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 그리고 올해 들어 진보언론을 필두로 '여성정치세력화'가 뜨는 이슈가 되고 있다. 일다는 기존 언론의 '여성정치세력화' 접근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를 시작으로, 앞으로 본격적인 여성정치세력화 논의를 시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페미니즘? 모른다, 치고본다, 발뺌한다 1990년대 중반 남성들은 ‘페미니스트’하면 떠오르는 인물로, 모 드라마에서 ‘커리어우먼’ 역할을 맡은 탤런트와, 당시 잘 나가는 변호사를 꼽았다. 그로부터 수년 후 모 드라마에서 “난 예뻐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어”라는 대사가 ‘뜬’ 것 역시 ‘예쁜 여성은 페미니즘의 적’ 수준의 유치하기 짝이 없는 남성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정치세력화와 진보언론’을 논하면서 이렇게 무식한 수위의 얘길 꺼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진보언론의 여성이슈를 다루는 방식, 여성주의를 이해하는 폭, 여성정치세력화에 접근하는 태도가 꼭 그 수준이기 때문이다. ‘여성정치세력화’의 화두가 ‘박근혜’가 된 것이 그 증거다. 여성의 정치세력화는 여성운동진영이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이슈다. 그런데 작년, 여성정치세력화 논의가 갑자기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사유하는 것’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여성운동진영에서 듣도 보도 못했고 상상도 못한 일이다. 작년 한 해(지금에 이르기까지) 박근혜를 사유하게 만든 게 누구인가. 여성정치세력화를 계속 주장하고 실천해 온 여성운동 진영인가? 여성정치연구소, 혹은 여성유권자연맹인가? 여성유권자들? 지자체에 내보낼 여성후보를 발굴하고 양성해 온 지역여성모임들인가? 아니다. 그것은 갑작스럽게 ‘여성정치세력화’에 눈을 돌린 진보언론(말, 씨네21, 한겨레…)들의 공헌이다. 또한 “페미니스트들이 그렇다”고 우겨댄 진보남성들의 역할도 컸다. 그들은 제멋대로 ‘여성정치세력화’를 정의해버리곤 그 책임을 여성주의 진영으로 떠넘겼다. 여성주의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만든’ 여론의 뒤치닥거리를 하게 했다. 그리곤 마치 여성계 안에서 내분이 일어난 것처럼 둘러치고선 관망하고, 평가하고, 비난했다. 그것은 ‘여성이슈’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진보남성들 중엔 여성주의자들이 ‘진보적이지 않다’고 굳게 믿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은 그들이 믿는 것과 정 반대다. 그들의 ‘진보’에 ‘여성’이 없다. ‘진보’남성들, 그리고 ‘진보’언론은 유독 여성에 대해선, 여성이슈에 대해선, 여성정치에 대해선 유아기적 발상으로 바라보고, 함부로 다루고, 화살은 다시 여성들에게로 돌리고, 그러면서도 창피한 줄을 모른다. 뜬금없는 여성대통령 타령 “여성대통령감 여론조사 박근혜 32.0 추미애 21.9 강금실 20.1” “’박근혜 브랜드’ 압도적 1위” “별인 듯, 불인 듯, 물인 듯…”(한겨레21 제464호 6월 26일자 ‘표지’이야기) 여성정치세력화 이슈는 올해 들어 더욱 ‘뜨고’ 있다. 대선이 끝난 지 6개월밖에 안 된 상태에서 느닷없이 한겨레21은 ‘표지’기사로 ‘여성대통령감’을 논했다. 그것도 한창 ‘뜨고 있는’ 여성인물인 박근혜 의원, 추미애 의원, 그리고 강금실 장관 세 여성끼리 ‘붙여놓고’. 여성들의 교육수준으로 보나 경제발전의 정도로 보나 한국에서 여성들의 정치적 소외는 ‘지독하게’ 심각한 수준이다. 이런 현실에서 ‘여성의 정치세력화’에 접근하는 진보언론이 ‘여성대통령론’을 들이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여성이 대통령이 되길 바라서? “한국에서 여성정치인은 그 ‘희소가치’만으로도 주목받는다. 그 중에서도 박근혜, 추미애 의원과 강금실 법무장관은 특별히 도드라진다. 이들이 길러온 능력과 자질, 그리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디서나 눈에 띄는 외모는 모든 사람들의 눈과 귀를 잡아끈다.” 희소가치가 있어서 주목 받는다? 어디서나 눈에 띄는 외모가 사람들을 잡아끈다? 명백히 여성정치인에 대한 성차별적 발언이다. 그런데 이게 한겨레21 표지이야기 ‘별인 듯, 불인 듯, 물인 듯…’의 리드문장이다.(이런 것이 바로 여성정치 현실을 보여주는 예다.) 게다가 한겨레21이 박근혜 의원을 ‘별’로 묘사하며 ‘우주의 질서를 대변한다’고 한 부분에 대해 다음 호에서 ‘변명’한 내용을 보면 ‘여성대통령감’ 논의는 ‘장난’이었나 싶다. “… 박 의원은 기존의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보수적이고 정적인 이미지를 ‘별’로서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또 추 의원에 빗댄 ‘불’과 강 장관의 ‘물’에 운율을 맞출 수 있도록, 한 음절이고 끝소리가 ‘ㄹ’인 단어 중 적절한 것이 ‘별’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박 의원을 ‘굴’, ‘돌’, ‘발’ 따위에 비유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한겨레21 제465호 ‘박근혜 의원과 ‘별’에 대하여- 464호 표지이야기, 그 뒤’) 여성정치인에 대해선 그를 둘러싼 정치적 사안은 관심 밖이고 기껏 ‘브로치’가 눈에 띈다는 기사를 쓰는 언론인들, 민주당 추미애 의원을 칭송할 때 “참으로 아름다우십니다”로 시작하는 남성유권자들, 강금실 법무장관이 검사들에게 보낸 이메일을 ‘연애편지’라고 보도해대는 언론… 그런데 ‘진보’언론, ‘진보’남성들이 여성정치인과 여성정치 현실을 바라보는 수준은 과연 얼마나 ‘나은가’. 때마침 <인물과사상> 27호는 특집으로 ‘한국 여성 정치의 최전선’ - 5명의 여성정치인(민주당 추미애, 이미경 의원, 최현숙 민노당 여성위원장, 고은광순 개혁당 서초갑 지구당 위원장, 강금실 법무장관)을 다뤘다. 머리말은 ‘여성 정치인 들여다보기’. 그리고 이를 보도한 <오마이뉴스>는 ‘어디 여성대통령감 없소?’(7월 9일자)라는 제목을 뽑았다. 여성정치인에게 조명을 비추고 그들의 성장을 지지해주는 것이 옳지 않다는 건 물론 아니다. 그나마 ‘다뤄주는 게 어디냐’고 감지덕지해야 할 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국회의원 중 여성의 비율이 5.9% 밖에 되지 않는 현실’에서 ‘눈에 띄는’ 여성정치인을 ‘들여다보는’ 것이 현재 ‘여성정치세력화’에 접근하는 진보언론의 태도라는 점이며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그들의 ‘엘리트주의’ 여성의 정치세력화는 여성운동의 중요한 이슈다. 지금에서야 언론이 부각시키고 있다 해서 여성계에서 ‘반짝’하고 떠오른 주제가 아닌 것이다. 정치에서의 여성소외는 다른 어떤 영역보다도 두드러진다. 그런데 이런 열악한 현실에서 진보언론이 여성정치세력화에 다가서는 방식을 보라. 정당중심의, 중앙집권적 접근, 그것도 모자라 심지어 대선 이듬해에 여성대통령감을 찾고 있다니… 이게 무슨 경우인가. 여성국회의원이 5.9%인 한국에서, 여성정치인 몇 명의 존재를 두고 ‘여성에게 정치가 열려있다’는 가능성을 내다보라는 것인가? 그게 여성정치세력화라고? 아니, 그건 아니다. 적어도 그런 접근방식은 ‘정치현실’을 드러내지 못한다.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논하려면 ‘현실’이 어떠하다는 것부터 보여주어야 할 것 아닌가. 바로 눈앞이 침침한 이 마당에 여성들 보고 하늘의 별을 바라보라고(혹은 ‘별을 따라고’) 할 텐가. 여성정치세력화 이슈를 이처럼 ‘엘리트주의’적으로 접근했을 때 ‘정치에서의 여성소외’라는 엄연한 현실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여성노동 이슈를 ‘엘리트주의’적으로만 접근했을 때(가령, 수천 수만 여성노동자들 중에 ‘성공한’ 여성 한두 명을 소개하면서 “열 남자보다 낫다” “본보기로 삼아라”고 말하는 것) ‘고용차별’의 현실이 ‘왜곡’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성 대통령 뽑을 수 있다”는 여론이 88.3%, 시기는 2012년이 가장 많아”라는 한겨레21의 기사는 마치 여성정치지형이 확 바뀐 것처럼 보이게 한다.) ‘여성정치세력화’를 논하고자 한다면 ‘진보’언론이 이제 막 여성정치세력화를 주목하기 시작했다면 그 출발은 ‘여성대통령’이 아니라, 정치와 여성의 ‘거리’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여성정치세력화를 ‘정당정치’ 테두리로 한정 짓는 한은 접근하기 어려운 방식이다. 왜 한국에서 여성의 정치적 소외가 그토록 깊은가, 여성들의 현실이 어떠하기에 정치와 여성대중은 동떨어져있다고 인식되는가, 혹은 정치의 어떤 면이 여성들을 배제시키는가 하는 것들에 주목해야 한다. 여성이슈는 왜 ‘여성들만의’ 이슈로 치부되고, 여성과 관련된 정책은 ‘가족제도’나 ‘자녀양육’ 정도로만 취급되는가. 왜 정치적 ‘보수/진보’가 여성이슈에 있어선 크게 부각되지 못하는가. 성인지적 예산을 요구하는 여성계의 외침이 수년간 계속되어 왔는데도 왜 아직도 관련 공무원들이 ‘예산에 무슨 성이 있냐’고 묻는가. 협소한 의미의 ‘정치’를 논하는 것은 그 다음 단계일 것이다. 이미 자리를 잡은 여성정치인들을 비교분석하기 이전에, 여성들에게 ‘정당으로 쳐들어가라’고 하기 이전에, 여성들로 하여금 ‘정치’에 뛰어들 수 없게 만드는 여건들을 찾아보아야 하지 않은가. 여성들이 겪는 정치참여의 벽 100가지 중에 10가지만이라도 나열해 보자. 남성운동권 출신들은 정치판을 한 자리씩 채워가고 있는데 여성운동권들, 왕년에 정치력을 과시하던 소위 ‘여성386’들은 정치판에서 왜 눈을 씻고 찾아볼 수가 없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정치를 몰라서인가? 그들이 정당에 쳐들어가고 싶지 않아서인가? 정당 내에서 여성당원들이 겪는 차별은 또 어떠한가. 성추행을 ‘정치적 스킨십’이라고 말하는 정치문화가 여성에게 얼마나 폭력적인가, 진보정당 내 성폭력 해결을 위해 노력하던 여성당원들이 결국 당에서 떨어져나가는 현실, 당 내 성차별에 대해 문제제기 하면 “넓게 보지 못하고, 이기적인 여성주의자들” 취급을 받는 현실을 말해야 하지 않나. 기존 정치를 바꾸지 않고 여성정치세력화를 꾀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사실이다. (여성주의가 보수세력과 손 잡을 수 없는 이유, 여성주의자가 어느 당이나 가선 안 되는 이유는 자명하다). 그러나 정치개혁, 정치개혁, 말은 많은데 과연 그 ‘개혁’이 여성의 정치세력화와 ‘함께 가고 있는지’ 짚어볼 때다. 연일 정치개혁을 논하고 있는 진보언론에서 이런 논의가 단 한 번이라도 이슈화된 적이 있는가. 여성정치세력화를 둘러싼 수많은 장벽과 차별을 ‘드러내는’ 것이 언론이 일차적으로 해야 할 역할이다. 다른 이슈들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정치세력화에 대해서도 현실을 보고, 현실을 말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라. 가뭄에 콩 나듯 여성이슈를 기획으로 다루고 있는 그 ‘지면’이 아까운 줄 안다면 말이다. 자신할 수 있는 건 우리 언론이, 진보언론이, 뜬금없는 ‘별’ 얘기 대신 위에 열거한 사안들 중 하나라도 ‘제대로’ 다루었더라면 지금보다 여성정치세력화에 훨씬 큰 도움이 되었을 거란 점이다. <이 기사는 월간 ‘말’ 8월호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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