 결혼해”라고 말하는 친구에게는 아무리 먼 거리라도 달려가서 축하해주었고 그 사람들이 아이를 낳으면 또 집들이를 해도 언제 어디든 최대한 달려가 진심과 포옹과 축의금과 선물로 축하해주었다. 성인 여성이 결혼하지 않고 지내면 축하 받을 일이 너무 없다는 캐리의 말은 그래서 나에게 조금 슬픈 공감을 자아냈다. 솔직히 나도 친구와 가족들의 축복 속에서 예쁜 장식이 있는 차를 타고 애인과 여행가면 좋겠다. 예쁜 것들이 가득한 바구니도 받고 샬랄라~하고 야한 드레스도 입고 파티도 하고 싶다. 이 모든 것들이 결혼하는 신부에 대한 판타지라면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 중에는 이런 것들을 동경하는 마음도 있지 않을까? 미란다는 이런 겉치레가 싫어 간소하고 조촐한 서약식으로 결혼식을 했지만, 나는 결혼이 싫어 예쁜 옷과 바구니, 꽃다발들을 받아 볼 기회가 없어진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아쉬운 건 파티가 아닌 축복인 지도 모르겠다. 앞으로의 나의 삶에 대한 선택을 인정 받고 축하 받는 것. 눈치보지 않고 엄마생각하며 울지 않고 미안해 하지 않고, 튀기 좋아하는 애라거나 잘난 척 하는 애, 결혼한 사람들을 바보로 아는 애라는 눈빛을 뒤집어 쓰지 않고, “그럼 너는 독신주의냐?”라는 질문도 없이 “나는 결혼하지 않아”라고 말 할 수 있는 것. 결혼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고, 결혼하지 않아도 섹스할 수 있고, 결혼하지 않아도 아이를 낳을 수 있고, 결혼하지 않아도 혼자가 아니라는. 그 마땅한 이야기 앞에서 나는 숙제를 하는 아이가 된다. 스물 일곱이란 그런 나이다.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남편을 따라 멀리 가기도 하고, 나에게 이제 결혼하라고 말하기도 하는. “나, 결혼해.” 당신들의 선택을 듣고 나는 마음껏 축하한다. 그러니 언제든 나에게 결혼한다고 말해도 좋다. 그러니 당신들도 나의 선택을 축하해 달라. 내가 왜 꼭 결혼을 해야 하는지 설명하라고, 비혼 생활이 이렇게나 좋은데 왜 굳이 혼인을 고집하냐며 대차대조표를 그려서 증명하라고, “왜?”라고 묻지 않았듯. 당신들도 그냥, 무조건, 축복해달라. 결혼하지 않은 나를 축복하기 어렵다면 그건 당신들이 결혼주의자여서다. 나이를 먹을수록 내 안에서 나를 보는 나도 알지 못하던 수많은 나를 발견해 나간다. 그들이 때로는 나를 힘들게 하고, 때로는 나를 부끄럽게, 때로는 나를 유혹하고, 때로는 나에게 꺄륵 넘어갈 만한 즐거움을 주고, 좀더 자주 진창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일어나게 한다. 언젠가 내가 나 스스로와 결혼하고 싶어질지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신나게 파티를 하고 꽃 장식이 있는 차를 타고 여행을 갈 것이니 아주 큰 바구니를 준비하라고 할 지 모른다. 그보다 더 큰 축복을 내놓으라고 할 지 모른다. 그 때 내가 당신을 초대할 것이다. 그 때 당신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마음껏 달려와 나를 축복해도 괜찮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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