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이여, 살을 빼려면 가사노동을 해라”
마초들이 게시판에 써댄 어이없는 낙서가 아니다. 한국의 언론인 연합뉴스가 채택한 해외 연구결과이며 앞 다투어 야후 화제의 뉴스, 네이버 Hot 뉴스플러스, 미디어 다음 등 각종 인터넷 포탈사이트에서 메인(main) 기사로 뽑아낸 충고이며, 심지어 공중파인 SBS 8시 뉴스에까지 당당히 방영된 ‘공공의’ 메시지다. “집안일이 살을 빼는 데 효과적이다. 영국의 한 잡지가 이런 조사 결과를 내 놓았습니다. 빨래나 다림질, 장보기 등에 소모되는 열량이 체육관에서 운동을 통해 소모되는 열량보다 더 많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웬만한 운동이나 다이어트로는 집안일을 열심히 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보기 어렵다고 이 잡지는 지적했습니다.” (SBS 8시 뉴스 2003-08-06) “…1950년대 여성들은 하루에 3시간씩 집안일을 하고 가게에 다녀오느라 1시간 정도를 걷곤 했다… 이에 반해 현대 여성들은 가전제품 덕택에 몸을 움직여야 하는 가사노동에서 해방됐고…프리마지의 마리 파헤이 편집장은 "현대기술이 우리를 과거보다 3분의2나 덜 활동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말해준다"며 "건강의 균형을 유지하려면 운동이 중요하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살 빼려면 다이어트. 운동보다 집안일이 효과’ 2003- 08- 06) 여성의 몸에 대한 대대적인 억압의 시선이 존재하는 이 사회에서 ‘다이어트’는 여성들이 불가피하게 바라보는 ‘선택 아닌 선택’이다. 단지 ‘건강을 위해서’ 만이 아니다. 남성중심적 사회가 원하는 미의 기준을 따라가려는 노력은 과도한 집착으로 이어져 여성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다이어트에 대한 심각한 문제점이 사회적 문제로 나타나고 있는 지금, 한국의 언론은 ‘다이어트’를 빌미로 ‘가사노동’을 여성에게 전가하려는 내용의 뉴스를 당당히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과중한 가사노동의 남녀 평등한 분담을 외쳐온 많은 여성들에게 ‘살 빼기 좋은’ 가사노동에 복무하라며 ‘어르고 달래고’ 있는 격이다. 게다 ‘가사노동에서의 해방’이 ‘현대여성의 비만을 불러왔다’는 식의 결론까지 유도한다. 짧은 거리도 자동차로 움직이는 현대인에게 운동량 부족은 자명한 귀결이다.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인 것이다. 그런데 굳이 ‘가전제품’ 이니, ‘가사노동에서의 해방’이니 들먹이며 ‘현대인의 운동 부족’ 식으로 실없이 끝맺는 이 기사가 여기저기 우후죽순으로 선택된 이유가 뭘까. “현대여성들은 하루에 2천178㎉를 섭취한 뒤 556㎉만 소모하는 반면, 1952년의 여성들은 하루 평균 1천818㎉를 섭취하면서 1천512㎉를 연소했던 것으로 나왔다. 이에 따라 현대여성들은 체육관을 찾거나 일시적인 다이어트를 많이 하지만 20세기 중반만 해도 영국에서 이런 얘기는 들어보기 어려웠다.” (연합뉴스 ‘살 빼려면 다이어트. 운동보다 집안일이 효과’ 2003- 08- 06일) “이 잡지는 집안일이 많았던 50년 전 여성들이 하루 평균 천5백 킬로 칼로리의 열량을 소모한 반면, 요즘 여성들은 더 많은 열량을 섭취하면서도, 하루 평균 5백 킬로 칼로리의 열량만을 소모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SBS 8시 뉴스 2003-08-06) 가사노동은 운동이 아니다. 집안일은 많은 에너지소모를 요구하는 노동이지 운동으로 볼 수 없다. 운동은 전신을 골고루 발달시키기 위해, 균형 잡힌 몸과 건강을 위해 합리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신체 활동이다. 남성들이 흔히 ‘집에서 놀고 먹는 것’이라고 믿는 가사 노동은 그야말로 중노동이다. 구부린 자세로 해야 하는 집안 청소나 늘 같은 부위의 근육만 사용하게 만드는 빨래나 다림질 등의 고된 가사노동이 근육통이나 관절염 등 만성적인 부인병의 근원이 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기사는 칼로리만 알량하게 계산하며 가사노동이 그저 많은 칼로리를 소모할 수 있기 때문에 ‘운동’이 될 수 있다고 선전한다. 그렇다면 “남성이여, 뱃살 빼려면 공사판으로 가라”는 소리나 마찬가지 아닌가. 칼로리 소모에 그만한 ‘운동’이 어디 있겠는가. 이쯤 되면 모두가 기피하는 3D 산업의 인력을 충당할만한 뉴스거리가 아닌가. 무엇보다 이 뉴스는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를 기저에 강력하게 깔고 있다. 가사노동이 그토록 살을 빼는데 효과적이라면, 또 건강증진의 수단이 된다면 모든 질병의 근원이라는 ‘비만’으로 고생하는 무수한 남성들에게 제안할 수 있는 처방이 아닌가. 그런데 왜 유독 ‘여성’에게 초점을 맞춰 대단한 뉴스거리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가사일은 여성의 몫’이라는 가부장적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에 일제히 합의한 한국언론의 남성중심성은 가히 대단해 보인다. 한국 언론이 일제히 힘을 실어 내보낸 이 뉴스의 의도는 한가지다. “성별 분업 운운하지 말고 살 빼는 셈 치고 집안일이나 해라!” 이것이 한국 언론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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