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드러내는 삶”

이반(queer) 사이트 개발자 최문선

조이여울 | 기사입력 2003/07/14 [03:34]

“나를 드러내는 삶”

이반(queer) 사이트 개발자 최문선

조이여울 | 입력 : 2003/07/14 [03:34]
“레즈비언으로는 처음 나가는 인터뷰인데 전형적인 이미지로 보여서 어떡하죠?”

최문선씨는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뜻밖의 얘길 했다. 자신이 소위 ‘여성스러워 보이지 않는’ 타입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레즈비언에 대한 편견을 강화할 우려가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별 걱정을. ‘그건 그런 편견을 가진 자들의 몫이지 우리가 염려할 바 아니’란 얘길 하며 웃었지만 한편으론 씁쓸했다.

레즈비언이란 것 외에 그녀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음악을 전공했으며 현재 야근을 밥 먹듯 하는 프로그래머라는 것, 그럼에도 사랑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것. 필자의 기준엔 그녀도 ‘수퍼우먼’인 셈이다. 개인적으론 음악과 일, 연애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단지 문선씨가 커밍아웃한 몇 안 되는 ‘레즈비언’이란 이유로 우리의 인터뷰는 ‘성정체성’에 대한 것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첫 번째 아웃팅

“여자를 좋아하는 게 자연스러웠고 이상하지 않았어요.” 문선씨는 동성애가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알 수 없지만(누군들 알겠는가) 스스로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스스로에게’는 말이다.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게 사회에선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다. 연극부 활동을 했는데 문선씨 말고도 친구들, 선배들 중에 레즈비언이 있었고 서로를 ‘레비’라고 불렀다. 당시 사귄 친구가 있었는데 그렇게 심각한(?) 사이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누군가 두 사람이 사귄다고 담임에게 고자질을 했고, 당장 부모님이 학교로 호출됐다. 고2 겨울방학 때의 일이다. 분위기는 심각했다. 4시간 동안 교실에 감금시키고 교사들이 친구들을 하나씩 불러내 ‘심문’을 한 것이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몰라 문선씨도, 친구도 그저 “아니다”라고 했다.

요즘 여자고등학교에선 교사들이 학생들 간의 동성애를 ‘금지’하기 위해 백방 노력을 기울인 다는데 문선씨가 다니던 학교가 바로 그랬다. “머리 짧게 자르고 오면 ‘니가 남자냐’ ‘너 동성연애하냐’하고… 화장실에 애들 같이 가지 못하게 감시했어요.” 한 번은 화장실을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친구와 같이 갔다가 걸려서 교장선생님 앞에까지 서게 됐다. 그 때 교장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화장실에 둘이 왜 같이 들어 가냐? 여자애들끼리 안고 뽀뽀하는 거 서양에서나 그런 거지, 우리 미풍양속 해치는 거다.”

두 번째 아웃팅

문선씨는 고3때 첫사랑을 만났다. 학교 후배였는데 이 때도 무사하지 못 했다. 후배가 편지를 쓰다가 선생님에게 걸린 것이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고 문선씨와 후배는 학생부에 끌려가서 얻어맞았다.

문선씨는 당시 담임선생님을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은 “내 상식으론 널 이해 못하지만 학교에서 난리 피우는 것도 이해가 안 간다. 너희가 ‘동성연애’를 하든 안 하든 학교서 어떻게 못하는 거 아니냐. 솔직히 말해봐라” 하셨다. 그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후회가 된다.

학교를 나설 때 어머니는 문선씨가 마치 도망이라도 갈 것처럼 손을 꽉 붙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엄마랑 한강갈래, 약국갈래.” 그리곤 한강에 데리고 가시더니 가슴에 사무치는 말씀을 하셨다. “동성연애자는 밑바닥 인생이다.”

“동성연애자는 밑바닥 인생이다”

이후 문선씨는 그 말을 또 한 번 듣게 된다. 당시 입시철이었는데 학교며 집이며 감시체제였고 문선씨는 단지 애인만 보고 싶을 따름이었다. 입시가 다가올수록 불안해졌다. 크리스마스 날 친구들끼리 파티 한다고 술 먹고는 단체로 집을 나와 천호동 한 구질구질한 여관에 갔다. 그러다 얼마 안 가 애인을 통해 이들의 행방을 안 부모님들이 여관에 들이닥쳤고 문선씨와 친구들은 질질 끌려나갔다.

거기에 애인의 부모님도 함께 와 계셨다. 그 분들이 애인에게 한 말을 문선씨는 잊을 수가 없다. “너 문선언니랑 계속 만나면 너도 밑바닥 인생이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싶었다. 다시 안 받아주겠다고 하는 레슨(작곡) 선생님을 찾아가 울며 불며 애원을 했다. 그렇게 입시를 위한 합숙에 들어가면서 하루 2시간씩 자고 대입을 준비했다.

아웃사이더, 다양한 세상과 만나다

그렇게 입학한 대학. 그러나 문선씨의 대학생활은 지옥이었다. “(한 과에) 30명 중에 4명이 남자였거든요? 그 남자애들이 다 해먹었어요. 과 대표도 남학생이 해야 한다는 식이었고. 남자교수들은 남학생들만 가르쳤어요. 엠티 가선 부르스 추고 노는 그런 분위기. 못 봐주겠더라고요.”

고등학교 때 놀 건 다 놀아봤고 대학 와선 제대로 공부하자고 결심을 했는데 대학 분위기는 그게 아니었다. “무슨 음악 좋아?”라는 질문에 과 학생들은 “골치 아프니 그만 하자”며 순 미팅이며 화장 얘기만 했다. 알고 지내던 레즈비언 친구들 역시 여자(연애) 얘기에만 관심이 있었다. 고등학교 동창들도 생활이 다르고 생각에 차이가 나니까 점점 멀어지게 됐다. 사람 좋아하는 성격인 문선씨인데 얘기 통하는 사람이 없어 점점 아웃사이더가 되어 갔다.

결국 입학 1년 만에 유학을 결심했다. 대학에서 교육받는 게 ‘우물 안 개구리’란 생각이 들었고 당시엔 교편 잡을 거 아니라면 연고지도 별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부모님은 ‘레즈비언 생활 청산’하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반가워하셨다(물론 그건 부모님의 착각이었다).

이렇게 문선씨는 미국 보스턴으로 향했다. 전공은 영화음악. 미국에서의 생활은 고생의 연속이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접시닦기, 호텔청소, 식당 아르바이트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전공 관련해서 교수의 추천으로 라디오 광고음악 등을 만들기도 했지만 음악으로 먹고 사는 건 뼈를 깎는 일이란 걸 알게 됐다.

문선씨의 이후 가치관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은 여행이다. 3주간 전미 지역을 버스로 돌아다녔는데 채팅을 통해 알게 된 친구들 60여명과 만났다. 여행을 통해 세상에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 일반(이성애자), 이반(성소수자), 어떤 인종이든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 많다는 것, 그리고 ‘사람 사는 데 옳은 방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동성애자를 인정하게 만들겠다

한국에 들어오기 직전 문선씨는 보스턴으로 찾아 온 아버지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때 아웃팅 사건 이후로 아예 딸에게 말도 건네지 않으셨던 분이다. ‘정신병자’ ‘사탄의 자식’ 별 소리를 다 들었지만 “(동성애자가) 아니다”라고 부인하지 않았다.

2000년 한국으로 온 문선씨는 계약직으로 번역일을 하다가 뮤지컬을 시작했다. 연극했을 때 알았던 선배들의 부탁으로 뮤직디렉터를 맡은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좋았지만 정말 너무 배가 고팠다. 문선씨는 ‘이번이 음악으로 하는 일은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했다.

당시 음악에 대한 염증과 자신의 한계를 느끼던 시기였다. 문선씨가 음악에 매력을 느낀 이유는 ‘수학적이기 때문’이었다. 듣기 좋은 음악을 계산해낼 수 있다고 믿었던 거다. 컴퓨터음악이 큰 분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악기(툴, tool)의 일종일 뿐이었다.

문선씨는 창의적인 일보단 이론이나 논리적인 일이 맞았다. 논리적으로 풀어져 나가는 게 무엇보다 즐거웠다. 그녀는 자신의 적성을 찾아 프로그래밍을 배웠다. 3개월 간 회사 인턴생활을 거쳐 프리랜서로 일하다 이반(성소수자)회사에 취직했고, 현재까지 이반 커뮤니티 ‘해피이반’(www.happy2van.com)의 관리책임을 맡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실 지 몰라도 난 내가 하는 일이 동성애 인권운동이라고 생각해요.” 문선씨는 이 사회가 동성애자를 인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선 동성애자들이 동성애자를 위한 사업을 하고, 또한 그것이 돈이 된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지금까지 프로그래머로써 일해왔지만 앞으론 이반 사이트 컨텐츠 기획 쪽으로도 길을 터 볼 참이다.

새삼, “동성연애자는 밑바닥 인생이다”라는 말이 역으로 그녀를 움직이는 힘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문선씨는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아닐까’ 자책하시는 어머니에게, 대화가 끊긴 아버지에게, 그리고 동성애라면 ‘난리법석’을 떠는 이 사회에, 동성애가 이상한 것도, 어둡고, 침침한 것도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한다. 아니, 이미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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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07/15 [19:12] 수정 | 삭제
  • 돈이 원체 많은 사람 빼곤 웬만해선 음악으로 먹고 살기 힘들죠.
    하고 싶은 일과 돈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꿈을 하나씩 접어가는 게 나이드는 과정인 것 같더군요.
    최문선님도 그런 갈등을 많이 하셨을 것 같네요.
    또 다른 꿈을 일찍 키워가시는 게 부럽기도 합니다.
  • 어떤 생각 2003/07/14 [17:35] 수정 | 삭제
  • 인터뷰기사를 읽다 제 고등학교 시절 떠들썩했던 아웃팅 사건이 떠오르더군요.
    무용하는 친구와 체육하던 친구가 유달리 함께 다녔던 것이 화근이었던 것 같아요. 제 담임은 참 무식한 인간이었는데 그 무식함을 유감없이 발휘해 주었지요.
    그 체육하는 친구를 교무실에 불러 "네가 동성연애를 해!"라면 떠들썩하게 그 친구를 아웃팅시켰지요.
    그런데 사실 아웃팅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친구가 동성애자인지는 지금껏 확인된 바가 없거든요.
    만약 그 친구가 동성애자였다면 그것은 분명 심각히 폭력적인 아웃팅이지요.
    설사 동성애자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동성애 혐오증으로 똘똘 뭉친 한 선생이 확인된 바 없는 사실을 가지고
    한 학생에게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 폭력을 가했다는 것이지요.

    정말 우울한 고교시절의 기억이군요.
  • 레즈 2003/07/14 [10:35] 수정 | 삭제
  • 비슷한 얘기 많죠.
    왜 항상 이반들의 청춘은 아웃팅으로 점철된 것인지.
    우릴 그냥 냅두기만 해도 살기 편할텐데 말입니다.

    기사 재밌게 봤어요.
  • 이선영 2003/07/14 [10:29] 수정 | 삭제
  • 재밌는 스토리가 많네요.
    저 여고다닐때는 아기자기 커플이 많았지요.
    ㅋㅋㅋㅋ

    재능도 많고 고급인재인듯...
    동성애자라는 간판때문에 가려진듯한 기분이드네요.
    화이팅~

    P.S : 일러스트가 참 정감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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