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살해 후 자살한 ‘부’와 ‘모’

행복해야 할 가정의 비극 vs 비정한 엄마

김윤은미 | 기사입력 2003/07/26 [01:30]

자식 살해 후 자살한 ‘부’와 ‘모’

행복해야 할 가정의 비극 vs 비정한 엄마

김윤은미 | 입력 : 2003/07/26 [01:30]
올해 들어 자주 보도되고 있는 수많은 자살 사건들. IMF 이후 축적된 빈곤과 허술한 사회보장체계가 자살을 방조하고 있다는 분석이 타당성을 얻고 있는 듯 하다. 특히 최근 화제가 된 가족단위 죽음은 사회의 기초 단위로서 가족공동체를 중시하는 분위기 때문에, 그 여파가 더욱 크다. 언론들은 사설/칼럼을 통해 우리 사회가 잘못 나가고 있는 증거라고 다투어 주장하고,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누가 가장 잘못했는가를 따지느라 의견이 분분하다.

이 같은 자살논란에 불을 붙인 것은 최근 인천 한 아파트 옥상에서 30대 여성이 카드 빚 독촉과 생활고를 못 이겨 세 자녀를 던지고 자신도 투신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언론의 보도는 가계의 빈곤과 이를 책임지지 못한 사회를 우선적으로 조명하기보다는, ‘아이를 던진 비정한 엄마’와 "엄마 나 죽기 싫어"를 외친 아이의 비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동아일보는 <생활苦에 '살려달라' 자녀 외침 뿌리친 '非情의 엄마>로 헤드라인를 뽑았다. 조선일보는 부제로 <"엄마 살려줘, 죽기 싫어"><"아이들이 무슨 罪…종일 일손 안 잡혀"><"아이들 투신 직전 '엄마 살려줘' 절규">등을 달았다.

물론 아무 이유 없이 죽어야 했던 아이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것에는 십분 동의한다. 그런데 이상한 조짐이 보인다. 아이의 아픔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 열의를 기울이는 언론들이, 가족을 죽이고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 '아버지'일 경우, 크게 이슈화를 시키지 않거나 문제의 초점을 바꾸는 것이다.

지난 달 충남에서 카드 빚에 몰린 아버지가 두 딸을 둔기로 쳐서 살해한 뒤 자살을 기도했다가 중태에 빠진 사건의 경우, 대부분 언론이 연합뉴스 단신으로 보도했는데, 그 헤드라인은 <"빚 고민" 30대 가장 가족 살해 후 자살>이었다. 이 사건의 경우 30대 여성의 투신만큼 큰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다. 한편 이 사건을 보도한 YTN은 "신용카드로 인한 빚이 행복해야 할 가정을 비극으로 몰고 갔습니다"라는 멘트를 띄웠다.

어머니가 아이들을 던지고 자살한 사건에 대해서는 ‘비정한 어머니’ ‘어떻게 어머니가 그럴 수 있는가’라는 탄식이 나오는 반면, 두 딸을 때려 숨지게 하고 자살 기도한 아버지의 폭력에는 "행복한 가정에 대한 비극"이라고 판단할 뿐 아무도 ‘나쁜 아버지’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가정 내 아버지 폭력이 일상화된 사회이기 때문에, 아이를 때려 죽음으로 몰고 가는 건 놀랄 일이 못된다는 것일까?

기사들마다 아버지를 '가장'이라고 명명한 것은 가족에 대한 아버지의 통제력을 환기한다. 즉 아버지가 죽겠다고 결심하면 가족도 함께 죽을 수 있다는 식이다. 반면 어머니가 아이를 밀어 떨어뜨린 사건에 대한 놀라움과 충격은, 헌신적인 모성애로 아이를 키워야 할 어머니가 놀랍게도 아이를 던졌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즉 어머니는 아무리 힘겹고 가난해도 아이를 잘 키우는, 절대적인(사실상 불가능한) 모성애를 실천해야 할 존재인 것이다.

올해 초 서울대 시간강사 자살 사건 당시 언론에서는 시간강사 처우 개선 문제를 주로 언급했었다. 시간당 몇 만원의 강의료와 학기마다 바뀌는 불안정한 강의배당으로는 가정과 자녀를 책임지기 힘들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런데 이번 사건의 경우, ‘카드 빚’이 추상적인 원인으로 지목될 뿐 여성일수록 더욱 빈곤하기 쉬운 현실을 다루지 않고 있다. 양육에 대한 책임이 한 가정의, 어머니에게 온통 집중되어 있기에, 빈곤이 심화될수록 여성들이 가난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사건을 ‘어머니의 비정함’에 초점을 맞춘 언론의 보도 태도는 사건을 선정적이고 표피적으로 다룬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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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레제 2003/07/26 [21:41] 수정 | 삭제
  • 그 동안 무수히 언론에서, 혹은 온라인상의 네티즌들의 의견에서
    답답함을 느꼈는데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아주 명확하게 써주셨네요.

    추천!
    또 추천하고픈 글입니다!^^
  • 이유 2003/07/26 [18:16] 수정 | 삭제
  • 여성의 대부분이 일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허접스런 일이고 실제로 일다운 일이란 대우를 못받고 있죠.
    그러니까, 여자가 생활고에 시달린다는건, 다 개짖는 소리로밖에 안듣는거죠,
    생활고라는건 눈꼽만큼도 중요하지 않고, 여자로서 지켜야할 양육과 모성을
    저버렸다는것만 생각하는 단세포적인 생각을 하는거겠죠.
    화가 나네요.
    여성도 일하는데, 늘 비정규직으로 일하니까 여성의 생활고는 생활고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여성이 일하지 않아도 가정경제가 이루어질까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이땅의 여성들.
    저 개만도 못한 단세포적인 기사들, 그런 사고들을 또 조장하고 또 조장하고
    진짜는 보지 않고, 늘 반복만 해대는 것들, 뉴스가 왜있는지 모르겠네요
  • 돌하루 2003/07/26 [12:57] 수정 | 삭제
  • 저의 주위에서도 저에게 절대적인 모성애를 발휘하라고 하네요.
    그건 불가능한 일인데도 밖에선 어렵지 않은 일처럼 말하지요.
    애엄마들 다들 어떻게 버티면서 사나 모르겠습니다.
  • 뚜덩 2003/07/26 [02:06] 수정 | 삭제
  • 기억은 가물거리지만 한 칼럼에서 (씨네21이었던 듯)
    테러리즘이 빈번한 나라의 테러 얘기를 하면서
    어떤 여성이 임신 상태로 자폭 테러를 했다는 얘기에 놀랐다, 여성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뱃속의 아이를 최우선으로 하지 않는가, 자신과 상관없는 목숨까지 끌어들여서... 뭐 이런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정확하진 않아요).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좀 불편하더군요. 저도 모성애를 믿는 편이고 보통 사람보다 임산부가 자폭테러를 했다는 사실이 더 놀랍기는 했지만 임신해볼 일도 없을 남성이 모성애의 절대성 운운하는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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