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 중에도 아이를 돌볼 수 있는 탁아소

<북과 남을 가로지르다>④ 북한의 보육 이야기

효주 | 기사입력 2014/06/02 [16:49]

근무 중에도 아이를 돌볼 수 있는 탁아소

<북과 남을 가로지르다>④ 북한의 보육 이야기

효주 | 입력 : 2014/06/02 [16:49]

※ 10여년 전, 한국으로 와서 살고 있는 북한이주여성 효주 씨가 북한의 서민문화와 남한에서 겪은 경험을 전하는 <북과 남을 가로지르다> 칼럼이 연재됩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산전 60일 산후 90일, 다섯 달의 출산휴가

 

북한에서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게 되면, 마음 놓고 맡은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탁아소, 유치원을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산전 휴가 35일, 산후 휴가 60일로 총 77일을 출산유급휴가로 규정했었다. 그러나 직장여성들이 산전 휴가를 다 쓰지 않고 해산 마지막 달까지 일을 하고서, 아이를 위해 산후 휴가를 그만큼 더 받아 몸조리도 하고 애기도 돌봐왔다.

 

그러다 1986년에 당 중앙위원회 최고상임위원회에서 산전 휴가 60일, 산후 휴가 90일로 모두 150일간의 출산휴가 제도를 결정한다는 정령이 발표됐다. 이 기간에는 출근할 때와 똑같이 식량(배급)이 1일 700g씩 공급되고, 월급도 정상 지급하도록 되어있다. 다만, 종전의 산전 휴가를 아꼈다가 산후 휴가로 쓰는 현상을 없애고, 산전과 산후 휴가를 철저히 구분해 쓰도록 하였다.

 

산전산후 휴가와 함께, 직장여성들을 위한 북한의 보육 제도에서 평가할 만한 것이 탁아소 운영이라고 본다. 북한에는 여성들이 자녀에 대한 걱정 없이 직장에 다닐 수 있도록 전국의 모든 동(洞), 중대형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 작업반 별로 탁아소가 설립되어 있다. 규모에 따라 여러 개가 설치되어 있는 곳도 있다.

 

중대형 공장이나 기업소의 경우엔 그에 소속된 여성에게만 해당되지만, 동 탁아소는 지역 내 기관, 공장, 기업소에 근무하는 여성의 자녀를 모두 수용할 수 있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근무 중에도 모유 수유할 수 있는 보육시스템

 

탁아소 운영에서 가장 잘 되어있는 부분은 직장여성들이 근무 시간에도 자녀들에게 모유를 먹일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산후 휴가를 마친 여성들은 모유를 먹이는 시기인 생후 8개월 정도까지 두 시간에 한번씩 20∼30분 동안 탁아소에 와서 자녀에게 모유를 먹이고 돌봐줄 수 있다. 이유식을 먹는 1년 정도까지는 오전. 오후 각각 한 차례 탁아소에 와서 자녀를 봐주며, 그 후 1년 반까지는 하루에 한 번씩 다녀간다.

 

탁아소에서는 어린이의 생후 개월 수에 따라 한 방에 두 명의 보육원을 두고 15∼20명을 돌보는데, 모유에서 이유식(흰죽이나 계란죽), 밥 먹이기, 용변 가리기에 이르기까지 차근히 가르친다. 혹시 엄마가 모유 수유가 안 되는 아이들은 암죽(찹살을 볶아서 계란과 설탕을 섞어 가루로 낸 것)을 먹이기도 한다. 암죽을 먹이려면 우선 배급표에서 아이의 1달치 배급을 암가루로 바꿔서 탁아소에 절반, 집에 절반을 놓고 먹인다.

 

퇴근이 늦는 여성들을 위해서는 방 하나를 별도로 내서 마지막 남는 한 명까지 돌봐주고 있다. 큰 공장, 기업소 안의 탁아소에는 의무실(양호실)과 의사가 배치되어 있고 일본뇌염, 간염, 감기 등 각종 질병에 대한 예방주사를 놓아준다.

 

또, 우유(한국에서처럼 정제된 것이 아니라, 젖소가 아닌 염소젖을 짜서 거기에 설탕이나 소금을 넣고 끓인 것), 이유식(흰죽, 계란죽) 쌀밥 등을 공급해 왔다. 최근에는 식량난으로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도 탁아소는 중앙당의 배려로 예방과 치료, 식량 공급 등에 있어서 비교적 높은 수준이었다.

 

식량 부족으로 주민 배급을 중단하는 한이 있어도 탁아소에는 우선 공급하는 원칙을 세웠다. 식량난이 최악에 달했던 1990년대 중반부터는 탁아소마저 배급이 중단됐지만, 최근에는 어느 정도 해소된 것으로 전해진다.

 

보육 시스템이 잘 되어있기 때문에, 대부분 여성들은 집에서 자녀를 키우는 것보다 탁아소에 보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직장에 나가지 않는 여성들도 탁아소에 아이를 맡기려 한다. 탁아소 한 달 비용은 7∼8원 정도로, 노동자 평균 월급 70∼80원(세대주의 평균 월급)과 비교할 때 비싼 편은 아니었다. 지금은 환율이 올라서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른다.

 

전반적인 생활고로, 많은 탁아소에서 처음 아이들을 받을 때 부모로부터 기저귀, 타월 등 양육에 필요한 물품에 아이의 이름을 새겨서 내도록 하였다. 그 외에도 필요한 비품 값을 내지만, 크게 부담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일곱 아이들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던 기억

 

한국에 와보니 배움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학교는 물론 도서관, 학원 등 내가 원하면 배울 수 있는 곳들이 많다. 북한에서는 학교 외에는 배울 수 있는 공간도 없지만 배우고 싶어도 교과서나 공책이 없어서 할 수가 없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학생들에게 교과서와 학용품 공책 연필 등을 공급하던 것이 중단되고, 자체로 해결해야 하는 처지에서 결석률이 높아지고 영양실조로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숙제를 하거나 시험 기간에 공부를 하려고 해도, 전기 사정이 나빠 밤에는 공부할 수가 없었다. 시간제 전기를 공급해주는데, 가정에서 쓸 수 있는 때는 아침 5시~6시 30분까지 저녁 7시~8시 30분까지 밥 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니 텔레비전이 있는 집들도 장식품에 불과했다.

 

결국 학생들은 플라스틱 볼펜대나 페비닐을 그릇에 담아 촛불처럼 불을 붙여 그 빛으로 공부를 했고,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달빛 아래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날 밝은 아침에 서로의 얼굴을 보면 가관이 아니었다. 불 난 집에서 나온 사람모양 얼굴이 그스름으로 새까맣고, 눈과 코 귀 등 오목하게 들어간 곳은 마치 구들장을 들어내고 온 사람 모습이고, 옷들은 너무 새까매서 비누로 씻어도 잘 지워지지 않았다. 이러한 실정은 평양을 제외하고는 북한 전 지역이 마찬가지라고 본다.

 

▲  아이들의 싸움을 막기 위해 고안한 것이, 책방에서 책을 빌려다 읽어주는 것이었다.   © 손그림-  효주

당시 나는 남편이 죽고 나서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재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재혼한 남편은 딸이 셋이었고 시어머니와 같이 살았는데, 시누이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그이의 아이까지 떠맡게 되어, 졸지에 아이가 일곱에 총 열 식구가 되었다.

 

공책이 부족해 소설책들을 뜯어서 공책을 묶어주고, 연필로 쓰면 다시 지워서 쓰기도 하면서 공부를 시켰다. 연필로 쓴 책은 볼펜이나 잉크로 덮어써서 나중에는 쓸 자리가 없어 파지로 수매를 하러 갔다.

 

작은 집안에 아이들이 많다 보니 서로 싸움도 잦았다. 내 아이들과 남편의 아이들, 시누이 아이들, 이렇게 세 패로 나뉘어 싸우는 일이 잦아졌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나는 책방에 찾아갔다. 아무 말 없이 긴 의자에 앉아 한 시간 동안 아이들이 이곳에 와서 어떤 책을 빌려가고 어떻게 가져오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책을 빌려갈 때는 온전했던 것이 가져올 때는 뚜껑이 너덜거리는 것을 가져와서 주인한테 욕을 먹는 것을 보게 되었다.

 

조심스레 다가가 책방 직원에게 ‘우리 집에 애들이 일곱인데 매일 싸우는 게 일이라, 책이라도 빌려다 읽어주려고 하는데 빌려줄 수 있는지’ 물었다. 직원이 ‘아이가 많은 집은 책을 빌려 가면 다 찢어버리거나 안 가져오기도 해서 안 된다’고 거절하기에, 나는 그러면 헌책을 빌려가서 책 표지를 깨끗하게 만들어올 테니까 좀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직원은 난처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 해주겠다고 해서 그런지, 그렇게 하기로 하고 한 권 빌려왔다.

 

책 한 권이 문제인 것이, 서로 먼저 보겠다고 또 싸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숙제를 다 하고 잠자리에 누우면 책을 읽어주겠다고 했더니, 불평을 하면서도 수긍을 했다. 아이 일곱이 자리에 다 눕자 나는 앉아서 책 한 권을 아주 천천히, 흉내를 내어가며, 아이들에게 질문도 하면서 읽어주기 시작했다.

 

그 이후부터 아이들은 자기들이 읽는 것보다 내가 읽어주는 것이 더 재미있었는지 틈만 나면 책을 읽어달라고 졸랐다. 책 표지도 아이들과 함께 새 걸로 만드니 더 재미있어지고 싸움도 덜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책방 직원은 가끔 새 책도 빌려주곤 했다. 그러면 나는 그 책을 가져오자마자 신문지로 책 표지를 싸서 보고 다시 가져다 주었다.

 

말문이 트일 무렵부터 배우는 “어버이 수령님”

 

아무리 탁아소와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키워준다 해도,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은 그 무엇보다 강한 법이다. 아이들은 부모 앞에서 탁아소,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와 춤을 선보이기도 하고, 선생님이 가르쳐준 것들을 행동에 옮긴다. 탁아소 유치원에서는 공부도 가르치지만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기, 오빠언니 말 잘 듣기 등 예절교육을 많이 하기 때문에, 가정은 실천의 교육 장소가 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려서부터 배우는 잘못된 교육이 하나 있다. 부모는 나를 낳아준 분들이지만, 온 나라 인민의 어버이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라고 배우는 것이다. 어렸을 적 내가 엄마, 아빠라는 말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엄마는 아랫목에 모셔진 김일성 원수님의 초상화 앞에 나를 세워놓고 손을 높이 들어 “김일성 원수님 고맙습니다” 말하도록 가르쳤다.

 

나 역시 내 아이들이 말문이 트이자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초상화 앞에 세워놓고 나의 엄마가 내게 그랬듯이 아이들 두 손을 높이 올리고 “김일성 원수님 고맙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장군님 고맙습니다” 하도록 가르쳤다. 이는 북한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족교육 방식으로 거의 유전적 학습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강력하게 자리잡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예쁜 옷과 신발을 내 돈을 주고 샀어도, “수령님 고맙습니다. 장군님 고맙습니다” 라는 인사를 꼭 해왔다.

 

북한사람들은 태어나서부터 이렇게 교육을 받으며, 인민학교부터 부녀회에 이르기까지 ‘생활총화’라는 이름으로 자기 비판, 호상(서로 간에) 비판을 하면서 전체주의 시스템에 적응해 살아간다.

 

나는 통일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북한사람들이 갑자기 한국과 같은 자유주의 사회에 노출되었을 때 과연 어떤 혼란과 혼선이 빚어질 지 걱정이 많이 된다. 나의 좁은 소견이지만, 하나의 체제를 가진 통일보다는 한 나라에 두 정부를 가지고 서로 교류하고 어느 정도 절제를 지켜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정치라고 본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모든 사람들이 다 풍족하고 의미 있는 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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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 2014/06/14 [22:30] 수정 | 삭제
  • 이북과 이남의 환경이 달라 바로 적용할 순 없겠지만 시사하는 바가 많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두정 2014/06/12 [15:59] 수정 | 삭제
  • 이 연재 멋지네요. 고맙게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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