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시타의 임신과 파문: 중남미 ‘낙태’①

공숙영의 Out of Costa Rica (10)

공숙영 | 기사입력 2010/04/16 [12:06]

로시타의 임신과 파문: 중남미 ‘낙태’①

공숙영의 Out of Costa Rica (10)

공숙영 | 입력 : 2010/04/16 [12:06]
* 코스타리카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필자 공숙영은 현지에서 마주친 다양한 인상과 풍경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중남미의 ‘낙태’- 현실과 전망①
 
지난 4월 4일은 부활절이었습니다. 작년에는 코스타리카에서 부활절을 보냈는데, 그곳에서 부활절 주간은 일주일 동안 공식적인 공휴일이 될 정도로 특별한 때입니다.
 
학교 수업이 없어서 쉬면서 길거리에서 의상을 차려입은 부활절 행진을 구경하고, (신자는 아니지만) 동네 성당에서 열리는 부활절 미사에도 가 보았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에 가톨릭 신앙이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코스타리카에서 제가 살던 동네에도 곳곳에 성모 마리아 제단이 있고 주말에는 성당 미사에 꽤 많은 주민들이 모여 있곤 했습니다. 매주 미사에 꼬박꼬박 참여하는 독실한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부활절만큼은 옷을 깨끗하게 잘 차려입고 일제히 미사를 드리러 성당으로 모여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낙태를 용서하노라.”
 
▲  코스타리카의 부활절 행렬   © govisitcostarica.com
그때는 몰랐는데 최근에 코스타리카의 부활절 행사에 대한 기사를 찾다가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2009년 2월 “교회는 성스러운 기간에 참회를 많이 하길 기대한다”는 제목으로 쓰인 기사였는데, 들여다보니 낙태를 한 자들과 이를 도운 모든 자들이 사순절부터 부활절에 이르는 기간 동안 고백하고 참회하면 사면이 주어질 것이니 많은 참여를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원칙적으로 가톨릭 교리 상 임신중절행위는 신으로 가는 길을 단절시키기 때문에 파문당하게 되어 있지만, 주교와 사제의 권한으로 참회하면 용서하고 사면하여 다시 가톨릭 교회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교회의 이런 특별사면정책이 작년인 2009년에 처음 실시된 것은 아니지만, 정식으로 공표하는 것은 처음이라는 내용도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세속국가의 법적인 규제와 별도로, 교회가 신자들에게 죄를 물어 파문하고 또 사후에 면죄부를 발행하듯 사면하겠다고 참회를 요구하는 행위들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불법낙태’하는 코스타리카 여성
 
코스타리카는 산모의 건강이나 생명에 해가 되는 경우를 예외 사유로 두고는 있지만 인공임신중절을 금지하고 형법에 낙태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코스타리카의 의료수준은 꽤 높은 편인데, 1980년대 후반부터 국가정책 차원에서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피임법의 도입을 포함하여 종합적인 여성보건 및 가족계획 프로그램을 시행해왔습니다.
 
그러나 임신중절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임신을 원치 않는 코스타리카 여성들은 임신을 중절할 권리와 적절한 의료적 처우를 보장받지 못합니다. 많은 코스타리카 여성들은 병원이나 보건소에서 안전한 시술 및 치료를 받지 못하고 개인클리닉에 가거나, 무허가불법약품을 구하거나 심지어 외국이나 공해 상의 보트에서 시술을 받아 ‘불법낙태’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코스타리카 인구조사협회 2007년도 보고서는 한 해에만 15세~49세 사이의 코스타리카 여성 2만7천명이 임신중절을 했고, 신생아 출산과 임신중절의 비율이 3 대 1이라고 집계했으며(신생아 세 명이 출산될 때마다 한 건의 임신중절이 이뤄지고 있는 것입니다) 임신중절이 계속 증가세에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보고서는 현실적으로 낙태죄를 규정하고 처벌하는 것이 임신중절을 줄이지 못한다고 지적한 후, 임신중절의 원인인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방법을 다시 생각해보고 사회적으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로시타의 임신과 파문
 
▲ 다큐멘터리 영화 <로시타>  © 공식 홈페이지attiegoldwater.com/rositathemovie/home.htm
코스타리카를 포함하여 중남미지역 미성년자들의 임신 및 임신중절비율도 꽤 높아서, 종종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진 9세 소녀 로시타(Rosita)의 이야기는 이 지역에서 미성년자들의 임신이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 생생하고 첨예하게 드러냅니다.
 
니카라과로부터 코스타리카로 이주한 커피 따는 소녀노동자 로시타는 강간을 당해 임신하게 됩니다. 로시타의 부모는 어린 딸의 건강과 장래를 염려하여 임신중절을 시키기로 결정하지만 니카라과와 코스타리카 두 나라의 정부와 교회가 개입하여 임신중절을 하지 못하게 압력을 가합니다.
 
결국 여성단체가 나서서 분투한 결과 로시타는 임신중절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에 니카라과의 대주교는 로시타의 임신중절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파문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자 중남미와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분하여, 스페인에서 시작된 항의운동의 결과 2만6천명의 서명을 받아 “나도 파문하십시오”라는 청원을 바티칸 교황청에 제출하기에 이릅니다.
 
‘중세시대’로 돌아간 니카라과
 
로시타 사건은 2003년에 일어났고, 다큐멘터리 영화 <로시타>는 2005년에 완성됐습니다. 그때만 해도 니카라과는 산모의 건강에 치명적인 의료상의 이유가 있을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임신중절을 허용했고, 로시타의 경우는 이 예외적인 "치료적 임신중절(therapeutic abortion)"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2006년에 니카라과 의회가 이 예외 조항을 삭제하는 개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니카라과는 어떠한 사유로도 임신중절을 허용하지 않는 국가가 되어버렸습니다. ‘낙태금지’를 더욱 강화하는 법 개정안 통과 직후, 니카라과의 한 여성운동가는 언론 인터뷰에서 “여성인권이 중세시대로 퇴보했다”고 개탄했습니다.
 
그 당시에 니카라과에서는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이었는데,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이자 전직 대통령으로서 다시 선거에 출마한 오르테가는 우파정당과 제휴하여 이 개정안 통과에 협조했습니다. 그는 대선 기간에도 교황과 교회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등 교회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합니다.
 
오르테가가 2006년 대선에서 승리함으로써 좌파정권이 니카라과에서 2007년부터 출범했지만, 여성의 임신중절 문제에 있어서는 니카라과 사회는 한층 더 보수적이 된 것입니다.
 
니카라과의 현실은 많은 여성인권단체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현재 유엔 인권위원회 등 주요 국제인권기구들은 절대적으로 임신중절을 금지하고 있는 니카라과 형법의 반인권적 성격을 지적하면서 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임신중절 금지’와 싸우는 칠레 여성들
 
칠레 역시 니카라과처럼 임신중절을 절대적으로 금지하는 국가로서, 다른 중남미국가들처럼‘불법낙태’가 횡행하고 있고 미성년자 임신과 비혼모 문제가 주요한 사회적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칠레의 여성 대통령이었던 미첼 바첼렛(이제는 퇴임했습니다)에 대해 소개하면서 대통령령으로 부모 동의가 없어도 14세 이상이면 사후피임약을 무료공급하는 조치를 취한 적이 있다고 알려 드린 바 있습니다.
 
좀 더 알아보니, 원래 칠레에서는 강간 같은 위급상황이 발생한 후에 보호자를 동반하여 보건소에 찾아가면 예외적으로 사후피임약이 지급되었는데, 2006년 9월부터 법률에 의거하여 보건장관의 결정으로 부모 동의가 없어도 사후피임약 무료공급이 가능해졌다고 합니다.
 
그러자 보수파들이 헌법재판소에 이 법률에 대한 위헌소송을 제기하여 위헌판결이 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첼렛 대통령이 대통령령으로 계속 사후피임약의 무료공급을 가능하게 정책을 밀고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수파들은 이어서 그 대통령령에 대해서도 위헌소송을 제기하여 2008년 4월에 또 위헌판결이 나서, 결국 정부가 보건소에서 사후피임약을 무료 공급하는 것은 불가능해졌습니다.(대신 약국에서 우리 돈으로 2만원 정도의 가격으로 구입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에, 위헌판결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는 등 사회적인 논란이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법적으로는 임신중절이 절대적으로 금지되어 있고 심지어 ‘낙태죄’로 처벌되도록 규정되어 있지만, 비공식적으로 임신중절이 계속 이뤄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칠레 여성운동가들은 정부를 상대로 임신중절을 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에게 적정한 의료적 처우 보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작년 대통령선거운동 기간 동안 ‘낙태 비범죄화’ 요구를 쟁점으로 만들어내어 꾸준히 인공임신중절에 대한 논의를 공론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합니다.
 
중남미의 ‘임신중절’ 현실과 전망
 
▲ '낙태 비범죄화를 위한 날' 집회 2009년 9월 28일   © photo by Alejandro Rodriguez (awearnessblog.com)
전반적으로 중남미지역은 임신중절에 있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 형법에 낙태죄를 두고 원칙적으로 임신중절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쿠바가 1965년 이래로 임신 12주까지는 인공임신중절이 합법적으로 가능한 국가입니다.

 
특히 니카라과와 칠레를 포함하여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도미니카 공화국은 임신중절을 엄격히 금지하여 어떠한 예외허용조항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온두라스의 경우는 형법에는 예외조항이 없지만 보건윤리법 상 산모의 생명이 위태로울 때는 임신중절이 허용된다고 합니다.)
 
여성인권활동가들은 우리나라에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이나 니카라과의 사례에서 살펴본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오르테가 대통령 등 이른바 진보적인 중남미 정권들조차도, 임신중절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영향력이 강한 교회나 다양한 정치제휴집단들과의 관계 및 이해타산을 고려하여 보수적이고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의 신체를 놓고 타협하는 건 쉬운 일”
 
2010년 3월에 주로 제3세계의 관점에서 국제이슈를 취재하는 국제통신사 Inter Press Service(IPS)가 인터뷰한 우루과이 출신의 진보적 여성주의 활동가 모리아나 헤르난데즈는 중남미 사회에서는 교회의 개입 외에도 가부장적 마초주의가 주요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이런 “가부장적 영향 때문에 (중남미 사회에서) 여성의 신체를 놓고 타협하는 건 쉬운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르난데즈는 1990년대 이후로부터 계속 지속되어 온 여성인권운동의 성과로, 그 어느 때보다 현재 중남미지역의 여성들이 임신중절의 자유를 쟁취하려는 인식과 지향을 뚜렷하게 갖게 되었다고 전망합니다.
 
덧붙여 중남미지역에서 이룩해온 ‘진보’를 단지 정부의 결정이나 정책이라는 잣대로만 평가해서는 안 되고, 정치사회적 발전과 다양한 운동 및 이해세력의 성장을 심층적으로 관찰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2008년에 우루과이에서는 대통령이 임신중절을 합법화하는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는데, 법안 채택이 좌절되긴 했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국회의 다수가 낙태 비범죄화 법안을 찬성했고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체 국민의 63%가 이를 지지하며 전통적으로 남성중심적이었던 노동조합들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1990년 이래로 매년 9월 28일에 가져온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해지역에서의 낙태 비범죄화를 위한 날(the Day for the Decriminalisation of Abortion in Latin America and the Caribbean)”행사의 양상이 해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전투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소개합니다.
 
임신중절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놓고 이토록 광범위하게 논의된 때가 없고 나날이 확산되어 간다고 분석하면서, 헤르난데즈는 중남미 사회가 선뜻 나서려하지 않고 있을 뿐 낙태 비범죄화를 할 여건은 실제로는 무르익었고, 남성들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지지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중남미 ‘낙태 비범죄화’운동과 한국사회
 
헤르난데즈의 인터뷰를 보면, 낙태 비범죄화 운동에 있어 지금이 대단히 중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중남미의 낙태 비범죄화 운동 및 그를 둘러싼 세력 간의 대립과 갈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터라, 대략적인 정보와 소식만으로는 선뜻 운동의 전망까지 예견하기는 어렵습니다.
 
무리하게 큰 그림을 얻고자 하는 대신, 중남미의 낙태 비범죄화 운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분투해서 어떤 성과를 얻었는지 살펴보면서 우리 한국 사회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임신중절/낙태을 둘러싼 논의에 참조하는 것이 의미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로시타>는 번역가이자 중남미문화전문가인 ‘유빵끼’ 정승희님이 운영하는 블로그(blog.naver.com/yupanqui)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칠레의 사후피임약 무료공급과 관련한 정보도 해당 블로그를 통해 참조했습니다. 정승희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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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4/19 [10:10] 수정 | 삭제
  • 칠레에서 공부하고 오신 정승희 님께 Michelle Bachelet의 발음 및 표기방식에 대해 질문을 드렸더니 아래와 같이 의견을 주셨습니다(대통령 재임 시 미국에서 가진 어느 강연회에서 이름을 어떻게 발음할지에 대해 "아버지가 발음했던 방식이라" 불어식을 선호한다는 내용의 동영상을 보았기에 저는 불어발음에 따라 '미셸 바슐레'라고 표기했었습니다):

    "미첼 바첼렛이라고 발음해주시는 것이 정확합니다. 현지 발음이고요, 외국계성은 보통 스페인어화 해서 발음해주는 경우가 많고 특별한 경우에만 원어를 존중하더군요.

    바첼렛이 프랑스를 방문한다거나 프랑스 언론에서는 바슐레라고 할 수 있겠지만요.

    한국언론에서도 처음에는 잘 모르고 바셀레트 등 다양하게 하다가 현재는 미첼 바첼렛, 미첼 바첼레트 이렇게 굳어진 것 같고요.

    미첼 바첼렛으로 고쳐주시면 가장 정확할 것 같습니다."
  • 로시타 2010/04/17 [00:46] 수정 | 삭제
  • 영화 보고 싶군요. 나이도 어린데 겪어야 했던 일들이 참 엄청났네요. 지금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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