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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의 경험’ 소중함 알려준 여성주의
<나의 페미니즘> 일다 독자위원 김소희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김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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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창간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경험을 통해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여 대안담론을 만드는 기획으로,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필자 김소희 님은 일다 독자위원입니다. -편집자 주
 
‘내 것’을 소망했던 어린 시절
 
나는 <일다>를 통해서 페미니즘을 알게 되었다. 물론 전에도 그런 말을 들어보기는 했다. 하지만 그때 나에게 페미니즘이란 문학이나 문화이론을 공부할 때 나오는 수많은 개념어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삶과는 연관이 없고 공부를 하기 위해서 사전적 의미 정도는 알아둬야 하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여성이라는 자의식도 없었거니와 그런 것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인도에서 만난 한 언니를 통해 <일다>를 알게 되었다. 한국에 들어와서 난 그녀가 기고한 글을 보기 위해 <일다>를 찾았고, 한 사람과의 인연은 무수히 많은 인연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장소에서 만난 사람들은 같은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보고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여성주의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는 ‘여성주의는 잘 모르겠는데…’ 하면서도 왠지 모를 편안함 때문에 그냥 머물렀다. 나의 페미니즘에 대한 글은 왠지 모를 그 편안함에 대한 넋두리가 될 것만 같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에 가기 전에는 오빠의 옷을 물려 입었고, 그 이후에는 다른 친척 언니나 동네 언니에게서 옷을 얻어 입었다. 새 옷은 주로 독일에 있는 이모가 생일 선물로 보내온 것들이었는데, 친구들의 옷과 비교하면 좀 특이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남자옷, 유행이 지난 옷, 특이한 옷 가운데 하나를 걸치고 다녔다.
 
나는 튀는 옷을 입기보다는 남들과 같은 평범한 옷을 입고 싶었고 그게 누가 입던 옷이 아닌 처음부터 내 것이기를 원했다. 생일 선물로 엄마가 골라준 분홍색 원피스를 언제 입을까 고민하고, 친구들이 들장미소녀 캔디 이야기를 하면 캔디 캐릭터 운동화를 신고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암울했다. ‘어? 특이한데…’가 아니라 ‘와! 멋있다’가 듣고 싶었던 것은 어린아이의 욕심이었을까.
 
▲ 나는 소매가 볼록한 원피스를 입고 싶어 했던 빨강머리 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그 옷을 사주는 사람의 마음과 그로 말미암아 생기는 자존감이었으리라.
내가 입고 다니는 옷에 나는 점점 무관심해졌는데 그건 상대적인 박탈감과 열등감의 다른 표현이었다. 내가 디자인이나 스타일에 무딘 사람이 되어버린 데에는 어린 시절 옷에 대한 상처가 크게 한몫을 한다. 유년시절 내 존재감은 내가 가진 옷들과 비슷했다. 내 것이 아닌듯한 어색함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린.

 
나는 가정형편이라는 현실 때문에 마음속에 있는 바람들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종종 묻어버렸다. 난 예쁜 옷을 갖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생일에 엄마와 내 옷을 사러 옷가게에 가는 것을 소망했다. 엄마의 선물은 학용품이나 속옷이 대부분이었다. 선물로 생필품을 받고 싶어 하는 아이가 어디 있으랴. 나는 소매가 볼록한 원피스를 입고 싶어 했던 빨강머리 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원피스 자체가 아니라 그 옷을 사주는 사람의 마음과 그로 말미암아 생기는 자존감이었으리라.
 
말도 없고 잘 울지도 않는 아이
 
초등학교 1~2학년 때 학교 가는 것을 싫어했다. 아침에 엄마가 내 머리를 땋기 시작하면 나의 찡얼거림도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번번이 나머지공부를 해야 했으니, 그 시절 나는 분명 불행했다.
 
학교에는 체벌을 통해 왼손잡이를 오른손잡이로 교정하는 호랑이 선생님이 있었다. 나는 1학년 때까지 왼손잡이였는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다. 나는 겁이 많아서 학교에서는 절대 왼손으로 연필을 잡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으로 아주 천천히 천천히 글씨를 썼는데, 그 무서운 선생님이 맨 앞자리에 앉은 나에게만은 늘 사정을 해야 했다. “소희야, 예쁘게 쓰려고 하지 말고 조금만 빨리 쓰자, 조금만.”
 
키가 작아서 맨 앞자리에 앉은 아이는 왼손잡이라는 이유로는 단 한 대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제 방식대로 서서히 오른손잡이로 교정되어갔다. 왼손이 편한 사람에게 오른손을 쓰라는 요구는 부당하다. 나는 단지 폭력적인 방법을 피해 갔을 뿐,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고 자체를 부당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또 다른 이유는 남자아이들의 놀림이었다. 키가 작고 통통해서 또래보다 어려 보였고,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억지로 학교에 다녔으니 남자아이들에게 나는, 그야말로 ‘밥’이었다. 남자아이들은 양 갈래로 쫑쫑 짧게 땋은 내 머리를 잡아당기며 놀렸는데, 한 명 두 명 잡아당기다 보면, 1교시가 끝나기 전에 둘 중 어느 쪽 머리든 풀어지게 마련이었다. 나는 울음을 꾹 참고 아무렇지 않은 듯 헝클어진 머리를 풀어 정돈하여 묶고, 다른 쪽 머리도 풀어서 똑같은 방식으로 묶었다.
 
집에 가기 전에 매일 양 갈래 땋은 머리에서 묶은 머리로 머리 모양이 바뀌었지만, 엄마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작은 손으로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하는 동안 눈물이 나지 않게 꾹꾹 참으면서. ‘울면 지는 거다’, 뭐 그런 정신으로 버텼다.
 
사실 나는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한 살 터울의 오빠와 팔씨름을 해서 이길 수 있었다. 순발력은 부족했지만 완력은 충분했다. 엄마와 아빠가 싸울 때면 나는 술에 취한 아빠의 무릎을 끌어안아 주저앉힐 수 있었다. 물론 조금 더 자랐을 때는 허리를 안아서 주저앉혔고, 중학교 때부터는 꽉 끌어안아서 팔도 못 쓰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때 나를 못살게 구는 그 조무래기들에게 화도 한 번 내지 못하고 참기만 했을까. 그들은 약자를 못살게 구는 행동이 재미있다고 여기는 잘못된 사고를 하는 미숙아였을 뿐인데. 그들은 나 대신에 나보다 더 약해 보이는 누군가를 또 괴롭히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왜 아이는 말하지 못했을까
 
나는 그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아빠는 술을 많이 드셨다. 아빠가 술을 먹은 날이면 둘은 자주 싸웠다. 할머니와 엄마는 내게 ‘아빠가 딸이 커서 술을 끊으라는 말을 하면 술을 끊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약속을 한 아빠보다 어른들도 지쳐서 하기 어려운 역할을 아이에게 떠넘겼던 할머니나 엄마가 더 원망스럽다.
 
좌우간 나는 말을 배우기가 무섭게 엄마가 시키는 대로 아빠에게 술을 그만 먹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이 없었을 때부터 그것이 정말 내 소원이 되었을 때까지 나는 같은 부탁을 하고, 같은 소원을 빌었다. 최소한 일 년에 100번은 넘게 했고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분명 몇 배는 더 많이 했다. 아빠가 들어줬으면 하는 나의 첫 소원이자 유일한 소원. 그리고 마지막 소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빠는 세상을 뜨는 날까지 술을 끊지 못했다.
 
아빠가 술을 끊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물론 엄마 아빠가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이뤄지지 않았다. 나는 말해봤자 이루어지지 않는 바람 따위는 아예 말하지 않겠다고 생각을 굳혀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엄마 아빠의 불화는 나를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을 진작 만났다면 나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조금 더 쉬웠을 것이고, 나를 나이지 못하게 하는 현실적인 조건이나 부당함을 더 민감하게 느꼈을 것이다. 묵묵히 받아들이지 않고 한 번쯤 부딪쳐봤을 것이고 참고 견디지 않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한 이 답들이 나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나는 가끔 일곱 살배기 여자아이를 만난다.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에 말이 없는 아이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내가 쳐다보면 억지웃음을 짓는다. 나는 그 아이의 미소를 자주 따라 짓는데 사람들은 내가 잘 웃기 때문에 인상이 좋다고들 한다. 여간해서 입을 열지 않는 그 아이에게 난 가끔 물어본다. ‘왜?’, ‘응? 왜?’라고. 다른 질문은 떠오르지 않는다. ‘왜?’라는 질문으로는 그 아이가 입을 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다른 질문과 다른 언어는 배우지 못한 탓에 그 아이 앞에서 나는 여전히 당황스럽다.
 
‘진짜로’ 웃는 나를 발견하고

 
스물아홉 가을에서 서른이 되는 해 겨울, 나는 5개월 반 동안 인도여행을 했다. 사람들과 경쟁하는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저소득층 티베트 젊은 부부를 돕는 무료탁아소에서 3살 미만의 아이들과 100일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나는 잊힌 3살의 기억이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마냥 행복한 3살의 나를 만나지는 못했다. 내 안에도 분명 존재한다는 짐작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짐작 덕이었는지 아이들과의 상호작용 덕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느 한순간 나는 진짜로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다시 시작한 삶에서 나는 울음보다 웃음을 먼저 배웠다. 여행 후반부로 가면서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은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으로 바뀌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전에 일하던 직장에서 다시 일하게 되고 큰 변화 없는 생활을 계속했지만 나는 달라져 있었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하나씩 시도하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게 많은 건강한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말이 많아졌다. 끊임없이 ‘왜?’라고 물었다. 세상의 모든 것, 모든 사람을 이해하기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새로 시도한 일 중에 야학 교사가 있었다. 비장애인과 장애인 통합 야학이었는데, 학생들은 20~70대 각양각색의 사람들, 교사들은 20~50대의 각양각색의 사람들, 다 합치면 100명 정도의 지긋지긋할 정도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당연히 그곳은 늘 시끄러웠다.
 
딱히 사회생활의 경험이 많지 않던 나는 이 혼란스러운 공간에서 계속 ‘왜?’라고 물어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에게 답을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도 ‘왜?’라고 반문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따지기 좋아하고 주장이 강해 보이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난생처음 까칠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결국 ‘왜?’라고 하는 질문의 숲에서 나는 ‘나’도 방향도 모두 잃고 말았다.
 
소통의 새로운 방식을 경험하다
 
그러던 중 나는 <일다>에서 기획한 강좌를 듣게 되었다. 강좌를 들으면서 나는 그녀들이 말하는 방식에 매료되었다. 천천히 읊조리듯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삶, 생각, 신념을 풀어내는 말하기 방식은 내가 그동안 봐왔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서로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겨왔는데, 막상 그런 공간에 있으니 무척이나 낯설었다. 하지만 따뜻하고 편안했다. 강좌가 인연이 되어 <일다>의 기사를 모니터링 하는 독자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독자위원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세상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방식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모두가 쉽게 따라 한다는 것이다. 대화를 나눌 때, 상대의 눈을 보면서 천천히 말하면 상대도 그렇게 한다.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아야 할 때와 시선을 피해주어야 할 때를 정확히 구분하는 것도 천천히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다. 주의할 것은 이야기가 다 끝날 때까지 절대 힘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왜’라고 묻지 않고 그의 ‘왜’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침묵이 필요하다.
 
자신의 입장을 사회적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학습과 경험이 필요하다. 그런 훈련 과정이 부족하거나 심리적 지지 기반이 약한 사람들은 자칫 질문자가 듣고 싶은 대답을 하게 되거나 질문자의 언어를 그대로 따라하는 경향이 있다. 야학에서 학생들의 의견을 들어야 할 때 질문하는 사람에 따라, 어떤 태도로 말하느냐에 따라 학생들의 의견이 수시로 바뀌는 현상이 일어난다. 학생들의 의견을 들으려고 했는데 본의 아니게 내 의견에 대해 확인을 받고 있는 경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몇몇 지적장애가 있는 학생들의 문제라고 치부해버렸다. 그런데 그런 현상은 몇몇 비장애 여성(어머님들) 학생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중립적인 태도로 개방형 질문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이미 내가 교사라는 것을 신경 쓰며 내 생각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조금씩 맞추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사용한 방법이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봄소풍을 언제 가는 게 좋을까요?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라고 묻지 않고, "봄이네요. 이제 곧 소풍가겠네요."라고 운만 띄워 놓는 거다. 30분만 기다리면 역대 봄소풍에 대한 평가와 소풍이라는 행사 자체의 필요성까지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의견은 대부분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학습이나 경험, 자기 확신이 부족해서 자신의 의견을 질문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들의 질문이 진술로, 의견으로 표현되기 전까지는 그들은 내가 질문을 했을 때, 자기의 의견이 아니라 '뭐라고 대답해야하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의 '왜(질문)'에 대해 그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는, 그들의 의견이 되지 못한 '왜(질문)'가 그들에 의해서 의견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 첫 과정이 의견이 되지 못한 '왜(질문)'를 다 쏟아내는 동안 누군가가 그것을 존중받아 마땅한 의견이라 여기고 경청하는 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이다.
 
<일다>에서 강좌를 듣고 독자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야학 학생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 삶을 이야기하도록 해야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물론 그것은 내 삶의 목표이기도 하다. 말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경청의 경험을 주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도, 함께 활동하는 독자위원회의 그 누구도 그 방식에 ‘여성주의’라는 이름을 붙인 적은 없다. 그녀들이 자주 ‘여성주의’라는 말을 할 뿐이다. 나에게 여성주의는 그 자리에 있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그 사람이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방식대로 하도록,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바라봐주는 것이다. 설득과 논리는 그다음 문제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녀들은 무엇이 우선이지 잘 알고 있었고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이제는 떠나간 ‘일곱 살 여자아이’에게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의 일곱 살배기 여자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아이는 누군가 자신을 오랜 시간 동안 바라봐 주었으면 했던 모양이다. 다정한 눈빛으로 천천히 바라보다가 눈을 아주 천천히 감았다가 뜨면 억지웃음이 사라진다. 괜찮다고 살짝 웃어주고 다시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뜨면, 정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망울을 볼 수 있다. 나도 눈물이 나버릴 것 같아서 또 한 번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뜨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그리고 나는 그 아이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 아이가 다음 생에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세상을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두려움 없이 다가서고 두려움 없이 돌아서는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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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4/22 [12:33]  최종편집: ⓒ 일다
 
여유 13/04/22 [17:05] 수정 삭제  
  위로가 되는 글이네요. 이번 기획 글들 모두 감동이에요 ㅜㅡㅜ
tale 13/04/23 [13:27] 수정 삭제  
  글이 주는 힘이 참 크네요.
13/04/23 [18:33] 수정 삭제  
  무언가 마음이 먹먹해지네요. 제 어린시절을 돌이켜 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석은지 13/04/24 [14:41] 수정 삭제  
  여러번 곱씹으며 읽게 되는 글이네요. 읽다가 울컥하기도 했고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하고요. 나도 그랬다고 말 건네고 싶기도 하고, 토닥여 주고싶기도 하네요. 항상 밝은 모습의 소희님만 봐서 일까요. 되게 힘있게 들리기도 합니다. 정말 너무나 잘 읽었어요.
장간사 13/04/24 [21:28] 수정 삭제  
  소희샘의 새로운 면을 봅니다. ^^ 야학 소식지에도 글하나 연재하시면 좋을 듯... 가슴이 뜨거워지는 글이였어요.
최현숙 13/04/25 [17:15] 수정 삭제  
  인도여행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셨던 듯해요~ 역시 여행은 참 좋은 것 같아요. 특히 인도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곳이지요. 앞으로도 좋은 글들 기대할게요~^^
이영민 13/04/26 [21:07] 수정 삭제  
  항상 밝게 웃는 모습만 뵙다가 내면의 또 다른 선생님의 모습을 봅니다.
제가 아는 것보다 훨씬더 따뜻하고 크신 분이셨군요~~!!^^ 잘 읽었습니다.
스누피 13/04/27 [20:26] 수정 삭제  
  장애인 학생들과 만나시는 야학 선생님이신가 보네요. 대화, 만남에 대한 섬세한 글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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