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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시설의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
인천 지적장애인 의문사 사건을 접하며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황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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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발생한 지적장애인 의문사 사건을 둘러싸고, 근원적인 문제인 ‘장애인 시설화’에 대해 조명해봅니다. 필자 황지성 님은 장애여성공감 연구위원입니다. –편집자 주

 

‘장애인’이 아니라 ‘사회’에 질문을 던지자

 

최근 인천의 한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생활하던 지적장애인이 온 몸에 피멍이 든 채 의문사하면서 ‘또 다시’ 장애인시설 문제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다.

 

<도가니>의 실화인 광주인화학교(청각장애인 기숙시설) 성폭력 사건, 사회정화 차원에서 부랑자와 불구자를 퇴치하겠다며 일제히 감금 조치를 한 형제복지원 사건, 그리고 금번 시설 내 지적장애인에 대한 학대와 방치 문제 등. 조금씩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통하는 ‘시설화’(institutionalization) 문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지금 전세계 장애인 인권 옹호 진영은 장애인을 시설에 수용하는 ‘시설화’의 오랜 역사를 철폐해야 하며, 이를 위해 탈(脫)시설과 자립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더 좋은’ 시설이 필요한 게 아니라, ‘시설화’라는 방향 자체가 근본적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장애 관련 정책과 법, 정치학에 핵심적인 이슈인 것만은 분명하다.

 

장애인들의 탈(脫)시설을 논할 때 흔히 가장 먼저 제기되는 의문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자립 생활을 할 수 있겠냐는 적격성 문제일 때가 많다. 또, 장애인이 가정이나 지역 사회에서 학대와 폭력에 노출되기 쉽기 때문에,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시설이 필요한 것 아니냐는 반론도 제기된다. 이들이 이렇게 학대와 차별을 당하기 쉽다는 사실이야말로, 장애인에게 시설이 필요한 근거가 되어주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따라서 시설 수용 위주 정책을 해체한다는 것은, 장애인이 아닌 ‘사회’에 먼저 도전적 질문을 던지는 일이어야 한다. 장애인을 시설에 수용하여 ‘격리’시키는 방식이 아닌 ‘사회통합’ 정책을 편다고 할 때, 바로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는 비단 법과 제도의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이 현재와 미래에 대해 어떤 상상을 하고 어떤 종류의 희망을 품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이것이 장애인 탈시설의 실질적 가능성을 논할 첫걸음이다.

 

‘평균’, ‘보통’이라는 기준의 위력

 

기실 장애운동은 ‘장애가 문제가 아니라, 장애에 대한 사회적 처우가 장애를 만들어낸다’고 오랜 시간 주장해왔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접근하면, 오히려 ‘몸’에 대한 특정한 규정이나 인식, 그리고 범주화 자체가 이미 사회정치적 문제라는 사실이 은폐되곤 한다.

 

우리가 사는 규범의 세계 속에서 자발적이든 타의에 의해서든 누구나 특정한 능력이나 특정한 신체 조건, 그리고 특정한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추동을 당한다. 규범은 ‘평범함’이라든지 ‘평균’ 혹은 ‘보통사람’ 같은 말로 포장돼, 마치 대다수가 여기 속하는 것 같은 착각을 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실상은 모두 다 ‘다른’ 능력과 삶의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한 규범을 통해 서열화되고, 낙인 찍히거나 배제를 당하는 기준이 된다.

 

평범함(normal)은 규범(norm)이다. 장애, 성별, 외모, 피부 색깔 같은 신체의 차이부터 경제 수준, 나이, 학벌 등 우리의 일상을 촘촘히 에워싸고 있는 기준들은 거기서 벗어나 경계/주변의 대열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열등’ 혹은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동시에 내가 언제 그와 같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늘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세계에서 장애나 질병이 있는 몸, 나이 든 몸이나 의존하는 몸은 개인의 선택이나 끝없는 노력으로 제거되거나 은폐되어야 하는 것이다.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욕망

 

마이클 샌델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The Case Against Perfection)

얼마 전 한국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로 돌풍을 일으키며 이름을 알린 마이클 샌델은 그의 또 다른 책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동녘, 2010)에서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무한경쟁의 현대 사회에서 각종 자기계발 노력을 통해서는 물론, 기술을 이용해 미래 세대를 유전학적으로 완벽하게 만들려는 인간의 욕망은 어떤 윤리적 함의를 가지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는 “자유”, 개인주의를 기치로 하는 세계에서 오늘날 새로운 형태의 “우생학”(eugenics. 인류를 유전적으로 개량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은 결코 거부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며, 오히려 웰빙,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개인의 의무가 되는 문화에서 강제적 성격마저 띠게 될 거라고 지적한다.

 

현대의 우생학은 과거처럼 국가에 의해 법으로 강제되지는 않을지언정 개개인들의 출산 관행을 포함하여 건강, 교육, 사회 복지 등 전반에 대한 인식과 관행을 전혀 새롭게 구성해낸다. 거기에 더하여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에 따라 복지, 공공성이 축소되면서 적자생존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가 개개인에게 ‘자기 구제’라는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우생학의 기원은 유전적이고 신체인 특질에 기반한 ‘적자생존’ 그리고 인간 ‘종’ 개량을 통한 발전론으로 요약될 수 있다. 유럽의 근대 국민국가 형성기인 18세기경에 태동해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우생학은 유럽 백인 인종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인종적 오염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로, 이주민과의 결혼을 금지하고, 단종법(열등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의 생식 능력을 없애는 일)을 실시하고, 이주를 금지하는 정책 등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식민지 통치 방식과 유사하게 당대 우생학자들은 장애인이나 질환을 가진 사람들을 포함한 ‘비정상’ 집단을 관리했다. 피부 색깔뿐 아니라, 남/녀 이분법에 따른 신체의 차이(여자의 몸/ 남자의 몸에 들어맞지 않는 몸)나 몸의 손상 등 당대 지배 규범에 벗어난 모든 신체적 차이는 ‘사회를 위해’ 관리되거나 추방되어야 할 것이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에서 유행했던 볼거리 문화인 ‘기형쇼’(freak show)는 백인이 아닌 인종과 장애인 등 신체적으로 당대 규범에서 벗어난 몸들을 구경 거리로 전시한 것이다. 여기에는 제국주의와 인종주의, 그리고 몸의 정상성에 대한 욕망이 한데 뒤섞여, ‘규범적 몸’과 여기서 벗어난 ‘열등한 몸’을 분리해내고 낙인 찍는 우생사상의 작품이었다. (Lennard Davis. 1995)

 

이처럼 비(非)규범적 몸에 행해진 단종(생식 능력을 빼앗음), 격리, 기형쇼 등은 당연히 오늘날 그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장애인 시설로 대표되는 ‘비정상’ 몸의 사회적 격리와 시설의 인권 침해 사건들은 과거의 우생학 실천을 비추는 거울이다.

 

비(非)규범적 몸들에서 나오는 증언이 공유되길

 

장애인 시설화와 배제, 차별에 대한 장애운동의 저항 논리는 ‘차이/다양성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차이/다양성 그 자체의 정치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갈 필요가 있다. 장애인의 ‘차이’와 장애인의 ‘다양성’이 인정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욕망하는 ‘규범’과 ‘평범함’, 그리고 ‘정상성’에 대한 치열한 논쟁과 비판이 필요하다.

 

또한 우생학, 비(非)규범적 몸들에 대한 격리와 의료적으로 극복(예를 들어 태아 산전 진단과 낙태)하도록 부추기는 추세를 비판하는 것이, “생명의 윤리”와 같은 추상적이고 자칫 보수적인 담론에 포섭되지 않도록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이다.

 

결국, 필요한 것은 ‘그들’의 구체적 일상과 현실로 더 깊게 들어가려는 노력이다. 장애, 질병, 의존성처럼 ‘독립적 개인’이라는 근대적 이상에 맞지 않는 몸들에게서 나오는 증언과 경험이 공유되어야 한다. 이로써 그들이 함께 하는 현재와 미래를 구상하는 것. 이는 장애인 뿐 아니라 여성에게, 아동에게, 노인에게, 이주민에게, 그리고 결국 비장애인 모두에게 가치 있고 생산적인 작업이다.

 

“만일 장애를 가치 있는 가능성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장애인이 비장애인은 가지지 못하고 접근할 수 없는 경험과 지식을 갖는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이러한 지식에는 고통 받는 몸으로 사는 방법에 관한 것이 있고,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매우 실제적이고 중요한 지식이다. (…) 그 지식은 우리 문화를 확장시키며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수전 웬델 <거부당한 몸: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그린비, 2013)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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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3/07 [18:31]  최종편집: ⓒ 일다
 
일상의 회복 15/03/20 [01:28] 수정 삭제  
  초등학생 때, 외국 영화 드라마에서는 종종 보는 휠체어를 타고 운동장에서 함께 농구도 하는 학생들이 한국에는 없는걸까?
좀더 자라서는, 한국남자들은 친자식 육아도 뜨악해하면서 복지재단 남자원장들은 왜 이리도 많은걸까?
이런 의문들은 '형제복지원'에서 소설 영화 '도가니'에 이르러 공론화되기까지 늘 의뭉스럽기만했지요.

기득권 지배계층인 경박한 인성 소시오패스들이 자기들 눈에 안띄게 하려고,
끔찍하게 공감무능력인 소시오패스들에게 '수용소 관리 운영' 역할을 맡겨온 한국이지요.
민주주의국가들의 교육환경 사회환경에 대한 소식을 들을때면 한국의 현실과 비교돼서 너무나 괴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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