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을 인정할 때 삶은 축제가 된다

13번째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에 참여하다

이충열 | 기사입력 2012/06/04 [12:52]

‘다름’을 인정할 때 삶은 축제가 된다

13번째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에 참여하다

이충열 | 입력 : 2012/06/04 [12:52]
초행길이었지만 을지한빛광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신나는 음악과 경쾌한 발걸음들이 축제가 열리는 장소로 인도해주었다.
 
▲ 13회 퀴어문화축제가 5월 26일부터 6월 2일까지 열렸다.  마지막 날 청계2가 을지한빛광장에서 퀴어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 제공-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음악 소리가 가까워지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직도 삶의 규범이 획일적이고 보수적인 문화를 가진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의 축제인 퀴어문화축제(Korea Queer Culture Festival)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A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동성 커플이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런 생각을 명백히 밝히고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 즈음, 서울시 전역에도 최초로 동성애자를 차별하지 말라는 공익광고가 등장했다.
 
그러자 보수적 기독교계와 보수단체들은 즉각 박원순 시장이 “동성애를 옹호한다”며 강력히 비난했다. 보수 언론들도 동성애 차별금지 광고의 등장에 대해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세상! 서울시민 중 누군가는 성소수자입니다.”라는 진실이, 누군가에게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인 것이다.
 
이제 저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퀴어문화축제의 장이 펼쳐진다. 계속 관심은 있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아 가보지 못했던, 바로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하는 것이다!
 
“다양한 사랑, 다양한 가족, 다양한 존재를 응원한다”
 
2012년 6월의 첫 토요일. 날은 더웠고 을지한빛광장도 비좁게 느껴졌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올해 퀴어문화축제를 찾았고, 그 열기가 뜨거웠기 때문이다. 무대는 알록달록 신났고 축하 공연은 서툰 부분도 있었지만 사랑스러웠다. 여기저기에서 성소수자 인권과 다양성을 상징하는 무지개빛 부채를 흔들며 응원했다.
 
행사장엔 퀴어문화축제를 기념하는 뱃지들과 예쁜 악세사리, 페이스페인팅, 놀 거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학로 갤러리에서 전시되었던 <정상가족관람불가 展>을 다시 볼 수 있어 반가웠다.
 
▲ 퀴어문화축제 참여자들은 성소수자 인권을 상징하는 문구를 담은 피켓을 직접 제작해 퍼레이드에 참여했다.    © 제공-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곳곳에서 참여자들이 직접 준비해 온, 성소수자 인권을 상징하는 문구를 담은 피켓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양한 사랑, 다양한 가족, 다양한 존재 응원합니다” 라는 피켓이 눈에 띄었다.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은 “계간(남성들 간 성행위를 비하하는 용어)이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군형법 제92조의 5항에 대해 합헌 결정이 난 것을 항의하며, 동성애자를 ‘위헌’한 존재로 보는 한국 사회를 꼬집었다.

 
“장애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을 거부합니다” 라는 피켓을 들고 참여한 장애여성들도 있었다. “차별없는 성적 권리, 성적 시민권 보장하라”는 문구가 가슴에 와 닿았다. 한쪽에는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문제해결을 위한 100만 서명운동”과 모금도 진행되고 있었다. 퀴어문화축제는 이제 성소수자만의 축제가 아니라, 강요된 기준에 의해 억압받고 탄압 받아온 인권이 부활하는 축제로 성장한 것 같았다.
 
목을 축이려 음료 파는 곳을 찾아 돌아보는데 한국여성민우회, 차별없는 사회를 실현하는 대학생 네트워크 ‘결’, 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진보신당 등이 펼친 부스 사이에서 교회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차별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인연대였다.
 
“하나님은 동성애자도 만드셨습니다” 라며, 앞장서 동성애자를 탄압했던 기독교 보수단체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모습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목회자로 보이는 분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축제 공연을 지켜보고 계신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다양성, 말로만 외치는 게 아닌 현장에서 만난 기쁨
 
▲ 퀴어문화축제는 성별, 나이, 인종, 장애 등 한국 사회에서 엄격한 잣대가 되고 있는 많은 기준들이 무너지며 다양성이 존중되는 즐거운 장이다.  © 이충열
퀴어문화축제는 말 그대로 한판 축제의 장이었다. 이곳에서는 성별, 나이, 인종, 국적, 장애, 학력 등 한국 사회에서 엄격한 잣대가 되고 있는 많은 기준들이 무너졌다. 외국인들도 함께 축제를 즐기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이었다.

 
한국 사회 어디에서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즐길 수 있을까? 어릴 때부터 학습 받아 온, 남자인지 여자인지의 구분을 뚜렷하게 만들어주는 의상이나 표정, 행동, 말투 등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자유로운 사람들의 모습에, 전형적인 “여성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 나 역시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드디어 청계1가에서 3가로 이어지는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다양한 색깔의 물감이 튀어 섞이며 만들어낸 예쁜 이미지의 퀴어문화축제 현수막을 단 차가 앞섰다. 무지개 깃발과 무지개 우산을 든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고, 각각 다르게 꾸민 차량 위에서 사람들은 신나게 춤을 추었다.
 
퍼레이드 행렬을 따라가거나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이 같이 춤추거나 노래를 불렀고, 흥에 겨운 몇몇은 차 위로 올라가 본격적으로 댄스 타임을 갖기도 했다.
 
퀴어 퍼레이드에서는 밖으로 나온 많은 동성애 커플들이 손을 꼭 잡고 행진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거리를 걷는 것. 이성애 커플이 하면 자연스럽고, 동성애 커플이 하면 눈총 받는 일. 대체 누가 무슨 권리로 그 기준을 만드는 것일까. 실상은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구분선과 획일적인 기준들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것인 양 그저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슬퍼졌다.
 
이 때 퍼레이드를 하며 당당하게 애정 표현을 하는 청소년 커플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낯선 풍경일 수 있지만,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예뻤다. “나 OOO는 성적소수자의 친구입니다.” 라는 피켓을 든 이성애 커플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50대가 훌쩍 넘을 것 같은 분들도 꽤 볼 수 있었는데, 요즘 유행하는 가요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이 낯설면서 즐거웠다.
 
“다양성”을 외치면서도, 실제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즐겁게 어우러져 있는 광경을 경험한 적이 별로 없는 나에게, 13회 퀴어문화축제는 좋은 충전제가 되었다. 예상보다 훨씬 큰 규모의 사람들이 참여했고, 즐거움은 배가 되었다. 내년 14회 퀴어문화축제는 서울광장을 무대로 열리게 되고, 퀴어 퍼레이드가 종로 한복판을 점거할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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