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매체에 비친 이주노동자

이주와 노동자의 권리-5

임윤희 | 기사입력 2005/08/08 [23:16]

언론매체에 비친 이주노동자

이주와 노동자의 권리-5

임윤희 | 입력 : 2005/08/08 [23:16]
이주노동자 문제는 오랫동안 사회 뒤편에 머물러 있다가 최근 몇 년 사이에 신문과 방송을 비롯한 언론매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영화나 코미디 프로그램에도 하나의 소재로 자리잡았다. 이는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그들을 ‘어떤’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살펴보면, 상황이 그다지 밝지는 않다.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무서운 시선

이주노동자들이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한국 사회에서 소위 “문제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요주의 대상이자 잠재적 범죄자로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작년 10월, 한나라당 김재경 의원은 ‘반한 활동을 벌였던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강제 추방되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김 의원이 밝힌 반한 활동이란, 안양의 한 이슬람 사원을 근거지로 하는 이주노동자들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취업을 알선해준 일이었다. 해고된 친구들의 직장을 알아봐 준 것일 뿐임에도, 테러에 대한 공포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던 분위기에 편승해 김 의원은 이들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몰았다.

“불법체류자들이 이제는 공공연하게 단체까지 만들어 반정부 시위 집회도 벌이는 등 반한 활동까지 하고”(조선일보, 2004년 10월 13일자) 있다는 주장은, 이주노동자들이 모임을 만들어 집회에 참여하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흐름에 대한 비판이었다. 많은 언론들이 김 의원의 발표를 곧이곧대로 읊었다. 일부 언론을 제외하고는 이주노동자들의 입장을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얼마 전 각종 언론에 떠들썩하게 등장했던 ‘에이즈에 걸린 이주노동자’에 대한 보도 역시 이주노동자들을 “문제적 인간”으로 보는 시선을 그대로 드러냈다. 최근 타계한 미국의 평론가 수잔 손택의 말을 빌자면 에이즈는 ‘불치병이라는 은유’에 휩싸여서 그 실체가 과학적으로 인지되지 못하는 질병이다. 한 이주노동자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에이즈’와 ‘불법체류자’라는 두 단어는 곧바로 연결돼 이들에 대한 편견을 증폭시켰다.

어느 기사는 이주노동자들의 “문란한 성관계”에 일침을 가하며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인과 성관계를 가지는 경우가 흔해 에이즈가 국내로 급속히 유입될 위험도 높다”는 의견까지 덧붙였다. (“어느새 에이즈도 ‘불법체류’”, 경향신문 2005년 4월 1일자) 이주노동자들의 경우 한국에서의 결혼이 쉽지 않기 때문에 부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사실혼 관계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는 것은 전혀 엄두에 두지 않았다.

물론 성매매를 하는 많은 한국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이주노동자 남성 역시 왜곡된 성문화에 젖어있을 수 있으며, 이에 대해 특별히 용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에이즈에 감염된 한국남성이 있다고 해서, 한국남성의 “문란한 성관계”를 문제 삼는 언론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이주노동자들의 에이즈 감염이 국내로 유입될 위험이 있다는 지적은, 국내 이주노동자들을 여전히 ‘국외’의 인간, 한국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보매체에서조차 운동의 ‘들러리’ 취급

한편,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언론의 보도 역시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이주노동자 농성 현장에서 이들의 모습을 취재하고 촬영한 기자들의 태도에선 소수자에 대한 배려의식이 엿보이지 않았다.

명동성당에서 이주노동자 농성이 진행되던 때부터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있는 지금까지, 출입국사무소 직원들은 그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시시각각 감시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을 처음 만들 즈음엔 한 출입국사무소 직원이 용감하게도 취재진으로 위장해 노조원들의 사진을 촬영하다 발각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조 활동을 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촬영 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당연하다. 까딱 하면 강제출국 당할 위험에 놓이게 되니 말이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배려하는 취재진은 극히 드물었다. 많은 매체에 얼굴을 드러내며 투쟁을 알려왔던, 현재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의 간부로 활동하고 있는 한 이주노동자는 자신의 사진을 실어도 되냐는 질문을 딱 한번 받아보았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들은 자신의 발언이나 사진 등을 어디까지 공개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권한을 아직 보장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몇몇 이주노동자 투쟁을 담은 기사들은 기사 구성방식에서 문제를 안고 있다. 진보매체들의 관련 기사들은, 투쟁과 관련한 간단한 소감들만 이주노동자들에게 묻고 투쟁방향과 실질적인 상황에 대한 설명들은 농성장에 활동하던 한국인 활동가들에게 묻는 편이다.

일례로, 농성을 정리하던 시점에 나온 진보매체의 한 기사에서는 네 번의 질문과 답변을 중심으로 기사를 구성했는데, 가장 짧은 단 하나가 이주노동자의 발언이었으며, 나머지 질문들은 모두 농성에 결합해 있던 한국인 활동가가 답했다(“슬픈 눈물이 아니라 희망의 씨앗입니다”, 참세상, 2004년 11월 28일자). 이주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진행되고 있는 농성에서조차 그들이 ‘소감’만 이야기하는 들러리로 취급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다양한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관심 가져야

이주노동자에 대한 의식적, 무의식적 편견 속에서도 이주운동이 사회에 자리잡으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큰 발전이다. 그러나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이 다양한 만큼이나, 여전히 많은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들이 가려져 있다. 아직 조직화를 하지 해서 목소리조차 내가 힘든, 이주여성들을 비롯한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사회의 뭉뚱그려진 편견 속에서 각자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실정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이주노동자들이 직접 제작하기 시작한 ‘이주노동자의 세상’과 같은 방송,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이 직접 진행하는 이주노동자방송국의 인터넷 라디오 방송 등은 이주노동자들이 직접 시청자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기회가 생겼다는 점에서 하나의 희망을 던져준다.

더불어, 이제 언론 매체들은 여전히 가려져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살려낼 새로운 방식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이주노동자를 다루면서 촬영과 같은 문제에서의 보도 윤리를 지켜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보다 다양한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에 관심을 갖고, 이들이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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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8/11 [02:02] 수정 | 삭제
  • 진보매체가 이주노동운동을 보도하면서도 중심이 되는 내용은 한국인에게 듣는 이유는, 내 생각엔 진보매체 기자들이 인맥성 취재와 보도를 하기 때문인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 액션페이퍼 2005/08/10 [01:37] 수정 | 삭제
  • 관심 뿐만이 아니라 함께 결합하고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면 고맙겠죠.
    이주 여성의 권리와 삶이 묵살되는 현장들을 많이 목격하고 계시듯이...
    칼럼 잘 보고 있습니다. 지나가다 한 소리 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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