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 앞에 선 창호네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69화

김담 | 기사입력 2014/10/30 [17:07]

무당 앞에 선 창호네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69화

김담 | 입력 : 2014/10/30 [17:07]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점심때가 훌쩍 넘어간 시간이지만 끼니 대신 거나하게 술에 익은 얼굴로 태광이와 장씨는 주섭이집 사랑채에서 주거니 받거니 잔을 돌리고 있다.

샘이 무너져 동네 남정네들이 동원되었고, 지목수와 장씨가 주동이 되어 보수를 할 때 지섭은 샘 속에서 무너지는 돌에 몸을 맞아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때 장씨의 재치와 기백으로 살아났지만 다친 팔과 어깨 때문에 마무리 농사를 다할 수 없었는데 태광이 지섭의 소작을 거의 면제해주는 바람에 다행히 겨울을 날 정도의 식량은 남길 수 있었으니 고맙지 않을 수 없다.

 

-행님, 지 잔 받으이소. 카고-

말끝을 흐리면서 지섭이 태광의 잔에 막걸리를 붓는다.

-여만 이리 있을 끼 아이고…. 우리가 이왕 나선 길에 두루 돌아댕기민서 얼굴이라도 익히야 될 낀데?-

태광은 옆에 있는 장씨를 보면서 집 나선 이유를 다시 한 번 들먹인다.

 

농한기다. 들판에는 까마귀 떼만 들끓을 뿐 뜨는 해도 지는 해도 누구하나 상관할 필요가 없다. 지나가는 시간은 유일하게 뱃속에서 알려준다. 놀고 있는 손이 근질거리면 새끼를 꼬거나 멍석을 말지만, 잡기에 능하거나 술판을 좋아하는 남정네들은 구들장이 뜨끈한 초당 방에서 골패를 돌리거나 윷을 놀다가 가끔은 논도 날리고 밭도 날리는 우매함이 판치는 겨울이다.

 

-아따 참. 행님도. 아 누가 누구한테 인사를 댕깁니꺼? 지금? 카고… 또 다 한 동네인데. 모리는 사람도 엄꼬. 장씨는 이미 동네에서 다 압니더. 신경쓸 거 없심더-

종필이도 한 마디 거든다. 샘이 무너질 때 지섭이와 같이 물속에 있었지만 다행히 몸은 상하지 않았었다. 나이로 봐도 지섭이나 종필이는 태광이와 장씨보다는 서너 살은 아래지만 자라면서 한 동네에서 살다보니 그들이 아는 것은 그저 누가 위고 아래라는 정도이다.

-하긴… 까짓 오늘 아이몬 내일이제. 춘삼월 전에는 다 같은 날 아인교?-

태광이 장씨를 돌아보며 하여가 같은 소리를 한다.

-니 아까… 내기 뭐 할 말이 있었지 싶은데? 뭐꼬?-

태광이 말은 지섭이를 향해 하면서 잔은 옆에 있는 장씨에게 놓으며 묻는다.

-아! 그기..와? 안 있습니꺼? 구향에 사는 종태 말입니더-

태봉에서 났지만 함창읍내의 구향에 사는 같은 종씨를 말하고 있다.

-가가 와? 갑자기?-

태광은 그동안 잊고 있던 종태의 얼굴을 떠올리며 지섭에게 묻는다.

-종태 처가 태우집에 가서 난리를 쳤답디더. 며칠 전에-

지섭이 대신에 종필이 대답한다.

 

태우라는 이름이 나오자 태광은 종필이 얼굴을 아무 말 없이 쳐다보다가 쓴 입맛을 다시며 잔을 들고 입에 쏟아붓는다. 또 그 놈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구나 생각한다.

장씨는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이름들이 나오자 술잔을 쳐다보며 그저 꾸어다놓은 보리자루 마냥 묵묵히 있을 뿐인데 이번에는 지섭이 말을 이어받아 계속한다.

-태우가 판을 벌리고 그 옆에는 꾸루와이가 바람을 잡고 하는 모양입니더. 그서 종태가 두 마지기 문서를 태우한테 잃었는데 그걸 알고 종태 처가 계집막꺼정 가서 아예 드러누워버렸답니더. 종태네 행편도 별론데… 두 마지기면 그기 오데 적은 겁니꺼?-

 

장씨는 어렴풋이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겨울에 흔히 나타나는 일이다. 남아도는 시간을 초당 방에서 부르고 당연히 술판이 벌어지고 심심해서 시작한 골패놀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오기로 또는 본전생각으로 제정신을 잃게 만들기 일쑤이다. 장씨는 처음 들어보는 태우라는 이름은 모르겠지만 지난여름에 샘터에서 본 그 꾸루와이라는 이름은 이미 알고 있다.

-그 자석 얘기는 고마 해라. 내 듣기도 싫다-

태광은 얼굴이 일그러진다. 태우는 이복동생이지만 나이는 태광이하고 겨우 몇 달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행님도, 참! 오데 듣기 싫다고 기냥 지나갈 일입니꺼?-

지섭이 걱정스런 눈으로 태광을 본다.

-다 같은 종씨고 집안인데 그런 일들이 생기몬 좋을 끼 뭐 있겠습니꺼? 행님이 말이라도 해서 시끄러운 일은 없도록 해야지예-

 

지섭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은 없다. 태봉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인근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다 종씨고 설령 아니다 해도 한 다리 건너면 이리저리 다 엮여있는 판인데 뒷돈 대주고 노름판 벌리는 놈은 남도 아닌 이복동생 놈이고, 또 그 판에서 바람잡이 하는 꾸루와이 역시 한 동네에 사는 종씨이고, 논을 날렸다는 종태 역시 한 집안 일가이니, 종가의 입장에서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태광은 쓴 입맛만 다실뿐 뾰족한 수도 없다.

 

-장씨! 고마 갑시다-

태광이 벌떡 일어서서 장씨를 남겨둔 채 벌컥 문을 열고 나가버린다. 장씨는 남아있는 지섭이와 종필이 잔에 술을 채우면서

-광수아버지가 속이 많이 상한 모양인데… 무슨 수가 있겠지요. 한 동네에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자, 그럼 저는 이만-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목례로 인사하는 둘을 남겨둔 채 밖으로 나온 장씨도 싸늘한 겨울공기에 얼굴을 식히며 저만치 걸어가는 태광의 뒤를 따른다.

 

*      *      *

 

봉당에 고무신이 두 켤레가 있는 걸 보고 무당은 누가 또 와있구나 짐작하며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말한다.

-집이 아주 터를 잘 잡았네-

마당 한가운데 선 채 고개를 휘휘 둘러대며 집의 면모를 둘러보는 사이 문이 열리고 광수에미가 우르르 마루로 나온다.

-어서 오이소.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심더. 올라오이소예-

-운제부터 여서 살았노?-

무당은 광수네가 이리로 오게 된 경위를 전혀 모를 수밖에.

-울매 안됐심더. 아래채에서 살다가 소향이 온다꼬 방내주고 이리 오게 됬지예-

신을 벗고 마루에 올라선 무당은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 바퀴 휘 둘러본다.

-그래? 진작에 올끼지. 이리 좋은 집을 두고 모하로 곁방살이 했노?-

방안에는 웬 아낙이 아랫목을 비워둔 채 손님을 맞이하듯 윗목에 서있다. 바로 을순이 올케다. 무당은 두 말도 않고 아랫목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창호어마이를 뚫어지게 본다.

돈이 될 것 같지는 않은 형색이다. 비록 점을 보거나 신수를 읊어대도 비단공단을 휘감은 여인네들을 앞에 두어야 쌀말이라도 쉽게 거두어들이는데 저렇게 때꼬장물이 줄줄 흐르는 여자들한테 무슨 잔돈푼이라도 있으랴?

 

-그케도 낮이 되서 그런가? 그케 안 춥다. 와 서있노? 앉거라-

무당은 아예 아이들 다루 듯 하며 윗목에 서있는 광수에미와 창호어마이를 보며 방바닥을 손바닥으로 친다.

-그래. 니는 내기 물을 끼 뭐꼬?-

광수에미에게 당돌한 태도로 묻는다. 이런 여인들한테야 뭐 꾸물거리거나 주저할 필요가 없는 법. 아예 초장부터 콱 눌러 깔고 앉아야 하는 법 아닌가?

-지는예. 우리 아아들 사주나 좀 물어볼라꼬예-

광수에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종가의 재산이 은근히 탐나고 있다.

-쿤데… 아침에 불을 안 넣었나? 와 이리 미지근하노?-

광수에미의 궁금증에는 관심도 없는 듯 무당은 깔아놓은 이불속에 손을 넣고 불기운이 다한 구들장 탓을 하고 있다.

-와예? 안 따심니꺼? 아침에도 불을 넣었는데예?-

광수에미는 육중한 허리를 길게 뻗어 아랫목에 손을 넣어본다.

-인제 저녁때가 돼서 그렇네예-

별 수 없다는 말이다. 하긴 조석으로 밥을 지을 때나 불을 지피니 두 번 불을 때는 것은 당연하지만 가마솥에 푸르륵 하고 밥물이 흘러넘칠 정도로 불이 지펴지고 나면 남은 불을 고래에 밀어 넣고 그것으로 끝이니 두꺼운 구들장 돌판이 뜨겁게 달구어지기에는 충분치 않을 수밖에.

 

사주를 봐달라고? 또 그 생년월일을? 무당은 두 여자를 번갈아 보다가 안심을 한다.

-그래. 우선 사주를 내놔봐라-

-큰 아는 올해 열 살이고 작 은아는 일곱 살입니더-

-태어난 해가 뭐꼬?-

다짜고짜 물어대는 무당의 말에 광수에미는 어리둥절하다.

-예?-

해를 알 리가 없는 광수에미다. 한문은커녕 언문도 깨우치지 못했으니 나이만 알뿐.

되묻는 광수에미의 눈빛에 무당은 다시 안심하고는

-니는 해도 모리나? 자슥을 놓고도 해도 모리나?-

기를 있는 대로 죽이고 있다.

-보자…. 열 살이면…. 무신 핸가- 하고는 손가락으로 간지를 짚어대지만 무당 자신도 그 많은 육십 개를 외워본 적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오이야. 카고, 달하고 날과 시는?-

그 물음에는 광수에미도 자신 있는 양 턱밑에 바치고 있던 무릎을 내려 퍼질러 앉으며 내놓는다.

-큰 아는 팔월 초이틀이고 아침 묵을 때 낳고예, 작은 아는 동짓달 열이레 한밤중에 낳았심더-

한심한 것은 무당 자신도 마찬가지지만 무당의 눈에 보이는 광수에미는 더 한심하게 보인다.

-그 카지 말고, 아침 무울 때도 몇신지 또 한밤중이지만 정확히 몇신지 말을 해야 알제. 시가 울매나 중한데 그케 말하노? 사람 팔자가 새벽 종소리 나기 전하고 나고 난 후하고 천지 차이라는 것 모리나?-

마치 질책하듯 광수에미를 나무란다.

-글치예! 큰 아는… 음… 한 여덟 시쯤 되고예. 작은 아는 확실히 압니더. 놓고 나이 싸이렌이 울었으예. 열두 시 막 되기 전이지예-

-우선 큰 아부터 보제이-

무당은 눈을 감고 역시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엄지를 움직여가며 시늉을 하는데 목도 마르고 술이 간절하다.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눈을 뜨고

-목이 마르네. 너그 집에 술 있나? 내 한잔 도고. 카고… 아무 케도 신을 좀 모시야겠다. 이왕 보는 김에 정확히 물어봐야지. 니는 정한수 한 그릇 하고 초 한 자루 가온나-

아무 말 없이 그저 무릎 조아리고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창호어마이가 일어서며

-우리 집에 아 아바이가 묵던 술 있다. 내 그거 가올게-

-그렇나? 잘됐네. 내는 안채에서 초 한 자루 얻어와야겠다. 퍼떡 갔다 온나-

-정한수라 켔다. 샘에서 물 떠온나-

무당의 당부다.

물이 물일진대 무슨 정화수니 부정 탄 물이니 따지고 드는 것은 다 신령을 위시한 거창한 주문일 뿐이지만 무당에게는 그런 것들이 자기 주머니를 불려주는 일인 것이다.

 

창호어마이가 가져온 안동소주를 사발에 부어 반쯤 마시고 나니 속이 싸르르하게 전율이 오지만 한결 기분은 구름을 타고나는 듯한 무당이다. 옹기 화로를 가운데에 두고 그 가운데에 양초를 꽂고 불을 붙인 무당은 눈을 감고 입술만 달싹거리며 무언가 읊어대지만 실은 몸 앞에 놓인 화로의 따신 기운을 즐기고 있다.

 

-니는 뭐 내놓을 끼라도 없나? 아, 신령님이 오시는데. 빈손으로 모실래?-

눈을 거의 부라리며 광수에미를 나무란다. 신령님이라는 이름 앞에 감히 누가 대들 것인가? 그저 당황한 광수에미는 어쩔 줄을 모른다.

-내기 주는 복채 대신 신령님께 디리는 공물을 놓아야지!-

-우짭니꺼? 돈은 엄꼬…. 곡식도 괜찮습니꺼?-

이런 우라질! 그럼 공염불 하라고 나를 불렀단 말인가? 무당은 기가 차지만 어차피 종가에서 목적을 이룬 이상 너그러이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곡식도 된다. 뭐든 정성으로 놓으민 되는 기라- 하고는 다시 두 눈을 감고 중얼거린다.

 

옆에서 쪼그려 앉아있는 창호어마이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구경을 하지만 내놓을 것 없는 형편에 감히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한다. 광수에미는 정기에서 바가지 가득히 하얀 쌀을 퍼다가 화로 옆에 놓는다. 거의 두어 되는 될 성싶다. 실눈 밖으로 보이는 쌀이 적지만 별수 없는 무당은 한참을 더 중얼거리다가 눈을 뜨고는 광수에미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광수에미는 무당이 눈을 빤히 뜨고 자기를 쳐다보는 것이 이상스러워 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 와예?-

무당은 바가지에 담긴 쌀을 한심한 심정으로 보다가 입맛을 다시고는 말을 내놓는다.

-큰 아는 참 좋다. 아바이도 어마이도 아를 아주 잘 낳았네. 씨가 울매나 좋은지 박덩어리 보다도 크다. 그 속에서 크니 황우장사보다도 더 클 끼고 장대하게 자랄 텐데… 우에… 큰  돌덩어리가 누르고 있네.-

쌈지 속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화로에서 숯을 찾아 불을 댕긴다.

-돌덩거리가예?-

광수에미는 한 발짝 앞으로 움직이며 묻는다.

-돌이 아이고 거의 바우다 바우!- 하면서 무당은 연기를 옆으로 뿜어댄다.

-그걸 치워줘야 아는 지대로 클 끼다. 내 부적 하나 써줄 낀데. 그걸 대들보 밑에 붙여두고 아가 스물두 살될 적꺼정 띠지 말거라. 아! 또 한 가지! 집안에 나무는 심지 말거래이. 아가  빨아묵고 클 양기를 나무가 무울 끼다-

-아! 예-

광수에미는 거의 머리를 조아릴 정도로 황송함을 표시한다. 배 아파 낳은 아이가 바위에 눌려있다는데 외면할 에미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고 씨주머니가 박덩어리만큼 크다는데 안 좋아할 에미가 또 어디 있겠는가? 무당은 이 교묘한 두 음양을 잘 조화시키며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사주를 팔아먹고 있다.

 

-보살님예. 지는 드릴 건 잡곡밖에 없는데예. 그거라도 받아주시고 좀 봐주실랍니꺼?-

창호어마이가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청한다. 무당은 능청맞은 표정으로 눈을 올려 뜨고

-니도 뭐 물어볼 꺼 있나?-

아예 상전이 하인에게 하듯 묻는다.

-하도 집에 우환이 들어서예-

-오이야, 가온나-

봐주겠다는 말 대신에 가져오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놓는 무당이다.

오후 햇살도 거의 저물었는지 창호어마이가 광목자루에 뭔가 담아 들고 들어오느라고 열어젖힌 문 사이로 들어오는 한기가 제법 차가웠다.

-그래, 니는 물을 끼 뭐꼬?-

화로 옆에 놓인 자루 속이 궁금하지만 필경 쌀은 아닐 것이고 기껏해야 콩이나 서숙이나 아니면 수수정도일 테지 하고 생각하며 지전이 그리운 무당이다.

-집에 와 자꾸 우환이 생기는지예-

창호어마이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이럴 때 무당은 자신이 필요한 것을 말하도록 중생을 주무를 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집에 식구가 몇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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