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나는 ‘동거’한다

왜곡된 동거 이미지 벗자

심아영 | 기사입력 2003/07/09 [01:40]

[기고] 나는 ‘동거’한다

왜곡된 동거 이미지 벗자

심아영 | 입력 : 2003/07/09 [01:40]
확실히 달라진 게 있다면, 관심 있어 하는 리스트에 ‘동거’라는 단어가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한동안 동거 관련 사이트에 들어가서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 생활을 뒤돌아보고, 동거를 다룬 일본 만화 <우리 집에 오세요>를 보며 키득키득 웃고 울고,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지 않으면 여간해선 영화를 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와니와 준하> DVD를 꺼내들고.

생각해보면 동거는 언제나 어떤 형태로든 우리 주위에 있었고, 또한 우리는 상품으로서의 동거를 자연스레 소비해왔다. 그러나 최근 MBC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에 얽힌 혼전동거 담론을 관찰하자면, 정작 동거에 관한 관념만큼은 쉽사리 최소 요구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럼 도대체 그들은 여태껏 무슨 생각으로 동거라는 상품을 소비해왔던 걸까.

‘동거’라는 이미지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으로 치환될 때에는, 그 현실은 간과된 채 사랑하는 사람과 일상을 공유한다는 점에서의 로맨스, 혹은 역으로 정말로 그 현실은 무시된 채 문란하고 자극적인 성의 얼굴을 갖는 이야깃거리 정도의 가치를 갖게 된다. 동거와 결혼의 극명한 차이는 제도 안의 섹스를 하느냐의 차이다(그렇다고 해서 동거 내에서의 섹스가 불법이라는 뉘앙스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한 인간의 완성된 형태로 추앙하는 반면 동거는 마치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터부로 몰아가는 한국 사회의 현실은, 법의 이름을 빌린 윤리가 그 근엄한 잣대로 개인들의 권리와 인생관을 좌지우지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동거=혼전동거?

개인적인 역사를 끄집어내자면, 내게 있어 동거란 ‘같이 사는 것’ 이상도 이하의 의미도 아니었다. 엄마의 재혼과 더불어 그녀의 새 남편의 호적에 입적될 수 없었던 오빠와 나는 따라서 주민등록상에 그들의 ‘동거인’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고, 사실상 그때부터 나의 동거는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학교에서 주민등록등본을 요구할 때면 어린 마음에 항상 그 점이 상처가 되긴 했지만, 그건 단지 법일 뿐이지 서로를 사랑하는 엄마와 우리 오누이의 관계에 있어서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뜯어 고쳐야 할 악법인 건 자명하다.

동거는 말 그대로 ‘같이 사는 것’이다. 반드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옵션은 결국 개인의 선택과 가치관의 영역이다. 결혼을 전제로 행해지는 동거는 ‘혼전동거’이지, 결코 ‘동거=혼전동거’라는 등식은 있을 수 없다.

현재 나는 엄마와의 ‘동거’에서 벗어나 지금의 룸메이트와 동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결국 모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인데, 한 쪽엔 굳이 법적인 근거를 들먹이며 ‘동거’라고 낙인찍고 싶어하는 반면(아직도 나는 엄마의 주민등록등본에 동거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다른 한 쪽엔 차마 ‘동거’라는 말조차 꺼내기 힘들게 만드니 이런 모순이 또 있을까.

섹스에 대한 금기

최근 <옥탑방 고양이>라는 드라마를 가끔 재방송으로 보면서 그 드라마가 그나마 한국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는 것은 ‘섹스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동거해요’라고 말한다는 것은 ‘우리 정기적으로 섹스해요’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게 취급되므로, 현실적으로(왜 현실적인지는 겪어봐야 안다) 동거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에게 쉬쉬하고 있던 연인간 간헐적인 섹스를 수면 위로 띄워 올리는 일이다. 바로 그 점에서 동거는 표적의 대상이 된다.

한국 유교사회의 점잖은 그네들에게 있어서, 음성적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성이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니는 일은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미혼모를 양산한다는 둥(미혼모는 있지만 왜 미혼부는 없는가), 한국사회의 뿌리가 흔들린다는 둥, 아직 정책적으로 미흡하기 때문에 시기상조라는 둥… 그런 말들로 동거를 저지하려는 움직임은 개인의 행복권을 전체주의적인 발상으로 뭉개려는 의도로까지 읽혀진다.

사실 많은 연인들에게 ‘왜 동거를 하느냐’는 내용의 설문조사를 하면 아마 칠십에서 팔십 퍼센트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 대답은 결코 자신들의 속내를 감추려는 말이 아니라 곧 진실이다.

지금의 룸메이트와 동거하기 전, 서로의 수업을 마칠 늦은 오후에 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고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을 때 정작 같이 먹고 싶었던 건 음식 잘 하는 식당에서의 설렁탕이 아니라 따끈한 흰 밥 위에 얹어서 먹는 노릇노릇한 스팸 한 조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메뉴를 제공하는 식당은 거의 없기 때문에 연인들은 한번쯤은 동거를 꿈꾸게 된다(그게 내가 동거를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혹은 매번 7천원이나 하는 돈을 내 가며(둘이 합치면 1만4천원에 팝콘, 오징어, 음료수, 차비까지 계산하면 족히 2만원은 든다) 영화관을 찾는 것보다, 수박을 아삭아삭 씹어 먹으며 소파에 다리를 엇갈리고 누워서 보는 비디오(수박값이 아무리 비싸봐야 합쳐서 5천원 남짓 한다)맛이 더 괜찮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일상을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1순위였다면 그 다음에 올 수 있는 건 이처럼 경제적 이유다. 특히 둘 다 지방학생이었으므로 따로 살아서 드는 집 값과 오며 가며 길에서 뿌리는 돈들을 굳이 무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같이 살면 절반의 집 값과 생활비로도 여유 있는 집과 생활을 즐길 수가 있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스팸을 먹을 수 있는데.

‘자기만의 방’은 필요하다

그러나 동거를 하면서 반드시 유념해야 할 부분은 독립적인 공간(자기만의 방)의 보장이다. 또한 그 공간은 물리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관념적인 의미까지 포괄해야 한다. 동거 초기에는 서로의 귀가시간으로 인해 많이도 다퉜는데(주로 일방적인 불평에 그쳤지만), 특히 내 쪽이 집에 혼자 있는 걸 못 견뎌하는 편이어서 그 문제에 관해 룸메이트를 많이 닥달했던 것 같다. 하지만 같이 산다는 것이 곧 상대의 일상생활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금물이다. 게다가 우린 둘 다 아직 학생이어서 같이 있는 게 공부하는 데 있어서 많은 장애 요소였음은 물론이요, 특히 글을 쓰거나 혼자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오히려 상대가 불편하게까지 느껴진다. 상대가 옆에 있어도 자기 일을 잘 할 수 있는 상태가 가장 좋지만, 그런 상태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므로 ‘동거’ 속에서 ‘독거’할 수 있는 방은 무엇보다 절실한 문제다.

가끔씩 동거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회의가 들 때가 있다. 이십 년 이상을 다른 환경에서 자라 온 남녀가 일상에서 부딪히게 되는 몇 가지 사례들-가사 분담, 감정 처리 문제, 귀가시간으로 인한 다툼, 노출되기 쉬운 자존심 등-은 차치하고서라도, 동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내지 못하는 룸메이트를 보면서 그 당당할 수 없음에 회한이 든다(그에게 전화가 걸려 오면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숨소리도 내지 못한다!!!).

그리고 그건 비단 룸메이트 이야기만은 아니다. 행여나 엄마 귀에 말이 들어갈 때를 염려해서 ‘커밍아웃’하지 못하는 내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나름대로는 스스로 정치적이기 위해서 ‘나 동거해.(놀랐지?)’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하다가도 그 순간 상대의 표정에서 읽히는 미묘한 변화는 일시적으로 패배감을 느끼게 한다. 숨길 일이 절대 아닌 어엿하고 당당한 나의 생활 양식이라는 것을 세상에 공표할 수 있을 날이 언제일까.

글쎄, 사람의 일이라는 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고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내 룸메이트와 결혼할 생각으로 동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둘이서 10년 후의 결혼 생활을 디자인해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론 호주제가 ‘완전히’ 뜯어 고쳐지기 전까지는 그리고 부부가 법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누리기 전까지는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 굳이 결혼까지 해서 양가에 얽히고 각종 스트레스를 받기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법적으로 독립적인 개체로, 그러나 함께 있는 지금의 ‘동거’가 훨씬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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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쯧쯧 2020/01/23 [04:34] 수정 | 삭제
  • 동거하는 사람들 특징 -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이 멋인즐 안다. 살아봐야 상대를 안다는건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안다는 것과 동격. 경제적인 이유로 동거한다는 구실과 원조교제한다는 것과 뭐가 다른가? 동거 자체가 괜찮다면 자기들 부모가 각각 다른 사람이랑 동거해도 쿨하다고 생각할까?
  • 전감사 2007/06/28 [06:17] 수정 | 삭제
  • 당신 떳떳하게 말못하면 문제가 있다는 거야!

    다좋아 딴놈과 혼인내지는 사귈려면 본인의 동거경력을 꼭 밝히소!

    남자는 다 똑같거든! 사자 돌림쓰는 집안에 시집가기는 글렀구만! ㅉㅉㅉㅉ
  • D 2003/07/18 [03:44] 수정 | 삭제
  • 한국남자들은, 대부분 동거...라면
    결혼이라는 책임을 지지 않고도, 섹스라는 열매를 원할때마다
    댓가없이 즐길수 있고, 거기다 가사노동력까지 얻을수 잇는 편리한
    제도..라고 생각하죠..
    (대부분의, 대학생동거를 보면, 똑같이 집에서 생활비받아서 보태는데도
    남자는 놀고, 여학생이 집안일 다하더군요..- -;;)

    그러나,
    여자쪽에서도 - 꼭 결혼을 전제로 하지않는다면..

    동거란, 결혼했을경우 시댁이 주는부담- 시댁에 대한 의무와, 결혼했을시의
    아이를 낳고 키워야하는 의무- 에서 벗어나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연애생활을 즐길수 있는 편리한 제도로 활용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집안 대 집안의 결합으로서의 결혼이, 한국사회 결혼의 진정한 의미인
    현실에서,
    개인 대 개인으로서의 생활 을 살수 있는 동거는,
    자식들이 자신(부모- 특히나 남자쪽 부모들...)에게 효도해주고 일해주기를 바라는 부모세대에 대한 반항
    혹은 사회에 대한 반발(사회구성원을 늘리고, 세금을 더내고, 등등에 대한) 로 느껴져서, 더욱더 받아들이지 못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결혼한 커플에게 주어지는 수많은 의무- 고물가 저소득 시대에, 시댁봉양(시부모의 부양 및 시댁의 각종 경조사 참여),자식 양육(엄청난 사교육비와 그에비해 부족한 저렴한 육아시설 그리고, 아들 낳기..)-가 계속 개인이 감당해야할 문제로 당연시 된다면, 그 의무를 이행할 능력이 되지않는 젊은 커플들의 반항으로,
    동거 라는 제도를 활용하는 것도 좋지않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두서없는 긴글..이네요..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시몬 2003/07/10 [12:01] 수정 | 삭제
  • 동거를 결혼을 전제로 하고 얘기하는 것 싫었어요.
    부모님들에겐 결혼을 약속해야만 용서받는 분위기잖아요. -_-
    서로 안 맞으면 헤어질 수도 있는 거고 결혼 안하고 계속 살 수도 있는 거지!
  • 별림 2003/07/09 [18:55] 수정 | 삭제
  • 동거에 관한 가장 평범하고 정상적인 상식을 적어주신 것 같습니다.

    동거를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또 급진적인 라이프 스타일로
    묘사하는 것이 별로 와닿지 않았었거든요.

    이런 생각이 평범한 것으로도 정상적인 것으로도 상식으로도 여겨지지 않는
    현실이 영 마땅치 않네요.
  • EVA 2003/07/09 [15:35] 수정 | 삭제
  • 지방에서 타지역으로 유학간 학생들이나.. 서울서 지방으로 간 학생들 사이에 동거하는 경우 많다고, 우리 집에선 2-3시간 걸리는 학교를 통학하게 했답니다.

    저만 해도 부모님의 영향인지 동거하는 학생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한심한 생각들이지만, 그땐 주위에서 욕하는 애들도 꽤 많았답니다.

    전 동거에 대해 결혼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만요. 동거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일 분담도 잘 해야되고 맺고 끝는 게 분명해야 되는데 남자들은 그런 걸 잘 못하잖아요.

    어른들은 동거하면 여자만 손해라고 하시죠. 소문나면 끝장 아니냐고 하구요. 그러고보면 동거하는 학생들에 대해 욕했던 애들도 다 여학생만 가지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욕먹을 일이라고, 연인 사이에 성관계는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 투투 2003/07/09 [13:11] 수정 | 삭제
  • 주위의 이상한 시선들만 빼면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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