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9분’: 영화 돌이킬 수 없는

등장인물만큼이나 관객들도 고통받아야 한다

노조수연 | 기사입력 2003/04/30 [23:25]

문제의 ‘9분’: 영화 돌이킬 수 없는

등장인물만큼이나 관객들도 고통받아야 한다

노조수연 | 입력 : 2003/04/30 [23:25]
"점심 뭐 드셨어요?" 그 '유명한' 첫 번째 폭력 장면-무참히 강간당한 옛 애인의 복수를 하러 게이바 애스홀클럽에 뛰어든 한 남자가 다른 사람의 두개골을 소화기로 짓이겨놓는 바로 그 장면-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내게 묻는다. "글쎄요...?" 관객들을 살펴보니 어림잡아 1/4은 스크린을 외면하고 있다. 앞의 여자는 구역질이라도 나오는지 입을 틀어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런 장면에서 몰입하고 있는 내 자신이 문득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가스파 노에 감독의 화제작 <돌이킬 수 없는>은 여러 사람들의 시간과 감정을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만들며 갖가지 화제와 혹평들을 쏟아 놓았다. 등장인물들만큼이나 관객들도 고통 받아야 한다는 철칙을 준수하는 사람처럼, 감독은 기존의 폭력씬과 차별적인 스타일상의 전략을 구사한다. 이 영화에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존의 폭력적 장면이 난무하는 영화들에 익숙해진 우리 스스로에게서도 원인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강간과 살인, 섹스는 결코 희귀한 영화적 소재라고 볼 수 없다. 문제는 그것을 조망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기존의 영화들에서는 그 '장면'에 그러한 폭력이 '존재'했다는 것을 관객에게 짐작하게 해주는 교묘한 영화적 장치들과 각도, 편집만이 존재한다. 살인 무기를 든 가해자의 손과 증오에 찬 눈빛, 그리고 피해자의 공포에 찬 모습, 다시 가해자의 동작, 단말마, 피해자의 패배. 이런 히치콕의 '사이코'식의 촬영이 아니더라도 폭력 장면은 익히 '조폭영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폼나게, 열라 폼나게 연출되거나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시간에서 그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 지옥에서는 그런 소박한 희망 따위는 버려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강간당한 애인을 위해 복수하려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시간의 역순으로 되짚는다'라는 간단한 내러티브만으로는 이 영화를 설명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의 많은 부분은 지나친 단순화나 복잡화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 '9분'. 강간씬을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 수많은 영화에서 논점의 대상으로 오르지 못했던 강간이 여기에서는 전면적으로 떠오른 것이다. 강간을 마치 나중의 아름다운 사랑을 위한 대비의 포석으로 두었던 모 영화와 달리 그 참혹함을 여지없이, 담담히 보여준다. 그것은 시각적 쾌락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복수를 위한 정당화도 아니었다.(여주인공을 맡았던 모니카 벨루치는 강간범은 죽어 마땅하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판타지를 위한 강간이 현실이 되어 나타날 때, "네 누이나 애인의 경우라면"이라는 말들이 공허함에 부딪치는 현실에서 스크린을 보고 느끼는 구역질은 영화에서처럼 허구가 아니라 분명 실제적인 것이다. 물론, '밤늦게 여자가 그런 야한 차림으로 다니니까..'라고 항변할 사람들은 있을 테지만, 괴상한 교훈을 파내지 말라, 폭력은 일상적이고 예고할 만큼 친절하지 않으며,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바랄 뿐이다.

<박하사탕>의 시간의 회귀가 기차의 철로와 터널로 이루어지는 직선운동이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의 거스름은 기묘한 회전운동이다. 매우 기술적이고 교묘한 사운드와 미친 듯 회전하는 화면의 기이한 조합이 몸에 각인된 원초적인 공포와 역겨움을 불러들였다. 지옥에서 천국으로의 이행, 그것은 영화의 흐름이 순방향이기 때문일 뿐이다. 자신의 몸의 쾌락과 자율권을 중시하고 적극적으로 삶에 임하던 여주인공의 '과거의' 모습은 결국 짓밟힐 운명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안다. 여주인공의 소심한 옛 애인은 잔인하게 살인을 할 운명이다. 우리는 알게 되어 있다. 남주인공의 대책 없는 낙천적 성격은 곧 광폭함으로 변하리라는 것을. 끝까지 관람해야 하는 그리스 비극과 달리 순간순간 바로 이후의 결말을 알아야 하는 것도 관객의 운명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하기도 하지만, 스크린 위의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시간을 공유하는 관객들 모두를 강간하는 것이다.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 근타비가 2021/08/18 [02:52] 수정 | 삭제
  • 천재의작품에 걸맞는 평의 걸작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