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풍자극을 보는 장애여성의 씁쓸함

장애여성 숨은그림찾기(16) 드라마 ‘블랙 미러’

푸훗 | 기사입력 2012/01/06 [14:03]

미디어 풍자극을 보는 장애여성의 씁쓸함

장애여성 숨은그림찾기(16) 드라마 ‘블랙 미러’

푸훗 | 입력 : 2012/01/06 [14:03]
“장애여성, 숨은 그림 찾기” 연재는 다섯 명의 장애여성들이 다양한 ‘매체 읽기’를 통해 비장애인, 남성 중심의 주류 시각으로는 놓칠 수 있는 시선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미디어의 다면성 풍자한 <블랙 미러>
 
▲ <블랙 미러>의 첫 에피소드: 영국 국민들에게 존경 받는 공주가 납치된다. 납치범은 공주의 입을 통해 충격적인 제안을 보내온다.    
“요구는 하나뿐입니다. 그리고 간단한 것입니다. 오늘 오후 4시에 수상 마이클 캘로우는 생방송으로 영국 텔레비전과 모든 방송국, 지상 및 위성 방송에 나와서 어떠한 연출도 없이 돼지와 성관계를 하십시오.”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서 12월 들어 떠들썩했던 영국드라마 <블랙 미러>의 이야기다. 소위 ‘멘탈 붕괴물’이라고 일컬어지며 회자되고 있는 드라마다. 제목 ‘블랙 미러(black mirror)’는 텔레비전이 꺼지고 난 까만 거울 상태의 화면에 사용자의 얼굴이 비춰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화면을 꺼야 비로소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TV에 관한 이 드라마는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미디어 전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마이클 캘로우 수상님 제 목숨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들이 지시하는 대로 정확히 오늘 4시까지 하지 않으면 저는 죽을 거예요.” 납치된 공주의 영상메시지를 보고 수상은 납치범이 진짜 요구하는 것이 돈이냐, 지하디를 풀어주는 것이냐, 제3세계의 빚을 없애는 것이냐라고 참모진에게 신경질적으로 다그친다.
 
그러나 납치범이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 수상이 돼지와 섹스 하는 장면의 생방송. 게다가납치범의 요구가 담긴 공주의 영상메시지는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의 것도 아니다. 최초에 유튜브에 업로드 되어 인터넷 매체를 통해 급속하게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를 지우면 여섯 개의 복사본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이 상황에서 수상과 참모진은 무기력하다.
 
영상이 인터넷에 퍼질 대로 퍼져 공주의 납치 사실과 납치범의 요구를 온 국민이 모두 알고 있는 상황을 오직 방송사뉴스에서만 다루지 않는 것을 시민들은 의아해한다. 기자와 피디의 트위터 타임라인은 ‘왜 감추는 것인가?’라는 멘션으로 가득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영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뉴스채널에서는 핫이슈로 보도가 되고 있다.
 
<블랙 미러> 이야기의 초점은 공주의 납치가 아니라 납치로 인해 발생한 미디어의 다면성이다. 아니다, ‘현대’ 미디어의 다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아는 사실’에서도 소외되는 장애인들
 
▲ 생방송을 지켜보기 위해 사람들은 TV앞으로 모여들고, 거리는 텅 빈다.
현대인의 삶에서 TV와 인터넷(유튜브, SNS, 블로그 등)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미디어이다. 특히 SNS는 친교의 기능을 넘어 날 것 그대로의 정보가 유통되는 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온갖 미디어를 통해 유통되는 정보로 인해 국가의 수상이 진퇴양난에 빠지고 시민들이 그것을 여흥거리로 즐기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느낀 찝찝함은 며칠간 나를 놓아주질 않았다. 시민들이 이 불쾌하고도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을 여흥거리로 즐기는 모습이 각종 루머기사들을 접하며 낄낄대는 내 모습과 겹치기 때문인 줄 알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이렇게 온 나라의 이목이 집중된 대사건에서조차 장애인이 소외되기 때문이었다.
 
TV에서는 시・청각 장애인이 소외된다. 시각장애인은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수 없다. 그저 꿀꿀거리는 돼지 소리만 들릴 뿐이다. 청각장애인은 어떤가? 청각장애인용 캡션기기가 없는 가정이라면 지금 TV에서 무슨 일들이 오가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수화통역서비스영상은 주로 지정된 시간, 지정된 프로그램 정도만 제공되기 때문이다. 캡션기기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다 이해할 수 있느냐하면 그렇지도 않다. 청각장애인은 조사가 빠진 수화의 특성상, 일반 언어를 외국어와 같이 느끼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특수학교를 다니는 등 제한된 그룹과의 교류만 있었다면 정도가 더 심해진다.
 
유튜브와 같은 인터넷영상미디어에서는 시・청각장애를 포함 지적장애, 지체(상지장애)의 유형이 소외된다. 지적장애가 심할 경우 인터넷에 접근할 능력조차 없다. 상지장애의 경우 누군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물리적으로 컴퓨터 접근이 불가하다.
 
SNS는 모든 유형의 접근이 제한적일 수 있다. 주로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생성, 유통되는 정보들은 스마트폰을 보유하고 있거나 혹은 인터넷 사용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있다. 비싼 통신기기와 이용료 등을 감당할 수 없는 장애인은 모든 유형에 걸쳐있다. 모든 유형에서 학력이나 외관상의 이유, 물리적인 이유 혹은 편견 등의 이유로 경제활동이 어렵거나 불가하고 그로인해 생활고에 허덕이는 부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장애인도 마찬가지라고? 그러나 장애인의 환경과는 태생부터가 다르지 않은가. 비장애인은 ‘정상범주’이고 장애인은 ‘비정상범주’이니까.
 
한 청각장애여성의 예를 통해 보면 이 사실은 분명해진다. 이 청각장애여성은 20대이고 정규교육과정을 통합시스템으로 마쳤으며 어느 정도 음성언어를 들을 수 있으며 문자해독도 가능하다. 각종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다. 심지어 수화는 하지도 못한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하는 연변사람이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가까운 사람들과는 전화통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청각장애는 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청각장애여성이 취업전선에 뛰어들면 상황이 달라진다. 청각장애는 이 장애여성의 모든 장점을 상쇄시키는 단점이다. 이것으로 경미한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취업전선에서 당당할 수 없고 그것으로 인해 경제활동이 어려워진다. 비단 이 청각장애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비장애인과 비등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해도 장애인은 ‘정상범주’에 속할 수 없다. 현대사회는 그런 곳이다. 이런 이유로 SNS는 모든 장애유형에게 있어 제한적인 미디어이다.
 
소외계층의 미디어 접근권은?
 
내가 아는 한 뇌성마비 장애여성언니는 주로 터치로 이용해야하는 스마트폰의 사용을 몇 달이나 고민했다. 과연 끊임없이 흔들리는 손으로 터치를 정확하게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미디어의 유통채널이 다양화되면서 사람들은 더 쉽고 편리하게 미디어에 접근할 수 있지만 장애인은 오히려 미디어 접근에 있어 제한된다. 비장애인들은 본인의 필요에 의한 미디어를 선택, 접근할 수 있지만 채널의 다양화는 소외계층에게 있어 더 불리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블랙미러>의 첫 번째 에피소드의 시청소감은 찝찝함을 넘어 일종의 공포로 다가왔다.
 
많은 부분에 있어 제한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장애인이 전 국민이 시시덕거리고 욕할 수 있는 일종의 이벤트에서조차 소외된다는 것은 제한을 넘어 분리에 가깝다. 아무리 통합을 외쳐도 장애인은 분리된 비주류이다. 비주류는 주류들이 누리는 것을 함께 누리기엔 너무나 많은 것을 이미 갖추고 있어야 한다. 경제력, 학력, 서포트 인력, 제도 등이 갖추어져야 함께 누릴 수 있는 이 빌어먹을 세상. 모든 미디어에서 소외되지 않을 날이 장애인에게 과연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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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코파이 2012/05/17 [20:35] 수정 | 삭제
  • 저는 우리나라가 야구에서 금메달을 땄다던 올림픽을 하던 당시에 중환자실에 누워 손가락하나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모든것이 단절되어버리더군요. 친절한 간호사도, 저를 위로하러 온 친구들도 모두 올림픽 이야기를 하며 제 기분을 복돋아주려 했지만 그것들은 저와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었습니다.
    그 후 재활치료로 6개월이 지나야 제대로 걸을 수 있었는데 그 때 이나라의 도로가 순전히 두다리 멀쩡한 사람만을 위해 만들어져 있다는걸 깨달았습니다. 나는 살아있는데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다는 그 공포감. 지금은 사지 멀쩡하게 걸어다니지만 그래도 몇년이 지난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후로 저는 장애인으로 정신인정을 받았고,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생활에 많은 불편을 초래합니다.
    그때 회복하면서 많이 들으말이 이제 건강해졌네, 다 되었네. 이런말들이었는데 무언가 가슴속에 슬프고 우울한 감정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우울해할때면 저희 부모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너 못걸었던 때 생각해봐라. 지금은 얼마나 다행이니. 다행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말도 너무나 불편합니다.
    모르겠습니다. 한번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그 공포감 -그리고 장애인이로써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이 단절-은 그냥 개인의 성격으로 극복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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