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여성주의 진영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을 불문하고 무조건 여성후보를 지지할 수 있는가’라는 이슈로 뜨겁게 달아 올랐다. 이 논쟁 속에서 급기야 “여자도 더러워져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그룹이 등장했고, 그것을 실천해 보이기라도 하듯, 이계경 전 여성신문사 사장은 대선을 코앞에 두고 한나라당에 입당을 했다.
이제 ‘여자도 더러워져야 한다’는 주장을 비판하면서, 여성의 진정한 정치세력화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다시 고민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은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논함에 있어, 그 원칙을 짚어보는 데 목적이 있다. 원칙을 분명히 하고 길을 나섰을 때만이 길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면 호랑이가 된다 우선 여성의 정치세력화란 당을 불문하고 여성들이 정치계에 많이 진출하는 것인지를 질문해 볼 수 있다. 지난 해 논쟁이 바로 이 질문과 관련되었던 것 같다. 대답은 물론 아니다. 이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안기부나 보수당에 들어갔던 지난 날의 진보인사들이 모두 호랑이가 되었다는 경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 개인은 거대한(그리고 정치적 목적이 분명한) 집단 속에서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또 여성대통령 배출과 여성인권 향상이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지 물어 볼 수 있다. 그것 역시 아니다. 예를 들어, 인디라 간디와 같은 여성수상을 배출한 인도의 경우, 오늘날도 여전히 결혼 지참금이 적다는 이유로 남편이 아내를 불태워 죽여도 처벌 받지 않는 형편이다. 이런 이유로 죽어가는 여성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며, 그만큼 그 곳 여성의 지위는 여전히 낮다. 결국, 여성들의 인권이 폭넓게 신장될 수 있도록 사회적 기반을 개혁시킬 수 있는 사회저변의 여성들의 힘이 탄탄하게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여성대통령 배출은 여성인권신장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그 여성이 보수당에 속한 사람이라면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패거리 짓기는 자매애가 아니다 두 경우를 살펴보더라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을 불문해 사유할 수 없고, 또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연대를 할 수 없음이 분명해진다. 그러한 것은 ‘자매애’가 아니라 ‘패거리 짓기’라고 불려야 옳다. 더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기존의 가부장적 권력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권력을 쥐는 것, 그것은 ‘가부장주의’의 변형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주의’란 이름을 빌어, 또 ‘자매애’라며 여성들도 더러워지자는 주장을 펼치는 것은 거부해야 할 것이다. 여성주의자라면, 더더욱 여성들이 줄곧 이러한 ‘패거리짓기’ 관행에 희생되어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만 한다. 가부장주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이 ‘패거리 짓기’다.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조금이라도 확대시키기 위해서라면 출신고장, 학연, 지연 등 인맥을 가리지 않고 이용하며, 이러한 인맥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자신의 정치세력 공간에서 철저하게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꾸준히 권력구조를 재생산시켜 왔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남성들조차 돈 없고 배경 없고, 학벌 없는 이들은 권력의 중심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이러한 부정적인 정치적 관행을 청산하자는 진보적인 주장들이 조금씩 나오고 있는 시점에서 여성주의자 그룹이 도리어 여성주의의 ‘자매애’를 함부로 들먹이면서 ‘패거리짓기’를 하자고 주장한다면, 이는 시대를 거스르는 행동이라고 생각된다. 소수자, 차별받는 모든 세력과의 연대 여성주의 진영이 함께 어깨를 걸어야 할 사람들은 ‘정치적 색채를 불문한 여성들’이 아니다. 가부장주의 남성권력의 부정과 폐해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진정으로 우리가 연대해야 할 세력이다. 지난 날 미국의 백인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펼쳤던 여성운동은 우리에게 교훈이 되고 있다. 당시 백인여성운동은 인종차별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들은 당시 사회통념으로 존재하고 있던 흑인의 인종적 열등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백인우월성을 피력하면서 ‘백인여성들에게 선거권을 달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들은 진정한 여성해방운동이 다른 소수집단의 여성들은 물론, 가부장제 하에서 차별 받고 있는 모든 세력들을 아울러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었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성의 정치세력화는 다른 소수집단의 정치세력화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며, 가부장제의 폐해를 극복하려는 그룹들과의 연대를 통해 나아갈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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