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방이 편지를 배달하다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73화

김담 | 기사입력 2014/11/30 [22:31]

장서방이 편지를 배달하다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73화

김담 | 입력 : 2014/11/30 [22:31]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소향은 며칠 전에 꼬무락거리며 써놓은 편지를 접어서 손에 들고 생각을 해본다. 어떻게 하면 삼천포로 부칠 수 있을까? 주소가 있어야 하는데 삼천포 포구까지만 알뿐 그것으로 편지가 갈까 의문이다. 또 공책 한 장을 뜯어서 쓰긴 했지만 봉투도 없다. 생각다 못해 편지를 손에 들고 문을 나서서 장서방을 찾아본다. 정기에서 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나서 장서방이 두 개의 양동이를 물지게에 걸치고 나오면서 소향을 보고 미소를 띤다.

 

-물지게가 아주 안성맞춤이다. 소향아. 내가 한 번 지고 오면 니가 한 서너 번 이고 오는 만큼은 될 거다. 인제 물은 내가 져다 놓을 테니 말만 해라-

걸음은 대문 쪽으로 옮기면서 등 뒤에 있는 소향에게 말을 남기는 장서방이다.

-아저씨예! 미안해서 우짭니꺼?-

인사치레를 하는 소향으로서도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다. 사실 얼마 전에 물동이와 함께 길바닥에 나뒹군 다음부터 머리 위에 물동이를 올리는 것이 더 힘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날 장서방이 그 모습을 보고 함창장에서 양철로 된 물동이를 두 개나 사왔고 또 물지게도 만들었던 모양이다.

 

-아저씨예! 잠깐만예-

거의 대문을 나설 만큼 저만치 가던 장씨를 소향은 불러 세운다.

-왜?-

-저기예. 아저씨, 편지 좀 부치주이소-

달랑 그 말만 하고는 장서방의 얼굴을 쳐다보는 소향의 손에는 종이 하나가 접힌 채 들려있다.

-편지?-

장서방은 소향의 손을 힐끔 보고는 뭔지 알겠다는 듯 웃음을 머금고

-너 글 쓸 줄 알았더냐? 대단하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편진데?-

-삼천포 엄마한테예. 근데예… 주소를 잘 모릅니더. 삼천포 장터인데예. 그라고예. 이름은 우리 막내 종락이라고 해주이소. 김종락예-

장서방이 알아주는 것에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소향은 어느새 목소리가 커져있다.

 

-음. 막내가 몇 살인데?-

-아홉 살입니더-

-그래? 음… 그러면… 너 엄마는 장터에서 뭐 하시는데?-

-어물전 한답니더-

소향의 말이 남의 얘기를 옮기듯 하는 것이 장서방의 귀에 이상하게 들린다.

-한다니? 너는 어물전 하는 것을 모르나?-

-아입니더. 압니더. 케도 한 번도 본적은 없심더. 지가 여 온 후로 하거든예-

장서방이 묻는 질문의 의도를 알아챈 소향이 고개를 숙이며 부끄럽게 대답한다. 장서방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시원하게 대답한다.

-그래, 내가 우체국에 가서 부쳐주지. 주소하고 이름도 그 정도면 됐다. 이리 내라-

내미는 장서방의 손이 물에 젖은 것을 본 소향은 자기가 쓴 소중한 편지가 젖을까봐 장서방의 웃통 주머니에 편지를 넣어준다.

-우푯값은 울맨지예? 아, 참, 아저씨예! 읽어보지 마이소! 정말로예-

장서방은 웃으며 돌아선다.

-나는 남의 편지 안 읽는다. 그리고 우푯값은 부치고 나서 내가 말해주마-

 

장서방의 마음속에 어린 아이의 이름을 적어 보내면 십중팔구 주인을 찾지 못할 것이고 또 삼천포 장터에 있는 어물전이라고만 한들 우체부가 자기 일처럼 찾아 줄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는 듯 그냥 샘터로 성큼성큼 간다.

 

소향도 시원하게 고민거리를 해결한 듯 뒤돌아서서 하늘에 남은 겨울해를 가늠하며 저녁 지을 시간을 재보는데 대문에서 누가 부른다.

-계십니꺼?-

남루한 모습의 늙은이가 지게를 지고 대문간에 서있다.

-예, 와 캅니꺼?-

집안은 절간 같다. 혼자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큰아지매가 서울 나들이를 한다고 여러 가지를 당부한 후 영감님하고 같이 집을 나선 후 소향이 혼자 집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보살님이 종가에 가서 곡식을 가져오라 하시던데-

어린 소향을 보고 노인은 말끝을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고 말을 마친다. 갑자기 곡식이라니? 소향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머뭇거리다가 아차!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엊그제 작은아지매 집에서 보살님이 동네사람들을 모아놓고 거의 하루 종일 있었던 것을 기억한 것이다.

 

-저기 담 너머 집에 가보이소. 그기 있을 낍니더-

바로 눈앞에 있어도 담에 가로막혀 있는 별채를 손으로 가리킨다. 털보무당은 돈 없는 아낙들이 들고 온 곡식들을 광수에미 집에 남겨놓고 오늘 신덕의 석수에게 지고 오라고 시킨 것이다. 남쪽으로 발을 옮기기에는 아직도 미덥지 못한 무당은 늘상 들리는 석수네 집으로 간 것이다.

 

창호어마이와 광수에미는 무당의 꼬임에 쉽게 넘어가서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할 일없이 겨울 구들만 지고 있는 아낙들을 불러 모았고 털보무당은 어눌하고 우둔하고 생각 짧은 여자들을 이리 훌쳐대고 저리 몰아세우고 혼쭐내고 치켜세우고 때론 혀를 차거나 차갑게 눈을 흘겨대기도 하면서, 부적도 팔았고 영사도 팔아서 들고 갈 수 없을 만큼 제법 잡곡들이 많이 쌓였던 것이다.

 

담을 돌아 걸어가는 석수의 등을 보면서 소향은 무당에 대한 실망감으로 쓴 입맛을 다신다. 두어 번 무당이 올 때마다 삼천포 소식을 간절히 기다렸건만 건성으로 넘어가는 대답과 또 언젠가 본 그 오뉴월 동태눈 같은 눈동자가 이제는 소향으로 하여금 큰 기대를 접게 했다.

 

아직도 한 뼘이나 남은 해로 봐서 저녁때는 이르지만 자기 대신 물을 이고 오는 장서방을 대신해 군불을 지피기로 한다.

뒷담으로 가서 장작을 한 아름 안고 우선 영감님 방부터 지필 요량으로 집 옆으로 가서 아궁이에 성냥을 그어대는데 언제 왔는지 장서방이 보고 있다.

 

-그래, 너도 불 때봐야지. 내가 없으면 너라도 해야 하니까- 하면서 지게를 진 채 연기가 아궁이 앞에 있는 소향이 쪽으로 뿜어나는 것을 보고 있다.

-첨에는 부채로 좀 부쳐라. 그래야 연기가 굴뚝으로 밀려나지. 안 그러면 계속 앞으로만 나오니 힘들 거다- 하고는 아직도 물을 져야 하는지 또 대문으로 나서버린다.

 

소향은 정기에 있는 꼬리 빠진 대부채를 찾아와서 부쳐주니 금방 불이 살아나고 연기도 나지 않았다. 따듯한 불기운에 아예 장작 하나를 밑에 깔고 소향은 퍼질러 앉는다. 탁탁 소리를 내며 장작이 벌건 불길을 내놓고 불똥이 치마에 튀어도 모른 채 하염없이 아궁이속을 쳐다보면서 아무생각도 없이 불을 쬐는데 인기척이 들린다.

 

헛기침 소리가 영감님이다. 소향은 가슴이 쿵쾅거리며 뛴다. 근 한 달여를 아무 근심이나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살았는데 아침에 큰아지매가 서울 간다고 한 후부터 심장이 답답하게 조여 오는 것이다.

치마를 털어대며 일어선 소향은 집을 돌아 마당으로 나서는데 영감은 벌써 댓돌에 신을 벗고 있다.

 

-큰아지매는 잘 가싰습니꺼?-

할 말이 마땅치 않은 소향은 그냥 인사로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한다.

건넌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태섭은 마루 중간에 선다. 그리고 돌아서서 집 앞에 펼쳐지는 겨울 저녁의 풍경을 한눈에 담으며 시원한 속내를 한껏 즐긴다.

-그래, 잘 갔다- 하고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방으로 들어간다. 태섭의 뒷모습을 보는 소향의 마음은 천근같이 무겁기만 하다. 옆방에 장씨아저씨도 있는데….

 

헉헉대는 숨소리가 물지게 양쪽에 걸린 양동이와 함께 발걸음에 맞추어 들린다. 소향은 묻지도 않은 장서방을 보고 -영감님이 들어오싰어예- 하고는 정기로 들어간다.

장서방이 물동이를 번쩍 들어 땅에 묻힌 물단지에 연이어 두 개를 들이 붓는다.

-이만 하면 됐다. 한 이틀 쓰겠다. 그런데… 소향아, 만일 내가 없는 날에는 니가 이고 와야 된다. 알았지?-

-걱정 마이소. 운제 지가 한두 번 이봤습니꺼?-

-그래, 불도 그리 알아서 때면 되고-

 

머뭇거리던 장서방이 양동이는 물단지 옆에 두고 지게만 지고 정기를 나서더니 지게를 봉당에 벗어두고 태섭을 부른다.

-오셨습니까? 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장서방은 태섭을 이름 지어 부르지 않는다. 큰아지매에게도 그렇다. 나이로 봐도 장서방은 태섭과 비슷하고 세월이 변한지라 마님이니 영감님이니 하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장서방은 그냥 용건을 앞세워서 말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들어오게나. 옷 갈아입느라고- 하면서 문을 빼꼼히 열어보며 태섭은 미처 걸치지 못한 상의에 팔을 끼운다.

재떨이와 담배가 둘의 가운데 놓여있고 장서방은 윗목에 양반다리를 틀고 앉았고 태섭은 보료를 옆에 고이고 앉았다.

-담배 태우게나-

 먼저 한 대를 입에 문 후 태섭은 담뱃갑을 장서방에게 밀어준다. 사양하는 말 대신에 장서방은 용건을 내놓는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제가 두어 달마다 한 이삼일씩 길면 사나흘씩 말미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기억하실런지- 하고 태섭의 얼굴을 빤히 보며 의중을 짐작해보려 한다.

-아!, 그 켔지. 맞다. 그래! 와?-

담배 연기를 품어대며 금방 생각난 듯 말하는 태섭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겨울이고. 또 제가 이집에 온 후로 한 번도 일을 보러 가질 못해서 설전에 한번 나들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땔나무도 넉넉히 해두었고 마땅히 거둘 일도 없고 해서 별일이 없으시면 제가 좀 다녀왔으면 합니다-

 

그래, 장서방이 그때 그랬다. 조건처럼 말할 때 며칠씩 말미를 줄 것과 사경을 나누어서 그때그때 줄 것과 덧붙여서 왜 가는지는 묻지 말라고까지 한 것이 생각난 태섭은

-음, 장씨. 어려운 일 아이다. 농사철도 아이고. 됐다. 댕기오소. 카모… 울매를?-

역시 양반 입에서 돈 얘기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태섭이 어정쩡하게 묻는다. 장서방은 간략하게 쌀 한가마 값을 요구하고 태섭도 흔쾌히 승낙한다.

 

-오늘 갈라꼬?-

태섭은 기분이 좋다. 갈려는 것을 묻는지 아니면 오늘 가라는 말인지 묻는 태섭도 잘 모르겠다. 사실 마누라도 자리를 비켜주어서 아까 대청에 서서 들판을 보면서 얼마나 속이 시원했는지 모르는데, 한 가지, 멀쩡한 남정네가 집안 한구석에서 눈코 다 뜬 채 들어앉아 있다는 게 걸리기도 했던 태섭이다.

장서방도 그런 태섭의 마음을 읽지 못할 리가 없다.

-마땅히 주문할 일이 없으시면 그래 볼까 합니다. 가기 전에 지목수도 찾아볼 일도 있고- 

일어는 섰지만 아직 방을 나서지 않은 장서방에게 태섭이 말한다.

-그카소. 좋을 대로. 이참에 넉넉하이 마음먹고 일 보고 오소. 봄 되민사 내도 가라카기 에루벌 수도 있으이- 다리를 반대로 꼬아대는 태섭의 말이 통통 튀듯이 화끈하다.

 

태섭의 헛기침이 한층 요란함을 느끼며 장서방은 문을 닫고 곧장 자신의 방으로 가서 주섬주섬 가방을 챙긴다. 지체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이참에 생각해둔 것도 곁들여 발걸음 해볼 심산이다. 챙길 것이라 해봐야 옷가지 두어 개밖에 없는 장서방이 문을 나서서 소향에게 간다고 말이라도 남기려는데 대청에 태섭이 뒷짐을 지고 앞에 있는 태봉뜰을 거나하게 보고 있다.

 

떨그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봐서 소향이 정기에 있다.

-일이 있어서 내 좀 다녀온다. 편지는 내가 꼭 부쳐주마. 며칠 걸릴 거다-

부뚜막에 올려져있는 도마에 무언가를 썰고 있던 소향은 느닷없는 장서방의 말에 손에 칼을 든 채 허리를 펴서

-와예? 오데 가십니꺼? 저녁 잡숫고 가시지예?-

-아니다. 점촌에 들릴 데도 있고.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앞말은 소향에게 뒷말은 대청에 서있는 태섭에게 인사로 남기는데 태섭이 환한 얼굴로 답한다.

-봄 되민 우째 될지 모르이. 넉넉히 일 보고 오소. 사나흘이 아이고 대여섯 날이 되더라도-

봄 되면 못갈 수도 있으리라는 말을 앞세워 이제 오육 일도 좋다는 태섭이다.

-예, 뭐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만. 그럼 갔다 오겠습니다-

깍듯이 인사말을 남기는 장서방이지만 머리를 숙이거나 허리를 숙이는 인사는 없다.

 

태섭도 소향도 대문을 나서는 장서방의 뒤를 똑같이 쳐다보지만 둘의 심정은 판연하다.

태섭은 이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없다. 자기가 들어서 정리한 일이 하나도 없는데도 어쩜 이렇게 매사가 안성맞춤처럼 되는지 기분이 날아갈 것 같지만 소향은 답답해오던 심정이 이제는 아예 꽉 막힐 지경이다. 

마루에 서있는 태섭의 얼굴도 쳐다볼 마음이 없는 소향은 그냥 정기로 들어가는데 태섭이 묻는다.

-저녁은 운제 되냐? 오늘따라 배가 고프네-

-곧 됩니더. 뜸만 들이몬 되예-

답하는 소향의 목소리가 모기소리만 하다.

 

바닷바람이 차다. 코끝이 얼얼하게 불어대는 삼천포 바람에 옷깃을 세우며 장터가 있다는 곳을 휘둘러보던 장서방은 눈에 국밥이라는 글이 눈에 띈다. 코가 매운 연탄기차를 타고 부산을 들러 다시 진주행을 타고 그리고는 중간에서 삼천포 가는 버스를 타고 하루 종일 오느라 속이 빌대로 빈 장서방은 허기가 추위를 더 몰아세운다고 생각하여 속부터 채우기로 한다.

 

장터입구의 국밥집은 여름부터 그대로 놓여있었을 들마루가 먼지로 뿌옇게 덮힌 채 입구 옆에 그대로 있다. 장이 서지 않는 날이라 그런가 아니면 늦은 오후라서 그런가 장터라는 말이 어색할 만치 사방이 조용하다. 이런 날 국밥이라도 먹을 수 있을는지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며 장서방은 문을 열고 들어선다.

-계시요?-

입을 여는 장서방과 거의 동시에 점방 안에 딸린 방문이 열리고 방바닥에 손을 댄 채 몸을 기울인 아낙이 얼굴만 내밀어 본다.

-우째요?-

국밥집에 들어온 손님 보고 어떻게 왔느냐를 묻고 있는 주인을 보고 장서방은 한심한 생각이 들지만 세상 사람이 다 자신처럼 생각하고 살지는 않겠지 하고 체념한다.

-국밥이나 한 그릇 먹을까 해서요-

장서방은 국밥집 아지매가 후덕하게도 생겼다고 생각한다.

-자실 수는 있지만… 좀 기다리시야 되는데. 끼리야 돼서. 그래도 됩니꺼? 장날이 아이라서리-

일찌감치 끊어진 손님을 빗대어 국밥집 아지매는 가마솥에서 불을 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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