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풍선 아티스트 이미숙

조이여울 | 기사입력 2003/05/30 [22:41]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풍선 아티스트 이미숙

조이여울 | 입력 : 2003/05/30 [22:41]
만나자마자 그녀는 풍선으로 ‘변형된 푸들’을 만들어주었다. 그냥 푸들은 이제 너무 흔해서 아이들이 재미없어 한다고 했다. 아직 풍선을 배운 지 얼마 안 되는 초보라지만 그녀의 손에서 풍선이 강아지가 되는 걸 보니 마냥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이미숙씨가 풍선 아티스트, 혹은 풍선 마법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달 전이다.

“애 낳고 힘드니까 일을 미뤘어요. 그런데 몸이 처지는 속도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더라고요. 이건 아니다 싶었죠. 처음엔 텔레마케팅 하려 했어요. 근데 오로지 돈만을 목적으로 하려니 자신이 없더라고요. 출근하고 아이 찾아오고 이렇게 사는 거. 아줌마가 일 시작하려면 자신과 일이 어느 정도 맞아야 해요. 이거 했다가 저거 했다가 그럴 수 없으니까.”

풍선은 취미로 배운 거라고 했다. 그런데 재밌었다. 학원에선 자격증도 없는 그녀에게 중학교 CA(특별활동)시간 강사자리를 소개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 받았다. 미숙씨는 바로 인터뷰 이틀 전 자격증 시험을 치렀다.

“주부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달려갈 수가 없어요. 돈이 없어서 중간에 멈추고, 이런 저런 일로 배우다 말고, 그럼 결국 할 수 없게 되죠. 지금은 풍선장식을 주로 해요.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이죠. 주위에서 레크리에이션도 하라고 하더군요. 나 하고 싶은 일과 돈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으려고 노력중이에요.”


미숙씨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일’은 삐에로 일인극이다.

“삐에로 극을 하려면 아직 멀었죠. 무대 위에서 삐에로가 풍선을 늦게 불고 있으면 재미가 없잖아요. 앞으로 2년은 더 해야지 않을까 생각해요. 풍선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하죠. 연극은 돈이 안 되고 고아원 다니면서 무료봉사도 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오히려 돈을 써야 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죠.”


연극에 대한 희망 그리고 좌절

삐에로 일인극에 대한 희망이 갑작스레 생긴 것은 아니다. ‘무대’와 미숙씨의 연결고리는 상당히 깊다.

“중2때 국어선생님 영향이 컸어요. 연극에 대한 얘길 많이 들려주셨거든요. 그 선생님과 <아가씨와 건달들>을 보러 갔는데 참 신기했죠. 선생님 도움으로 아이들과 간단히 발표도 했어요. 별 건 아니고 <아가씨와 건달들> 훙내낸 거였죠.(웃음) 고등학교 때 연극부에 들면서 ‘이 길이다’ 싶었어요.”

그러나 ‘그 길’을 찾아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졸업하니까 사회에선 학교(대학)나 전공 이런 게 중요하잖아요. 내가 그 쪽은 안되니까 다른 기술을 가지려고 했어요. 분장(메이크업)을 배웠어요. 극단 들어가려니 막상 그 쪽에서 바라는 것과 내가 잘 맞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내가 유별나게 연극을 잘 한다고 할 수도 없고. 뭔가 하나라도 특기를 가지려고 배운 거예요. 아르바이트로 서빙하면서 학원비를 댔죠.”

미숙씨는 그 선택이 ‘어린 나이에 무리한 고집을 피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게 아니었어요. 차라리 연극 쪽으로 처음부터 들어가서 버티는 것이 맞죠. 분장 배워서 연극 쪽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는 어리석었어요. 후회해요. 지금도 나는 부푼 맘 안 가지려고 하죠.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까봐. 의외로 실망하면 잘 못 헤어나거든요. 수그러들고 자신감이 없어요. 고쳐야 할 부분이죠.”

극단에 들어가려니 잘 맞지 않았다? 연극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미숙씨가 연극무대와 맞지 않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녀는 “야시시한 그걸 흉내 못 내겠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중학교 때부터 남자역할만 맡았어요. 근데 20살이 되니까 현실과 거리가 멀더라고요.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극단에서 남자역할을 할 수는 없잖아요. 연극에서 여자역할은 그런 걸(야시시한 것) 더 강조해요. 여자의 그런 걸 표현해야 한다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여자역할은 한계가 많아요. 다른 역할도 있을 텐데 굳이 여자면 그걸 해야 하는 것인지, 자신이 없었어요. 그럼 탈락인 거예요.”

그로부터 10년 뒤 미숙씨는 삐에로 일인극을 꿈꾸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연극이 이런 게 아니라면, 내 성격에 맞게 어린이극은 어떨까 생각했어요. 삐에로극은 어린이들에게 신비감을 주잖아요. 어린이들 앞에선 오히려 과장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 생각은 전부터 했었지만 구체적인 답이 나온 건 결혼한 뒤였죠.”


스스로에게 주는 만족을 만끽하며

미숙씨는 25살에 결혼했다. 결혼 전후 몇 개월간 비정규직으로 일을 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이듬 해 아들 승재를 낳고부터는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집안이 미숙씨의 공간 전부가 됐다.

“결혼 전엔 학교(대학) 못 들어간 것 때문에 많이 고민했는데 결혼하고 나니까 고등학교 나온 것도 써먹을 데가 없어 갈등이 되더군요. ‘와. 여자가 결혼하면 다 이렇게 되는 거야?’했죠. 친구들이랑 그런 얘기 많이 하는데 난 수퍼우먼은 반대에요. 옛날엔 멋있는 줄 알았는데 둘 다 잘하려다 인생 끝장난다 싶어요. ‘차라리 둘 다 못해라’ 그러죠.”

결혼 생활이 어떠냐는 질문에 간단하게 답한다.

“남편은 그냥 전형적인 남편이에요.”
“시댁이요? 남들과 똑같아요.”

시누이 5명에 아주버니 1명, 매 해 4번 치르는 제사와 명절 때마다 시댁식구 모두 모이는 데 며느리는 미숙씨 한 사람이다. “시어머니도 착한 분이고 시누이들도 나쁜 사람들 아니지만 무척 힘들어요. 포기할 건 포기하고, 내 기대치를 최대한 낮추고 하나씩 조금씩 일을 나누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미숙씨는 아들 승재에 대해선 간단하게 답하지 않았다. 유별난 엄마가 되고 싶진 않지만 교육관은 곧게 서있는 듯 했다. “아직 어리지만, 승재랑 뒷동산에 오르곤 했어요. 피아노나 컴퓨터 가르치는 건 뭔가 억지로 시킨다는 생각이 드는데, 산을 오르는 건 그렇지 않아요. 업어주거나 하지 않고 처음부터 애 속도에 맞춰 쉬엄 쉬엄 오르게 하죠. 앞으로 가능하면 여행을 자주 다니고 싶어요. 남편이 애랑 보낼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게 숙제에요. 최대한 쉬는 날은 애와 함께 있도록 하죠.”

그녀는 아이가 커서 “자연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싶단다. 그저 바람일 뿐이지만 대니서(Danny Seo)같은 ‘환경운동가’가 되면 좋겠다고.

결혼 5년 만에 집 밖을 나선 미숙씨. 주위에서 ‘애기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고 해서 4살 되도록 옆에 있었다는데 “누가 그런 말을 만들었는지 지금 후회막심”이라고 한다. “(풍선)학원 다니면서 애를 어린이집에 보냈는데 진작 보낼 걸 싶더라고요. 애가 친구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잖아요. 또래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노래도 금방 배우고 성격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힘들지만 용기를 내 일을 시작하고, 어릴 적부터 품어 온 연극에 대한 꿈이 현실에서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리게 된 미숙씨의 지금 심경은.

“밖에 나오니까 정말 좋아요. 사람들 만나는 게 얼마나 신나는지 몰라요. 남자들이랑 이야기하는 것도 좋던데요? (웃음) 내게 주는 만족이 이런 거구나 싶어요. 나에게 주는 건 늘 인색했거든요. 맨날 학대만 했죠. 이 정도밖에 안되냐 하고. 하고자 하는 일을 향해서 내가 흔들리지 않도록 돈도 열심히 벌고 돈 욕심은 줄여가면서 노력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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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면조림 2003/06/03 [19:37] 수정 | 삭제
  • 정말 진솔하고 매력적이네요.
    이미숙씨 인터뷰가 일다 저널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일다를 통해 우리 주변에 매력적인 여성들을 만날 기대를 해봅니다.
  • 탱고렛슨 2003/06/02 [15:41] 수정 | 삭제
  • 한 번 집에 들어가면 다시 나와서 사회생활하기 힘든데..

    이미숙님은 인생의 목표를 찾아 재도약하시는 군요.

    부럽고 힘이 되네요.
  • sadlisa 2003/06/02 [03:19] 수정 | 삭제
  • 저와 하나도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분이
    자기 자리를 찾아나가면서
    자신의 가치를 깨우쳐가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네요.

    <성공>이란 말은 좇같은 면이 많지만
    그래도 이런 것이 진정 <성공시대>아닐까요.
    예전 텔레비젼에서의 그 개떡같은 가짜 다큐 프로 말고요.
  • JUNE 2003/06/01 [18:59] 수정 | 삭제
  • 요즘 중학교 CA시간엔 풍선접기도 배우나 보죠?
    재밌겠다.
    우리땐 순 독서반밖에 없었는데..
  • 데비 2003/06/01 [02:16] 수정 | 삭제
  • 어린이날에 삐에로가 아이들에게 풍선접어 선물해주잖아요.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다 남자였어요.

    아이들이 여자삐에로를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이미숙님 화이팅!
  • 소다 2003/05/31 [20:07] 수정 | 삭제
  • 이미숙님이 여자역할을 하기 어려웠다고 하셨죠.
    저도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라 너무 공감하는 바입니다.
    연극은 연예계랑은 다르다고 믿었는데 여배우들에겐 비슷한 점이 많죠.

    내가 여자인데도 여자역할이 안 맞는다는 건 뒤집어생각해보면요.
    연극에서 여자배역이 실제 여자들의 모습과 다르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여자가 다 쭉쭉빵빵에 남자 꼬시려고 코맹맹이 소리내는 건 아니잖아요.

    인터뷰 보면서 연극이 표현하는 여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중국 경극에선 무대에 여자 안 세우려고 남자배우들만 출연했죠.
    무대에 설 수 있는 자격은 남자에게만 있었으니까요.
    서양도 마찬가지란 걸 영화 '세익스피어 인 러브'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여자배우들이 남성역할까지 맡았던 극들은 왜 생겼을까요.
    우리에겐 국극이 있었고 일본엔 다카라스카가 있잖아요.

    맞는 얘긴지 모르겠지만 실력있고 다양한 여자배우들이 소화하기엔
    연극 속 여자배역이 너무 폭이 좁아서가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차라리 남자배역이 더 어울리는 여자배우들이 있는 거지요.
    국극도 그렇고 다카라스카에서도 남자역을 맡은 배우들이 더 인기가 좋다고 하죠.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삐에로 마임극을 준비하신다는 이미숙님 멋집니다.
    그 날이 오면 저도 공연을 보러가고 싶군요.
    어린이극을 꼭 어린이만 보고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 랄랄라 2003/05/31 [13:28] 수정 | 삭제
  • 무대 위에서 아이들과 같이 이미숙씨의 삐에로 공연을 보게 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
  • 독자 2003/05/31 [09:48] 수정 | 삭제
  • 매력적인 분이군요.

    기사를 읽다보니 저절로 기운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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