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휴가를 받은 엄마와 3일간의 기차여행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 비슷한 ‘종족’들에게 의지하며

이내 | 기사입력 2014/10/01 [10:19]

첫 휴가를 받은 엄마와 3일간의 기차여행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 비슷한 ‘종족’들에게 의지하며

이내 | 입력 : 2014/10/01 [10:19]

[‘길 위의 음악가’가 되어 새로운 장소와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이내의 기록,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 연재를 시작합니다. -편집자 주]

 

‘쫌 놀아본’ 딸의 기차여행 제안

 

▲  첫 여름휴가를 받은 엄마와 기차여행을 떠나다.   © 이내

서른 살. 3년 간의 외국 생활을 마치고 빈털터리로 고향에 돌아왔을 때, 부모님은 (거의) 파산을 한 상태였다. 사장님 사모님이던 엄마는 일용직 사무실에 이름을 올리고 식당의 주방이든 도우미 일이든 마다 않고 일당을 받는 일을 시작했고,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할까 봐 찾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아빠는 시골생활을 시작했다. 나쁜 일들은 언제나 한꺼번에 찾아온다고 그 이후로도 사건 사고들이 이어졌고, 그렇게 우리 가족은 빈털터리가 되었다.

 

늘 빈털터리였던 나는, 부모님이 나와 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일단 두 분이 바빠져서 나에게 취직해라, 결혼해라 다그칠 여유가 없어지기도 했고, 최악의 순간에도 부모님이 나를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에 내 정신이 온전한 독립을 하게 되기도 했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다는 점에서 같은 상황이었던 우리는 서로 연대하며 사이가 이전보다 훨씬 더 좋아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조금 덜 갖고 더 많이 존재하라’는 스콧 니어링의 말을 따라 살아보고 싶다는 딸의 생각을 두 분이 조금 더 이해하게 되신 것 같다.

 

서른 다섯. 겨우 몇 년 흘렀을 뿐인데 우리 가족은 전혀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아빠는 시골에서 초보 농부가 되어 사장님이던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이른 새벽에 일어나 논밭을 다니며 땀을 흘리고 있고, 엄마는 발전소 청소 용역팀에 소속이 되어 우리 가족 중 유일하게 월급을 받고 건강보험을 내는 직장인이 되었다.

 

어느 날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처음으로 ‘여름휴가’라는 것을 써야 하는데 뭘 해야 할지 고민이니 ‘쫌 놀아본 니가 도와달라’고 했다. 설레어 하는 엄마의 마음이 목소리에 담겨있었다. 마침 나는 성인 두 사람이 3일간 무궁화호와 새마을호를 마음껏 탈 수 있는 티켓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여 ‘기차여행’을 제안했다. 엄마는 마음에 쏙 든다며 함께 가자고 했다. 엄마와 단 둘이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주위 반응은 두 가지였다. ‘좋겠다!’ 혹은 ‘싸울 텐데!’

 

대전 산호여인숙에서 건네온 말 “공동효도”

 

여행의 시작은 한 달에 한번 경북 함창 <카페 버스정류장>에서 하고 있는 공연이었다. 엄마를 배웅하기 위해 아빠가 함창까지 동행했고, 두 분은 거의 처음으로 내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늘 이해하지 못할 말만 하고 엉뚱한 선택만 하는 딸이지만 언제나 져주었던 부모님이, 노래를 부르는 내 모습을 어떻게 보셨을지 아직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가끔 부모님의 차를 탈 때면 나훈아의 목소리가 아닌 내 노래가 늘 흘러나오는 걸 보면 싫어하시진 않는 것 같다.

 

함창에서 기차를 타고 처음으로 향한 곳은 대전이었다. 그리고 첫 날의 숙소는 게스트하우스 ‘산호여인숙’이었다.

 

몇 년 전 알게 된 산호여인숙을 운영하는 부부는, 만나자 마자 우리가 같은 ‘종족’임을 알아챘다고 말했다. 오래된 여인숙을 게스트하우스로 개조하여 1층에는 미술작가들의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전시를 꾸준히 하고 있고, 주변 대흥동 일대의 사람들이 모여 작당을 벌일 수 있는 아지트가 되기도 한다.

 

좀 다르게 살고 싶은 젊은이들의 생존에 관심을 많이 두고 있어서, 공연비를 줄 수 있는 공연이 생길 때마다 꼭 나를 먼저 챙겨준다. 1층 로비 조그만 산호점방에서 내 1집 <지금 여기의 바람 O Vento Agora Aqui> 앨범이 스테디셀러가 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청소할 때마다 내 노래를 (의도적으로) 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대전 산호여인숙 공연.  비슷한 ‘종족’들이 모인다.   © 이내

 

엄마와 함께 하루 숙박을 하겠다고 예약하니, 꼭꼭 저녁을 함께 먹자고 몇 번이나 확인을 했던 산호 부부는 우리를 복요리 전문점으로 데려갔다. 건강상의 이유로 육식을 끊고 있는 나를 위해 선별된 메뉴였다. 처음 먹어보는 다양한 종류의 복요리들은 육고기의 질감과 닮아(맛의 신세계였다) 정신 없이 먹어대고 있는데, 그들이 웃으며 ‘공동효도’라는 말을 꺼냈다. 충격적인 단어였다.

 

나는 가족에게 받은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가족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문화나 관습을 의식적으로 벗어나려고 애를 쓰며 살아왔다. 삼십 대가 되어 엄마 아빠를 독립된 한 인간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또 그들이 나를 그렇게 봐주기 시작하면서, 우리 가족은 다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실 이 여행은 가족여행이라기보다는 서로 아끼고 연대하는 두 사람의 여행이었고, 우리는 주변의 염려와 달리 (놀랍게도) 싸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늙어서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시점이 분명히 올 것이고, 하나뿐인 자식인 내가 이렇게 현재만을 생각하고 살아서 되는가 라는 두려움이 찾아올 때가 분명히 있다. 나 혼자 책임져야만 하는 시스템으로는 불가능하고, 국가를 믿을 수는 더더욱 없다고 느낄 때, 어렴풋이 기대하는 그림이 있었다. 책임을 함께 나누어서 질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그것은 분명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 있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이었는데, 산호 부부가 ‘공동효도’라는 말을 먼저 건네 온 것이다.

 

길에 올라 찾아 나서고 보니 세상에는 비슷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산호여인숙의 언어를 다시 한 번 빌리자면 비슷한 ‘종족’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다.

 

노래여행을 통해 더 넓은 세계로 삶이 확장될 때

 

▲  다산초당 가는 길.  엄마가 찍어준 사진.    ©이내

노래여행을 시작하고 만남의 범위가 확장될 때, 그것은 단순히 다양한 장소들과의 만남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윗세대의 어떤 이들이 나의 특이한 삶의 방식을 (그야말로 물심양면으로) 지지해주는 것을 경험하고, (미래의 사람들이라고 믿는) 나의 아래 세대의 어떤 이들이 고군분투하며 살아내고 있는 모습을 만나면서, 나와 내 또래를 넘어서는 더 넓은 세계로 삶이 확장되고 있다고 느낀다.

 

나 자신으로 오롯이 독립된 존재이고 싶었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1대1의 관계를 어떻게 맺을지에 대한 고민이 전부인 줄 알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는 도저히 안 풀리는 문제들이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그러니까 ‘나’와 ‘너’의 머리에서는 나올 수 없는 ‘제 삼의 존재’를 통해 해결되는 몇 번의 경험을 했다.

 

그리고 최근 다양한 환경과 세대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 세계와 그 속의 관계들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다각도로 펼쳐지고 있는지를 (이제서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로부터 내가 받은 것들을 어떻게 미래로 흘려 보내야 하는지의 고민이, 지독한 개인주의자이며 반(反)가족주의자인 내게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공동효도’는 대전을 떠나서도 계속 이어졌다. 페이스북에서 여행 포스팅을 본 몇몇의 다른 분들이 (엄마와 맛있는 거 사먹으라며) 내 계좌로 돈을 보내준 것이다.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그 마음들을 받았다. 이제 나는 받은 것들을 환원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아니, 기쁜 마음으로 찾을 것이다.

 

시간을 관통하는 ‘길’을 엄마와 걸으며

 

3일간의 여행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얻은 것은, 좀더 긴 여행도 엄마와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였다. 무계획적인 여행을 즐기는 딸을 배려한 엄마는 즉흥적인 상황에 마음을 열어주었다. 본능적으로 계획을 세우다가도 ‘아, 우리 딸 이런 거 싫어하지’ 하면서 자기 검열을 했다고 한다.

 

둘째 날에는 역사를 좋아하는 엄마의 의견에 따라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을 걸으며 옛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여행의 마지막 날은 엄마가 20대 초반이던 시절을 보내며 걷던 서울의 길들을 함께 걸었다. 다행히도 우리 두 사람은 걷는 걸 좋아한다는 공통분모가 있어서 시간을 관통하는 여러 길들을 함께 걸었다.

 

동서고금을 넘어 ‘길’이 인생의 상징이라는 것이 새삼스럽다. 누구나 자신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 길은 과거에서부터 미래로 이어지기에 또한 혼자만의 길이 아니다. 혼자 걷는 것만 같았지만 누군가는 업어주고, 누군가는 먹여주고 있었으며, 또한 내가 바로 그 누군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3일간의 여행에 대한 감상 치고는 좀 거창하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의존해야만 한다는 게 어떤 뜻인지 잘 알고 있어요. 이것이야 말로 내가 사람들에게서 찾으려 해온 것이에요. 깊이 자리한 선량함이요.” -에스더 D. 로스블럼 & 캐슬린 A. 브레호니 <보스턴 결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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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sh 2014/10/15 [15:51] 수정 | 삭제
  • 즐겁게 읽었습니다~^^
  • Y 2014/10/08 [13:15] 수정 | 삭제
  • 와~ 두근두근하네요!
  • 다람쥐 2014/10/01 [13:07] 수정 | 삭제
  • 나도 엄마랑 단둘이 여행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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