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주의와 출산정책: 중남미 ‘낙태’ ④

공숙영의 Out of Costa Rica (13)

공숙영 | 기사입력 2010/05/17 [01:04]

국가주의와 출산정책: 중남미 ‘낙태’ ④

공숙영의 Out of Costa Rica (13)

공숙영 | 입력 : 2010/05/17 [01:04]
* 코스타리카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필자 공숙영은 현지에서 마주친 다양한 인상과 풍경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중남미의 ‘낙태’- 현실과 전망④
 
▲ Human Rights Watch <아르헨티나 피임 및 임신중절 실태 보고서> 2005     © www.hrw.org
“오늘 세계 여성의 날에 우리는 아르헨티나 당국이 여성이 자신의 성과 재생산 및 건강에 관한 결정을 자유롭고 책임 있게 할 수 있는 권리를 명백히 보장하라고 촉구하는 바입니다.”

 
올해의 여성의 날인 3월 8일에 국제 인권단체 앰네스티 인터네셔널(Amnesty International)과 휴먼 라이츠 워치(Human Rights Watch)가 함께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 두 단체가 이러한 성명을 발표하게 된 이유는, 아르헨티나에서 의붓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하여 임신을 하게 된 두 십대 소녀들의 임신중절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로 계속 시간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폭행 피해자에 대한 임신중절을 거부하는 것은 비인간적인 처사입니다.”
 
여기까지 보자면 중남미 지역에서 자주 일어나는 십대 소녀에 대한 성폭행, 그 중에서도 가정폭력으로 인한 임신이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소개한 사례들, 특히 의붓아버지의 성폭행으로 인해 임신한 브라질 소녀의 사례와 동일합니다.
 
브라질 또한 가톨릭의 영향력이 크고 임신중절을 엄격히 규제하는 가운데 가정폭력과 성폭력이 자주 일어나서 수많은 원치 않은 임신과 ‘불법낙태’가 발생하여, 여성사망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치거나 미치거나”
 
▲임신중절 보도를 위한 독립언론 워크샵 .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르헨티나. 2009  (Women on Waves) ©womenonwaves.org
아르헨티나의 법을 보면 원칙적으로 임신중절을 금지하여 ‘낙태죄’를 두고 있고, 예외적으로 임신이 산모의 생명이나 건강을 위협할 때와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여성이 성폭행으로 인하여 임신하였을 때에는 처벌하지 않습니다.

 
서구 인권단체는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mentally disabled) 여성”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 아르헨티나 형법 조문에는 매우 거칠게도 “지능지수가 매우 낮거나 [‘백치’이거나] 미친 여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임신중절을 금지하는 칠레나 니카라과 같은 나라에 비하면 사정이 나은 편이겠지만, 성폭행으로 인해 원치 않은 임신을 한 경우 정신장애 여성에 한정해서만 임신중절을 처벌하지 않는 점이 이례적이고 문제라 하겠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낙태죄’
 
휴먼 라이츠 워치가 작년 3월 발표한 아르헨티나의 임신중절에 관한 실태조사는, 아르헨티나의 ‘낙태죄’ 규정의 변천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형법이 1880년대에 공포되어 발효된 당시에는 예외조항을 두고 있지 않고 절대적으로 임신중절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다가 1922년 형법의 낙태죄 조항이 개정되어 세 가지의 처벌예외조항을 신설했습니다: 임신한 여성의 생명이나 건강이 위태로울 때, 임신이 성폭행의 결과일 때, 임신한 여성이 정신장애가 있을 때.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를 지배한 군사독재 기간 동안에 형법의 낙태죄 조항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임신한 여성의 생명이나 건강에 ‘중대한’ 위험이 초래되어야 하고, 성폭행의 경우에는 관련 형사절차가 개시되어야만 예외적으로 처벌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1984년에 민주정부가 회복되고 나서 낙태죄 조항도 다시 군사독재 이전의 조항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습니다만, 그대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변화가 생겼습니다. 세 가지의 처벌예외조항을 두 가지로 줄이면서, 두 번째와 세 번째를 결합시켜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여성이 성폭행으로 인해 임신할 경우”로 제한한 것입니다.
 
법 개정의 배경과 정확한 의미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군사독재 시절과 비교하여 완화하되 임신중절 합법화 반대론자의 입장을 더 반영하여 조항의 어구를 바꾼 것으로 보입니다. 
 
아르헨티나의 피임제한정책
 
▲ 임신중절 합법화를 위한 시위. 코르도바, 아르헨티나. 2007 by Barbara Meo Evoli   © www.meoevoli.eu
휴먼 라이츠 워치가 2005년에 발간한 보고서 <거부된 결정: 아르헨티나에서의 피임 및 임신중절에 대한 여성의 접근권>은 한층 더 심층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내부 인사들을 인터뷰하고 각종 자료와 통계, 기사를 종합하여 작성된 이 보고서는 아르헨티나 사회의 역사적 특수성이 인구정책 및 재생산 권리에 미친 영향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역대 정부는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 비교해 봐도 극단적으로 출산통제에 반대하는 정책을 펴왔는데, 이 경향의 기원은 군사독재 이전 후안 페론 정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974년에 페론 정부는 피임에 관한 정보를 통제하면서 피임약 판매를 금지하는 등 출산조절에 관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페론 정부의 통제는 특히 해외로부터 피임정보를 습득할 길이 별로 없는 저소득층에 강한 영향을 미칩니다.
 
군사독재기간을 거쳐 민주정부가 회복된 1983년 이후까지 이와 같은 강력한 피임금지명령이 존속되다가, 1985년에 아르헨티나 정부가 여성에 관한 일체의 차별금지 협약(CEDAW)을 비준하고 나서야 폐지됩니다.
 
그 후에도 아르헨티나에는 오랫동안 국가적 차원의 피임정책이라고는 부재했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 예로 중남미 지역에서 피임 실시에 있어 1996년 시점에 유일하게 공적 차원의 지원이 부재했고, 2001년 기준으로도 직접적 지원을 하지 않은 유일한 국가였다고 합니다. 
 
유럽출신 백인 이민자들의 나라, 아르헨티나
 
휴먼 라이츠 워치의 이 보고서는 아르헨티나의 강력한 피임반대정책을 단지 중남미 지역에서 우세한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고 설명하면서 ‘국가주의’를 그 주범으로 지목합니다. 아르헨티나의 국가주의는 백인 이민자 중심 이데올로기입니다.
 
“역사적으로 아르헨티나 정치 엘리트의 중심적 정체성은 유럽으로부터 온 백인 이민자들이 점령하여 식민화한 개척자적 국가 정신이었다.”
 
아르헨티나는 유럽 이민자와 북미와 호주, 뉴질랜드의 이민자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원주민과 혼혈 메스티조의 비율은 극히 적은 나라입니다. 어느 설문조사에서 아르헨티나 국민의 85%가 자신의 뿌리를 유럽으로 여긴다고 답했으며, 아르헨티나 헌법 상 연방정부가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을 활성화시키는 의무를 부여 받고 있다고 하니 놀랍기조차 합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전통적으로 아르헨티나 여성들은 아이를 지속적으로 낳아 국민을 재생산하고 양성하여 국가를 유지하고 존속하는 역할을 맡아 왔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피임권이 논의될 때마다 피임제한을 정당화하려는 세력들은 피임을 허용하고 여성에게 재생산의 자율권을 주면 인구 성장을 막고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을 저해할 것이라는 논거를 빈번히 제시하였다고 합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의 가톨릭 교회 또한 출산과 육아를 중심으로 한 여성의 전통적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현대적 피임법 도입과 성교육, 임신중절을 완강히 반대해왔고 국가주의적 입장에서 인구 규모와 성장에 대한 우려 역시 표해 왔습니다.
 
휴먼 라이츠 워치가 인터뷰한 한 주교는 “국가를 생각하는 관점에서 아르헨티나의 인구성장을 억제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직접적으로 말했습니다. 
 
‘정상인’의 출산장려와 ‘비정상인’의 출산억제
 
▲낙태 비범죄화를 위한 레즈비언-페미니스트 연합 시위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르헨티나. 2009  ©womenonwaves.org
휴먼 라이츠 워치의 이 보고서를 읽어보고 나니, 과한 연상일진 몰라도 인구학과 인종우생학에 근거하여 독일  나찌 정권이 순수 ‘아리아 인종’을 늘리기 위해 자민족에게는 출산장려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정신장애인, 집시, 유대인 같은 소위 ‘부적합인종’에 대해서는 살해하고 격리하고 불임시술을 하여 말살정책을 실시한 사실이 문득 떠오릅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사회의 대다수를 상대로는 인구증가를 위해 임신중절은 말할 것도 없고 피임조차 제대로 허용하지 않았던 반면, ‘백치’나 ‘미친’ 여성이라고 법이 분류한 장애여성들에게 임신중절을 허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사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상인’ 중심 인구정책에 근거하여 ‘비정상인’이 출산하는 인구는 늘릴 필요도 없고 늘려서도 안 된다는 사고방식의 결과가 아니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변화와 표류
 
2002년에 이르러 비로소 아르헨티나 국회는 보수적인 세력의 반대를 저지하고 여성건강 정보와 피임법 및 의료서비스에 관한 접근권을 보장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관련 법을 제정할 수 있었습니다.
 
2004년과 2005년에 벌어진 전례 없는 토론 끝에 2006년이 되자 마침내 아르헨티나 정부는 낙태죄 규정 완화를 목표로 형법 개정을 시도하였습니다.
 
2007년 5월에 250개의 민간단체가 합법적이고 안전한 임신중절을 위한 전국적인 캠페인을 결성하여, 임신 12주까지는 제한 없는 임신중절이 허용되고 그 후의 기간에는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이나 심각한 태아의 기형이나 산모에게 위험한 경우에 임신중절이 허용되는 내용의 법안을 제출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법안은 표류 중이고, 작년인 2009년 7월 말에 아르헨티나의 여성 단체들은 안전한 임신중절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 긴급전화를 개설했습니다.
 
“낙태 비범죄화는 여성을 위한 것”
 
▲ 임신중절 합법화를 위한 시위. 코르도바, 아르헨티나. 2007 by Barbara Meo Evoli   © www.meoevoli.eu
아르헨티나의 형법은 ‘불법낙태’를 하는 여성을 징역 1년에서 4년까지 처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실제로 처벌 받는 숫자가 많지는 않지만 형벌에 대한 두려움은 엄연히 실재하고 있습니다.

 
2005년에 휴먼 라이츠 워치가 인터뷰한 32세의 여성은 ‘불법낙태’를 한 친구의 사건에 증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같은 반 동창이었고 저는 증언을 해야 했습니다. 친구는 거의 감옥에 갈 뻔했습니다.”
 
휴먼 라이츠 워치의 보고서는 처벌 받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인권 침해이고, 혹시나 드러나서 처벌될까 두려워 임신중절 후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된다는 점에서 ‘낙태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여성의 건강 악화를 초래한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낙태 비범죄화를 지지하는 72세의 의사 앙헬 베르투치는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낙태 비범죄화는 임신중절시술을 하는 의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들을 위해서 입니다. 그래야 여성들이 처벌 받지 않고 의사를 찾아 병원에 갈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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