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다> 창간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경험을 통해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여 대안담론을 만드는 기획으로,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전투적’ 남자선배들에게 인정받고 싶던 운동권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이었던 전교조 선생님의 영향을 받은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이었지만 우리 과는 꼴통 중에서도 꼴통, 열혈 빨갱이, 소비에트 몰락 후에도 포스트-마르크시즘을 받아들이지 않은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이 모인 곳이었고, 분위기도 매우 치열했다. 물 만난 고기마냥 학기 중에는 집회와 뒤풀이, 방학에는 집회와 세미나를 하고, 동기들과 수업이 아닌 집회 전일 출석 경쟁을 하며 참 열렬히 쫓아다녔다. 어렸을 때부터 세상에 불만이 많았던 나에게 전일적인 세계관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모순투성이인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단 하나의 열쇠였다. 집회를 하고 도로를 점거하며 뛰어다닐 때 모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수백, 수천 투쟁의 팔뚝이 동시에 하늘을 향해 치켜 올려질 때 가슴 가득 뜨겁게 차오르는 벅찬 감정들은 낮은 학점과 수차례의 학사 경고를 대신해 줄만한 값어치가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집회에 열심히 쫓아다녔지만, 내가 ‘사수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종종 절망스러웠다. 사수대가 앞에서 싸울 때, 까치발을 들어 앞을 바라보며 사수대를 걱정하는 본 대오에 있어야 하는 게 싫었다. 남자동기들보다 뭔가 덜 헌신하고 덜 치열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사수대로 나가서 머리통이 깨져 오는 남자동기가 차라리 부러웠다. 전경에게 안 잡히려고 무거운 몸으로 기를 쓰고 뛰어야 하는 것이 현실의 내 처지였지만, 마음만큼은 나도 선봉인데.... 나는 운동의 진정성 측면에선 남부럽지 않았지만, 그저 그런 진지한 아이였을 뿐, 선배들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정세 판단을 잘 하거나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니던 학교에 여학생위원회가 있었고 여학생들이 만드는 교지편집위원회도 있었지만, 나의 관심 밖이었다. 그런 것은 ‘개량주의자’가 하는 ‘부문 운동’이라며 간단히 넘겨버렸다. 한 번은 우리 학교에 투쟁을 하던 노동자들이 머물게 되어서 그들을 환영하는 대자보를 썼는데 그 제목이 “노동자 형님들, 환영합니다”였다. 그때 여성주의자였던 여자후배가 문제 제기를 하자 “알겠어. 그럼 형님, 누님이라고 하면 괜찮지?”라고 대답했다. 아, 이렇게 구린 흑역사라니! 레닌이 말한 ‘직업적 혁명가’ 상에 맞추기 위해 지금 생각해보면 그나마 대가 센 여자선배들이 있었기에, 우리 과 안에서 성폭력이나 일상적인 성차별이 만연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는 막차 시간에 맞춰 집에 가버리는 그 여자선배들이 아니라, 새벽까지 남아 술을 마시는 전투적인 남자선배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었다. 대학에 다닐 때, 나의 모습은 조금 어둡고 우울하고 어딘가 막혀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욕망을 억압하는데 너무 큰 에너지를 쏟느라, 그만큼 그림자가 생겼던 것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때는 그것을 찬찬히 들여다 볼 겨를이 없었다. 욕망과 당위 사이에서, 내 욕망이 무엇인지 더듬어볼 짬도 없이 당위를 택했고, 그 당위가 요구하는 활동가의 상에 나를 맞춰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 상은 레닌이 말한 ‘직업적 혁명가’였다. 나는 문학을 좋아했다. 소설을 읽으면 소설 속의 주인공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우리에겐 적과 동지의 구분이 확실해야 했고, 갈팡질팡하는 것은 소부르주아적 근성이었다. 그래서 졸업할 즈음, 가지고 있는 소설책을 과실에 다 가져다 풀어놓고 “나는 앞으로 소설 안 읽고 사회과학서적만 읽을 거다, 그러니까 소설 너희들 다 가져라” 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애처로울 정도로 고지식한 인간이라서 그런지, 내 안에서 그 둘을 공존시킬 수 없어 괴로웠던 것 같다. 혁명을 꿈꾸며 대기업 사내하청 공장에 ‘위장취업’하다 진로를 결정할 때에도 나는 ‘주변’이 아닌 ‘중심’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심으로 가면 중심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다.) 물론 한 줌밖에 안 되는 소수이지만 ‘정통’사회주의 운동을 하고 있으니, 마르크스가 말한 혁명의 주요 거점인 대공장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동차를 만드는 대공장의 사내하청 업체에 위장취업을 하였다. 2000년대 초반에 위장취업을 해서 노동 현장에 갔다고 하면 사람들은 다들 신기하게 쳐다보지만, 나 말고도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대공장으로 이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당시는 ‘비정규직’ 투쟁이 막 시작되면서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노조가 만들어지고, 대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조직할 필요성이 제기되던 시기였다. 그러한 시대적인 과제를 안고 나는 문자 그대로의 ‘현장’에 가게 된 것이다. 남성이 90%가 넘는 공장에서 5년 동안 주야 맞교대를 하면서 자동차 범퍼를 만들었다. 비정규직 노조를 만들고 파업을 했다. 공장 안에서 내가 ‘여성’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실존의 문제로 다가왔다. 대학교 때는 ‘명예남성’으로 살았고 그렇게라도 살면 나를 여성으로 대상화하는 시선이 조금은 덜 했었는데, 이곳은 남성처럼 될래야 될 수 없는 구조였다. 내가 들어간 곳은 사내 하청업체였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여성이었다. 자연스럽게 중년여성들인 언니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노조를 만들고 파업을 하는 과정에서 다른 업체의 여성노동자들과도 돈독해졌다. 여성노동자들은 남성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자발적으로, 전투적으로 싸웠다. 사내하청 노동자의 대부분은 그 지역, 농촌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었고, 인맥을 통해 일자리를 얻는 경우가 많았다. 농촌 마을에서 혈연, 지연, 학연에 강하게 묶여있는 남성노동자들은 재고 따질 것이 많았다. 하지만 여성노동자들은 잃을 게 별로 없었기에 무서울 것도 없었던 것 같다. 오죽했으면, 그런 이유로 사측에서 여성노동자가 일하다 퇴사한 자리에 여성노동자를 안 뽑고 남성노동자를 뽑을 정도였다. 어떤 이론보다 생생한, 언니들이 들려준 삶의 이야기 흔히 노동자 투쟁이 관료화되고 박제화되었다고 하지만, 현장에서 내가 본 여성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회사 측이 비정규직 노조 파괴 공세를 시작하면서 단체협상에 임하지 않자 마지막 돌파구로 공장의 주요 라인을 점거하고 8일간 옥쇄 파업(사측과 타협의 여지 없이 진행하는 파업)을 할 때, 스스로 분장을 해서 춤을 추고 흥겹게 놀았던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언니들은 투쟁을 정리하고 통제하기에 바빴던 정규직 노조 간부에게도 거침없이 할 말 다 했다. 게다가 식당노동자 2백여 명이 대거 가입하게 되면서, 여성노동자들은 수적으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었다. 나는 언니들(여성노동자들)과 여성위원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언니들이 들려준 자기 삶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요, 소설이었다. 수많은 곡절을 거치고 거쳐 이곳에서 노동하고 투쟁하게 된 언니들은 노조에서 간부를 하고 공부를 하면서 자기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들의 이야기 속에는 결코 적과 동지, 혹은 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로 규정할 수 없는 자기만의 빛깔과 냄새가 있었다. 내가 배웠던 그 어떤 이론보다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그 때는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읽은 것도 아니고, 강의 한번 들은 적 없었던 때였다. 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 페미니즘은 나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던, 혹은 이야기가 되지 못한다고 여겨졌던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삶의 서사를 들여다보는 것, 각자의 이야기를 날 것으로 꺼내어 놓는 나눔과 공감의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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