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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라, 버자이너
공숙영의 Out of Costa Rica (28) 버자이너 다이얼로그 ⑩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공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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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스타리카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필자 공숙영은 현지에서 마주친 다양한 인상과 풍경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1990년대 초중반, 동유럽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내전이 일어납니다. 연방을 유지하려는 세력과 연방으로부터 탈퇴하여 독립하려는 세력 사이의 이해관계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민족주의적 적대감이 최고조에 달하여 ‘인종 청소(ethnic cleansing)’란 명목의 집단학살 제노사이드(genocide)가 발생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holocaust)의 악몽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가 여전히 깊이 남아 있는 유럽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는 세계 전체에 큰 충격을 던집니다. 게다가 더욱 끔찍한 일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강간 캠프’가 운영되어 수많은 여성들이 학대받은 사실입니다.
 
‘강간 캠프’로부터 돌아온 그녀들
 
“군인들이 내 거기에 길고 두툼한 라이플총을 박은 다음부턴 모든 게 끝났어. 섬뜩하게 차가운 그 쇠막대는 내 심장을 하얗게 지워버렸어. 난 그들이 그 안에서 그냥 총을 쏴버릴지, 아니면 뱅뱅 돌고 있는 내 머릿속까지 드르륵 긁어버릴지 몰랐어. 그들 중 여섯 명, 검은 마스크를 쓴 괴물 같은 의사들도 내 속에다 병을 억지로 계속 밀어 넣었어. 막대기를, 빗자루를 거꾸로 쑤셔 넣기도 했어.”
 
<버자이너 모놀로그>에는 유고 슬라비아 내전 성폭행 희생자들을 위한 모놀로그가 있습니다. 이 부분의 도입부에서 지은이 이브 엔슬러는 1993년 어느 날 뉴욕에서 신문으로 우연히 그녀들의 사진을 본 순간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그들의 얼굴은 충격과 좌절,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는데 더 괴로운 것은 그들 각자의 삶에서 달콤하고 상냥하고 순수한 무언가가 파괴되어 영영 사라져버렸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브가 본 또 다른 사진은 고향에 돌아온 성폭행 생존자들이 엄마들과 상봉하지만 모두 사진기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광경을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여성들을 직접 만나야겠다고 결심한 이브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부였던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찾아가 생존자들을 인터뷰하여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 코스타리카 학교 친구들의 <버자이너 모놀로그> 공연.     © Jenny
“그들이 칠일 동안 번갈아가며 불에 탄 고깃덩어리 같은 똥냄새를 풍겼지. 그들은 내 안에다 그들의 더러운 정액을 남겼어. 나는 독과 고름으로 오염된 강물이 되었고 물고기도 수초도 모두 죽어버렸어.”

 
검은 원피스를 입고 붉은 숄을 걸치고 마이크 앞에 앉아 이 대사를 읊조리는 저 친구는 브라질에서 온 B입니다. 낮춰진 조명 아래 그녀는 ‘강간 캠프’로부터 돌아온 생존자의 독백을 낮은 목소리로 들려줍니다.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집니다.
 
그녀와 나는 인권 모니터링에 관해 배우는 과목을 함께 들었는데, 그 수업 중에 교도소 내 인권실태조사를 위한 상황극 세션이 있었습니다. 그때 재소자 역할을 맡았던 B는 유고 슬라비아 내전 성폭행 생존자를 연기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폐렴을 앓는 등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은데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정치범 역할이었던 그녀는 기침을 심하게 하며 다소 과장된 코믹 연기를 펼쳐 우리를 계속 웃게 만들었습니다.
 
그녀, 꽃을 받다
 
한편 교도소장 역을 맡은 L의 연기는 너무나 생생하여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저희들은 인권실태조사를 하러온 조사관들이니 재소자들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조사관 역을 맡은 친구가 입을 열기가 무섭게  L은 퉁명스럽게 소리 질렀습니다. “인권조사관? 흥! 언제 우리에게 방문신청을 했소? 난 그런 신청을 받은 일이 없어!”

 
이 상황극에서 연기자들은 역할과 임무만 주어질 뿐 구체적인 대사와 각본이 주어지지 않은 채 흘러가는 상황에 맞추어 즉흥 연기를 해야 했기 때문에, 교도소장의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조사관들은 쩔쩔 맬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종일관 위압적이고 비협조적인 자세와 말투로 인권조사관 친구들을 난감하게 만든 L이 누구냐면 실은 바로 그 강의의 담당 교수였습니다.

 
맹렬하게 때로는 다정다감하게 마녀처럼 강의하는 L은 우리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녀는 아프가니스탄과 코소보(구 유고슬라비아의 일부) 등지에서 인권활동가로 일했던 사람입니다.
 
L은 삭발에 가까운 매우 짧은 커트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들리는 말에 따르면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카락이 거의 다 빠졌다가 새로 나고 있는 상태라고 했습니다. 학교 홈페이지에 실려 있던 L의 사진은 언제 찍은 것인지 전혀 다른 사람처럼 긴 머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수업 마지막 날, 학생들 중 몇 명이 학교 안팎으로 끝없이 무리지어 피어 있던 철쭉 빛깔의 꽃을 꺾어와 강의실을 장식했습니다. 화사해진 강의실에 들어서자 L은 깜짝 놀라더니 이윽고 얼굴이 환해지며 기쁨에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면서 그녀는 자신이 구 유고슬라비아 출신이라는 점과 내전의 참화를 겪은 체험이 인권활동을 하게 했다는 점을 밝히고는, 꽃 한 송이를 뽑아든 채 강의실을 떠나갔습니다.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라”
 
<버자이너 모놀로그>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모놀로그도 있습니다. 지은이 이브 엔슬러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하여 이 모놀로그를 썼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코스타리카 친구들의 학교 공연에서 이 부분은 공연되지 않았습니다. 공연을 볼 때는 몰랐지만, 우리나라에 돌아와 책으로 출판된 대본을 읽어보다가‘말하라’라는 제목의 이 모놀로그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 김복동 작 <젊은 날은 어디 가고>, 출처:나눔의 집(nanum.org) 
우리는 지금:
74세
79세
84세
93세
눈 멀고
느리지만
준비돼 있다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며
우리가 원하는 것:
지금 당장
우리가 가기 전에
우리의 이야기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우리의 머리가 떠나기 전에
일본 정부여
말하라
제발
위안부 여성들에게 미안하다고
나에게 말하라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라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라
나에게
나에게
나에게
말하라
미안하다고 말하라
미안하다고 말하라
나에게 말하라
나에게 말하라
말하라
미안하다고.

 
“지금 일어서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제 친구들의 공연이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조명이 환하게 켜지고 출연자들이 모두 무대 위로 올라가 뜨거운 박수를 받습니다. 연출자를 비롯한 스태프들도 무대 위로 올라갑니다. 박수갈채 소리가 더 커집니다.
 
연출자 중 한 친구가 나와 마이크를 잡습니다. 감사 인사를 하려나 보다 생각했는데 그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중에 성폭력의 피해를 겪은 분이 계시다면 지금 일어서 주실 수 있겠습니까?”시끌벅적하던 홀 안이 찬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집니다. 그녀가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지금 일어서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누군가가 불쑥 일어섭니다. 우뚝 하니 선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집니다. 그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런 그녀의 얼굴로 일제히 쏠립니다. 침묵이 홀 안을 길게 훑고 지나갑니다. 그 강렬한 침묵을 딛고 하나 둘씩 또 일어섭니다. 우뚝 하니 선 그녀들에게 다시 시선이 어지럽게 쏟아집니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무대 위의 친구들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고, 객석의 누군가는 격한 소리로 울음을 터뜨립니다. 점점 더 일어서는 숫자가 늘어나면서 끝내 모든 이들이 다 일어서고, 홀 안이 다시 박수갈채로 가득 메워진 가운데 친구들의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눈물과 미소 속에서 마침내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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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11/23 [18:42]  최종편집: ⓒ 일다
 
_ 10/12/02 [17:33] 수정 삭제  
  눈물이 나네요
. 10/12/04 [11:00] 수정 삭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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