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 출신 활동가”로 널리 알려진 김연자씨가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라는 제목의 자전 에세이 집을 냈다. 이 특별한 제목이 선택된 이유는 그녀가 준비한 비문 때문이다. “정열적으로 열심히 산 여자, 죽는 순간 오분 전까지 악을 쓰고 열변을 토했던 여자 여기 묻히다.” 그녀의 글 속에는 살기 위해 ‘악’을 쓰던 그녀의 질곡 가득한 삶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글 쓰는 일을 ‘똥 푸는 일’에 비유한다. 자신의 인생에 담긴 싫은 것들, 후회스러운 것들, 아픈 것들이 똥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미선씨는 김연자씨의 삶이 우리 역사, 근대화 속에서 빚어진 생채기와 같다고 말한다. 어머니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로 간 아버지 때문에 일찍부터 빈곤에 시달리던 김연자 모녀. 그들은 여수에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그 시절은 총체적으로 인권이라는 개념이 부재한 혼란스러운 시절이었다. 김연자씨는 어려서부터 친척오빠, 길을 안내하던 군인 등에게 성폭력을 당했지만 아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청소년 시절, 여관에서 자살을 꾀하기 위해 수면제를 먹고 죽으려 할 때도 여관의 사환이 그녀가 정신 없는 틈을 타서 성폭력을 저질렀다. 이 성폭력은 평생 그녀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마음의 병이 된다. 김연자씨는 자서전을 완성하고 난 뒤 "이 책은 다른 게 아니라 한 여자가 성폭력을 당하고 어떻게 평생을 방황하며 살다가 치유되는가의 이야기다." 그래서 김연자씨는 비슷한 상처를 안고 있는 동료들에게 마음의 힘을 되찾게 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책 곳곳에는 그녀의 상처와 한이 곳곳에 스며들어있다. 가난해서 서울로 올라온 어린 그녀는 버스차장, 책 외판원, 구두닦이 등 눈에 들어오는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고단함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어간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찾아간 시립부녀보호소에서 그녀는 '몸 파는' 여자들을 처음으로 만난 한편 그 안에서 알게 된 명희와 언니, 동생 하면서 연인관계로 지내게 된다. 훗날 시립부녀보호소의 악조건을 참지 못한 여자들이 탈출을 시도해 보호소가 쑥대밭이 된 후, 명희와 연자씨는 자연스럽게 돈을 벌러 동두천으로 향하게 된다. 그녀들에게는 별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돈을 모아서 명희와 잘 살겠다는 연자씨의 소망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실현되지 않는다. 심지어 동두천에서 아버지의 배다른 자식이었던 미자를 비롯하여 동창들을 만나게 된다. 당시의 경제적 빈곤과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마음의 상처 등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동두천으로 들어오는 여성들이 많았던 것이다. 기지촌 생활은 연자씨가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 많았다. 법적으로 성매매가 금지되어 있는데 버젓이 국가가 여성들을 상대로 성병검진을 했다. 포주와 클럽주의 착취도 문제였지만, 기지촌 여성들은 한미관계의 불평등함 속에서 최악의 조건에 처해있었던 것이다. 미군에게 성병을 옮겨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여성들을 한 달간 감금상태로 두는가 하면, 동두천의 여자가 죽어나가도 미군은 줄행랑치기 쉬웠다. 가족들은 한 여성이 죽고 나면 남긴 돈이나 물건을 가져가는 데 바빴다. 때문에 동두천 여성들은 집단적인 행동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연자씨는 ‘자매회’와 같은 기지촌 여성 자치회에서 자리를 맡는 등 활동적으로 일했는데, 화대를 깎으려는 미군들 앞에서 시위도 하고, 송탄의 성병검진에 문제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 검찰까지 뛰어가고 클럽 일대에 “포주, 클럽주인, 펨푸, 성병 진료, 보건소, 이들의 착취에 우리는 과감히 일어나야 합니다”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뿌리기도 했으며, 군산에서는 미군 범죄 최초의 무기 징역형이 선고되기까지 몸을 아끼지 않았다. 힘겨운 기지촌 생활과 투쟁만큼 동료 여성들과의 관계에 대한 묘사가 이 책을 감동적으로 만든다. 일찍이 어머니를 모시고 명희와 함께 잘 살고 싶어서 동두천으로 들어갔던 만큼 연자씨의 삶에는 한평생 고락을 함께한 어머니에 대한 애증, 어쩔 수 없이 미군과 결혼시켜 떠나 보냈던 명희에 대한 사랑과 아쉬움, 그 외 같은 처지에서 고생한 여성들에 대한 진한 애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커피 떨어지고 양담배 떨어지면 방문턱에도 안 들어오는 년들'이라고 화내다가도 계속되는 여성들의 항의와 하소연, 울음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엄마에게 버림받고 아빠에게 버림받고 짓밟히는 등 저마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가진 여성들이 자꾸만 죽어가자 연자씨는 하혈을 계속 하고, 돈도 벌지 못하는 암담한 상황에 처한다. 그때 그녀는 '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종교에 귀의해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공동체를 만든다. 처음에는 교회와 함께 일을 했지만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항의가 들어오는 바람에 아예 따로 천막교회를 짓는다. 그녀는 그 천막이 '내 평생 보아온 가장 아름다운 교회'였다고 술회한다. 이후 그녀는 송탄으로 돌아가서 참사랑 선교원을 열고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운동을 시작한다. 고 윤금이씨 살해사건만 해도 그녀는 기지촌 여성이 단순하게 동정의 대상이 되는 것이 불편했다. 그녀는 "단 한번도 제 욕심껏 시도해본다거나 이뤄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살수 있었던 삶의 희망"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다급한 마음에 누구 하나라도 만나게 되면 기지촌 여성의 억울한 삶을 말하는데 애썼던 그녀는 스스로도 조급함 때문에 오해를 샀으며, 대외활동 측면에서도 방송이나 언론, 학술대회를 통해 그녀의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불쌍한 처지라는 점만 강조되거나, 조사의 들러리로 전락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난 후 어머니와 정신적인 화해를 하면서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찾은 그녀는 앞으로도 기지촌 환경을 더 살만하게 만들어가기 위해 활동하겠다고 말한다. “나는 동두천, 송탄, 군산에서 가족과 떨어져 살던 여자들, 혼자 울던 여자들, 억울하게 죽은 여자들, 함께 저항했던 여자들, 슬픔을 깔깔거림으로 묻고 살아가던 여자들을 잊을 수가 없다. 여기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한 시대와 역사 속에서 그들의 삶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지금 이 나라 기지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계속 얘기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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