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금이년 젖 먹자’를 읽고

윤하 | 기사입력 2003/07/25 [01:15]

‘만금이년 젖 먹자’를 읽고

윤하 | 입력 : 2003/07/25 [01:15]
7월 14일자 한겨레 신문에 실렸다는 이하석의 <만금이년 젖 먹자>라는 시를 본 것은 지난 주, 회원으로 있는 한 여성주의 사이트에서였다. 시인는 새만금 갯벌을 우리 인간의 생존을 위해, 먹을 것(젖)을 주는, 살아 있는 존재로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 시를 통해 새만금 개발사업을 중단하지 않고는 우리의 생존조차 지속될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이 길막는 이들/새 것만 우기며 만금이 겁탈하고 죽이는 이/젖 못 얻어 먹으리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는 우리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새만금 갯벌을 살리자고, <만금이년 살려 젖 얻어 먹나/많이 먹고 억 만 년을 또 드넓게 크자> 고 쓰고 있다.

물론, 시인이 이 시를 통해 새만금 개발사업은 우리 모두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며, 개발계획을 당장 중단하고 갯벌 상태 그대로 새만금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면서 내내 불쾌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고, 이와 관련해 몇 가지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아무리 새만금을 살려야 할 필요성을 시 속에 담고자 했을지라도 그 표현이 성폭력적인 은유를 띠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시 속에는 분명하게 두 가지 담론이 담겨 있는데, 그것은 바로 친환경적인 메시지와 성폭력적인 담론이다. 시인은 새만금 갯벌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곳을 생명을 살리고 키우는 역할을 하는 여성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새만금을 <만금이년>이라고 부르면서 여성비하적인 표현을 서슴치 않고 있다. 더욱이 시인은 새만금 개발 사업을 여성에 대한 강간과 살인에 비유하면서 개발사업의 폭력성을 고발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의 진정성을 전달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 표현이 마치 강간의 폭력성를 고발한다는 명목으로 성폭력 장면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포르노 영화와 매우 유사한 코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차별적이고, 성폭력적인 태도로서 자연을 여성에 비유해 온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다. 에코페미니스트의 한 사람인 케롤린 머쳔트는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자연에 대한 파괴와 여성억압이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자행되어 왔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녀는 이를 위해 세계적인 철학자 베이컨을 예를 들고 있다. 베이컨에 의하면 “자신의 보물을 탐욕스럽게 혼자서만 갖고 자녀들(아들들)에게 나눠 주지 않는 나쁜 여자를 다룰 때처럼, 고문을 해서라도 자연으로부터 비밀을 강제로 빼내야 한다”고 했다.

 
또한 그는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는 사람의 기질이 잘 드러나지 않듯, 붙잡아서 단단히 묶기 전까지는 계속 형상을 바꾸는 프로테우스처럼, 자연도 그냥 내버려 둘 때보다 인위적인 도구로 시험하고 괴롭혀야 스스로를 더 잘 드러낸다”*고 덧붙이고 있다. 자연 착취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16, 17세기, 서구에서 여성들에게 대대적으로 자행되었던 마녀사냥과 너무나 닮았다고 머쳔트는 지적한다.

이하석의 시는 성차별적이고 성폭력적인 자연에 대한 이러한 태도의 변주처럼 들린다. 물론, 나는 시인이 여성들에게 불쾌감을 주려고 일부러 이렇게 썼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주장과 표현에는 항상 정치적인 자신의 입장이 담겨 있다. 그래서 발설됨과 동시에 그것은 자신의 한 정치적인 선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항상 그것을 염두하면서 글을 써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더라도 다른 한 편에는 함께 할 수 없는 모순적인 가치관을 담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훌륭한 작품으로 성공할 수 없다. 그래서 이 글은 결국 삼류다.

지고한 사상을 담고 있건, 또 그 의도가 아무리 훌륭하건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관점이 포함된 글은 결코 독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작가들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마리아 미즈, 반다나 시바. 에코페미니즘. 손덕수, 이난아 옮김. 서울: 창작과 비평사, 2000. p.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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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민 2003/07/28 [12:24] 수정 | 삭제
  • 글쎄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느꼈답니다. 만금이년이라니, 초장부터 섬뜩했죠.
    그냥 젖먹자,라고 하면 그 은유를 곱게(?) 이해할 수도 있을 법 하기도 합니다만, 꼭 만금이'년'이라고 해야했을까?

    저는 여자입니다. 스스로에게 가끔 '미친년','이년'소리를 잘합니다. 스스로에게 잘 하는 만큼 다른 여자들에게도 잘 합니다. 남자들에게도 미친놈,이놈저놈 잘합니다. 즉 '년/놈'을 모욕적인 언어로 생각한다기 보다는 생활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물론 존칭어나 보편적인 호칭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 아니올시다. 문학속의 비속어 사용에 대해서도 문학의 가능성으로 열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끔 고개가 갸우뚱할때가 있습니다.
    의도가 무얼까, 내가 이런 불쾌감을 느끼는데... 라고 의도를 의심할 수 있는 순간이라면 차라리 명쾌하겠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진짜 마초글들은 차라리 애교스럽죠.) 그런데 나름대로 고민해도 물밑 의도나 작가의 가면같은 것이 느껴지지는 않을때가 있습니다. 만금이년도 그렇습디다.
    윤하님이 느끼셨듯 저도 작가가 (물위로 의도적이든, 물밑으로 의도적이든) 여성을 비하하고 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김승옥의 '서울의 달빛 0장'을 읽을때도 그랬습니다. 그때 '김승옥은 마초'라는 말을 했다가 저는 제풀에 서둘러 취소하였습니다. 사실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했거든요.
  • 모모 2003/07/26 [02:28] 수정 | 삭제
  • 초기시는 좋았는데.
    음.
    그래봤자, 라고 해야하나.

    착잡.
  • 그렇다 2003/07/25 [16:49] 수정 | 삭제
  • 정말 시인이라면
    주변의 많은 것들을 둘러볼줄 아는 혜안이 있어야 하겠죠
    그건 지식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진정한 시선이니까요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진 시라도,
    안타깝게도 포르노를 방불케하는 저변사고로 인해
    불쾌함만 만들어내고 말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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