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의 성차별과 표현의 자유

유럽연합, 성차별적 이미지 금지법안 논란

금오해령 | 기사입력 2003/06/30 [05:19]

미디어의 성차별과 표현의 자유

유럽연합, 성차별적 이미지 금지법안 논란

금오해령 | 입력 : 2003/06/30 [05:19]
1999년 지하철 파업을 위시한 민주노총 총파업 당시 만들어졌던 포스터 한 장은 여성들의 강력한 항의에 직면했다. 파업현장으로 나가는 건장한 남성 노동자 뒤로 아이를 안은 여성이 배경으로 흐리게 처리된 그 포스터의 카피는 “당신만이 희망입니다”였다. '투쟁하는 남성가장'의 뒤로 여성노동자들은 또 한 번 배제되는 단적인 장면이었다. 이 포스터와 관련한 논쟁에서 ‘전선을 흐리지 말라‘는 준엄한 충고도 등장했었지만, 대체 뭐가 그렇게 문제여서 그렇게 항의를 하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는 10년이 넘게 여성단체 등으로부터 항의를 받고 있음에도 아직도 공공연하게 게시되고 있는 윤금이씨 주검사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이미지들 혹은 이미지의 이용에 대해서 ‘그러면 안 된다’고 기나긴 설명을 해야만 하는(그리고 설명을 해도 말이 안 통하는) 현실은, 우리가 얼마나 성별 고정관념적이거나 여성학대적인 이미지들에 익숙하게 살아가는지를 반증해준다. 그 어떤 논리로도 이기기 어려운 것은 오랜 시간 학습한 편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그로 인한 관성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의 ‘신문 읽는 아빠와 앞치마 두른 엄마‘의 삽화에서 시작해서, 수영복을 입은 채 온 길거리에 전시되고 있는 여성의 몸들, 가정폭력과 성폭력의 피해상황까지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인양 생각하는 황색 언론들까지. 이런 이미지들은 ‘대중매체’로 총칭되는 우리 주변의 모든 매체들을 통해서 끝없이 우리에게 전달된다.

‘엄마는 가정주부’라는 고정관념이 남성가장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여성노동자와 여성가장들의 존재를 삭제하고 있다는 것을, 남성들이 멋대로 만들어낸 ‘창녀’의 이미지가 성매매의 현실을 은폐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여자의 노(NO)는 예스(YES)'와 같은 의미야’라는 편견이 얼마나 많은 성폭력을 로맨스로 만들고 있는지, ‘여자는 수학, 운전, 운동, 육체노동 등을 못 해’라는 고정관념이 어떻게 노동시장에서 성별직종분리와 차별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되고 있는지도 알고 있다.

유럽연합, TV와 광고에서 성차별 이미지 금지법안 검토

그렇다면 현실의 차별을 반복 재생산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이러한 이미지의 유포가, 인권차원에서 법으로 금지된다면 어떨까? 유럽에서는 바야흐로 그러한 법안의 현실화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고 있다.

지난 25일 유럽연합(EU)이 텔레비전과 광고에서 성차별적이거나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는 이미지를 금지하는 법안을 검토 중에 있다고 언론들이 보도했다. 전날 사회적 사안을 다루는 그리스의 위원인 안나 다이맨토포우로우(Anna Diamantopoulou)는 노동시장 바깥에서의 젠더 문제에 대한 내부적 검토를 제안함으로써 이 법의 현실화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아직 논의의 초기단계라 명확하게 결정된 바는 없다고 관련자들은 언급했다.

이 법안에 압력을 넣고 있는 로비단체 중 하나인 EWL(European Women's Lobby)의 정책 담당자, 세실 그레보바(Cecil Greboval)는 “우리는 ‘고용’ 그 자체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 역시 EU에 바란다. 우리는 성고정 관념과 싸울 도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위원회 내부에서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 같다”고 가디언(The Guardian)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말했다.

다이맨토포우로우 위원의 말에 따르면 이 법은 유럽의 미디어와 광고, 보험 산업을 포함하고 있으며 성별 고정관념을 담고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는 광고를 금지시킬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은 또한 동성애자와 나이든 노동자에 대한 차별적인 이미지 역시 금지할 것을 포함하고 있고, 여성 혹은 남성을 성적도구로 묘사하는 텔레비전 쇼와 광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유럽전체에 법적 영향력을 미치는 EU 법에는 이미 노동현장에서의 성차별을 금지하는 엄격한 법이 있지만, 이 의원의 이번 제안은 1997년 암스테르담에서의 결정보다 더 확대된 것이다. 그간 여성들은 고용, 승진, 임금, 복지 등 노동과 관련된 직접적 차별과 싸워왔고, 최근 십여년 간은 노동현장의 각종 형태의 간접차별을 개념화해내고 그것과 싸워왔다. 이번에 제안의 진일보한 면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차별적 이미지와 고정관념’을 여성이 노동현장에서 받는 차별과 연결시켜 법안을 만들어낸 지점이다.

이 법의 초안은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이미 ‘미디어의 자정노력에 맡겨야 한다’는 등의 다른 의견을 가진 의원들의 반발에 직면하고 있다. 이는 오랜 기간 여성주의자들을 괴롭혀온 딜레마인 ‘차별’과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지난한 논쟁을 떠올리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경우, 청소년보호법이 청소년들을 ‘음란한 정보’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인터넷에 대한 국가의 검열이 강화되고 ‘국가의 기준에서 정상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성’은 모두 ‘음란’이 되는 해프닝을 경험했기에 미디어의 ‘이미지’를 법으로 규제하겠다는 발상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법의 목적과 의도가 어떻건 간에 그 법이 적용되는 대상과 적용하는 주체의 의식과 가치관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에서는 이 법의 효과에 대해서 예상하기 쉽지 않다.

또한 이는 기나긴 법과 제도 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미디어와 자본의 태도 그리고 사회인식을 또다시 법으로 규제하겠다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각종 언론을 포함한 미디어의 변화가 자성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법의 강제성 때문이라면 빠져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일례로, 영국의 타블로이드판 일간지 데일리 메일(Daily Mail)은 이 기사를 보도하면서 ‘너무 늦기 전에 성차별적 농담을 즐기세요’라며 아예 한 페이지 특집을 마련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이성에게 말하기’라는 코너는 명백히 ‘여성주의자’들을 조롱하는 전형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고 그 특집의 마지막은 “전구를 가는데 몇 명의 그리스 페미니스트(다이맨토포우로우 위원을 비꼰 표현)가 필요할까요?”라는 농담(?)이 장식했다. 이 법안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할 수 있다.

이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은 ‘빅 시스터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Big sister is watching you)'였다. 조지 오웰의 소설에서 국가적 통제와 검열의 상징이자 실체였던 ’빅 브라더‘를 패러디한 이 문장은, 언론을 포함하는 대중매체에 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언론이 생산하는 ’이미지‘는 그 매체가 가진 맥락과 독립되어 생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왜, 어떻게 지속적인 성고정관념 재생산하나

우리의 현실에서 당장 주변의 대중매체들을 비판적으로 접근하여 경향을 읽어내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누가 왜 어떻게 지속적으로 성차별적인 이미지와 성고정관념을 반복재생산하고 있는가? 수잔 팔루디는 91년에 출판된 ‘반격(Backlash)-여성에 대한 불명확한 전쟁’이라는 저서에서 미디어에서의 반여성주의의 ‘경향’을 지적한 바 있다. 여성주의적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여성들의 집단행동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둠과 동시에 그 반동으로,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 반여성적인 흐름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만 해도 성공한 여성 이미지를 보여주며 “그녀는 행복하다. 여성이 해방되었기 때문이다”라고 입을 모았던 서구의 언론이, 80년대 이후 성공한 여성 이미지를 통해서 “봐라, 그녀는 불행하다. 너무 많이 해방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언론들은 사회학자, 정치학자, 심리학자 등의 전문가들을 동원해가며 여성 전체로 일반화하기 어려운 빈약한 증거들로, 일하는 현대여성의 사회적 행동의 경향들을 보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성공한 여성과 독신여성은 평등해지려다가 (여성다움을 잃어서) 불행해진 여자들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이미지는 한 장의 사진이나 한 페이지의 글보다는 좀 더 치밀하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만들어지고, 그렇게 쌓인 이미지는 또 다른 고정관념을 재생산한다.

앞서 언급한 법안이 EU에서 현실화 된다면 또 한 번의 진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명백하게 폭력적이거나 노골적으로 성차별적인 이미지가 유포되는 것은 사실상 막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며, 성고정관념, 여성학대적, 성적대상화의 이미지 자체가 성차별적이라는 인식의 확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마냥 박수를 치며 저런 법이 빨리 자리를 잡기만을 기다리기에는 우리의 문제들은 그다지 단순하지 않다. 그것이 왜 문제인지가 공유되지 못한다면 어떤 방식으로건 그 이미지들은 재생산될 것이다.

법 제정이건, 대중매체들이 자성의 노력이건, 외부에서의 비판의 목소리이건 무엇이 되었던 간에, 명확한 것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당연하게 스며들어온 이미지들에 구체적이고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참고 : The Guardian 03.6.25 03.6.28/Daily Mail 03.6.25/Susan Paludi(1991) Back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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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무늘보 2003/07/03 [06:09] 수정 | 삭제
  • 요즘 티브에서 자주보는 광고죠.
    약간 나이들어 보이는 여직원이 복사를 하다 복사지땜에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죠.
    등뒤에 있던 남자동료들이 그걸 보고 도망칩니다.
    속으론 노처녀의 히스테리라고 흉볼지도 모릅니다.
    그들중엔 그녀의 동기나 후배도 있을텐데 그들은 더 중요한 업무를 보실테죠.
    경력있어보이는 그리 예쁘지 않은 여자의 신경질.
    그들이 바라는 그 화가난 상태의 이미지가 왜 하필 그녀일가요?
    그런 상황에선 남자도 화나는건 마찬가지일텐데요.
    복사하는 잡무,그리고 짜증은 여성적이미지라고 정해놓은 거지요.
    그 광고 볼때마다 슬프면서 화가납니다.
    그여직원이 정말 복사지땜에 그렇게 울화통을 터뜨리겠습니까?
  • 더베스트 2003/07/01 [14:07] 수정 | 삭제
  • 저도, 광고나 이미지 차용하는 걸 법으로 금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게 우리나라처럼 사상이냐 음란이냐가 기준이 아니라,, 성차별적이냐 성고정관념을 주입시키는 거냐의 논란인 경우.... 법이 통과되느냐의 문제와 별개로,, 매체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경고가 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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