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제를 앞둔 종갓집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87화

김담 | 기사입력 2015/03/10 [10:44]

태봉제를 앞둔 종갓집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87화

김담 | 입력 : 2015/03/10 [10:44]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태섭은 아직 햇빛이 남아있는 뒷산 길을 걸어 점촌으로 가고 있다. 해거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갈 때지만 오늘 태섭은 집에만 있기에는 너무 기분이 좋다. 봄이 지척이고 또 이왕 작정하고 나선 일이라 선거운동도 늦출 수는 없다. 설이 지나고 보니 참의원선거가 코앞같이 느껴진다. 민의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강호식은 자유당 이박사를 등에 업고 반석 위에 있겠다. 자신도 그 좋다는 정치를 꼭 해서 그 잘난 종친회장이 아니라 의원이라는 이름을 달고야 말겠다. 그러면? 감히 누가 자신을 보고 끈 떨어진 갓을 썼다고 하겠나?

 

하지만 오늘 점촌에 가는 것은 사실 그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저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아서다. 천하를 얻은 기분이 이런 걸까? 잠자코 집에서 지내기에는 마음이 콩밭에 있는 듯하여 해는 가물거리지만 길을 나섰다. 

관동장에 가는 발걸음은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다. 아예 대문이 활짝 열려있는 기생집이다. 인근에는 이만한 사교장이 없다. 예전 어느 고택을 술집으로 만들어서인지 그 위용이 과히 들어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뒷짐을 지고 배를 불쑥 내밀어 골 깊은 목소리로 주인장을 불러대기에 딱 어울리는 그런 와옥이다.

 

-여보게!-

과연 태섭은 손을 허리 뒤에 모아 뒷짐을 지고 안에다 대고 호기 있게 그러나 적당히 낮은 목소리로 부른다. 아직 어둡지도 않은 초저녁이라 기생집 출입은 이른 시간이다.

-아이구! 이게 누구신가? 어른이 우짠 일로 소식도 없씨 오십니꺼?-

치마 한 자락을 움켜잡고 뽀얗게 분칠을 한 여인이 호들갑을 떨며 마루로 나온다. 이 집의 주인이다. 퇴기는 아니지만 퇴기만큼의 나이를 얼굴에 달고 있다.

-그래! 설도 잘 쉬고?-

태섭도 요정에 온 게 얼마만인지 모를 지경이다. 지난해 민의원선거 때 하루가 멀다 하고 들락거렸지만 그 뒤에는 방석 위에 앉아 보료를 팔꿈치에 댈 일이 없었다.

-안 그래도 우째 영감님이 안 오시나 했심더. 한참 됐지예?-

주인여자는 태섭의 한쪽 팔을 잡아 방으로 이끌면서 은근히 몸을 밀착시킨다. 태섭의 코끝에 닿는 분향이 그저 감미롭다. 참으로 오랜만에 맡아보는 향기다.

 

-자네, 전화 좀 돌리게. 내 오늘 새해 된 뒤로 보지 못한 사람들과 한잔 할 참이다-

-누구한테예?-

전화가 귀하디귀한 시대이지만 요정에 전화 한 대가 없다면 점촌 제일의 관동장이겠는가? 우체국장 정도 주물러주고 서장이나 의원에게 콧소리 맹맹 대면 이튿날 전화를 달아주는 시대이다.

-아! 누구긴 누구? 경찰서장하고, 군수영감, 세무서장 그 카고… 의원님이 내리오싰나? 강호식의원 집에도 해보고. 또-

태섭은 머릿속으로 그 많은 사람들 중 누굴 고를까 생각하다가 -청년회장이 요새 누고?- 주인에게 물어본다. 그래도 힘깨나 쓰고 머리에 지식도 들어있는 청년회가 지역에는 활동이 많은 탓이다. 

-모리겠네예. 지는 그저 오시면 다 사장님, 회장님하고 부르다 보이 실은 누가 무신 회장이고 사장인지는 잘 모립니더- 하고 배식배식 웃으며 태섭을 바라본다.

-우짜든지 오늘 귀한 손님들 자리가 될 기다! 아아들도 좋은 아아들로 들이고. 알았제? 퍼뜩 전화나 해라-

 

잠시 후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젊은 여자가 작은 소반을 들고 들어왔다. 문간에 상을 놓고 뒤로 돌아서서 문을 닫은 후 다시 상을 들고 두어 발자국 태섭이 앞으로 온 후 상을 무릎 앞에 놓고 뒷걸음질 치는 모습이 태섭을 군침 돌게 만든다. 손님을 기다리는 동안 입가심으로 할 소찬 상을 들인 것이다.

-니! 그 좀 앉거라! 온 김에 잔에 술을 따라야 안 되나?-

여인은 젊다기보다 차라리 어리다는 게 옳은 표현일 정도로 뽀송뽀송한 얼굴이다. 잘 되야 열여섯이나 일곱쯤일까? 

색시는 치마를 접어 무릎위에 포개올린 후 내려앉고 백자 주전자를 들어 태섭이 앞에 내민다. 잔을 들어라는 것이다. 하지만 태섭은 색시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멍한 표정으로 넋을 잃고 있다. 어디서 솟아오르는지 모를 육심이 주체가 안 되는 날이다.

-어! 그래!- 하고 정신을 차린 태섭이 장종지만한 잔을 들자 색시가 비로소 따르고 태섭은 그냥 꼴깍 하고 입에 털어 넣는다. 오늘은 작심하고 요정에 왔으니 역시 작심하고 회포를 풀어볼 요량이라 미리 담금질하듯 한 잔 한다.

 

미닫이문이 열리더니 주인여자가 들어오며 입가에 미소를 함박 머금는다.

-다 돌맀심더. 좀 있으면 연락이 올낍니더!- 하고 태섭이 앉은 옆에 바짝 붙어 앉는다.

-벌써? 온다 카더나? 누가?-

-아이고예. 교환한테 말해놨다는 말입니더. 가들이 다 알아서 합니더-

시내에 전화라곤 사실 몇 대 되지도 않는 탓에 우체국 교환들이 유지들이 어디서 뭘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시대다. 요정에서 관사나 집에 전화를 할 수는 없지만 교환들이 전화를 연결해주는 사이에 잠깐씩 말을 흘려서 누가 찾는다고 하든지 또는 누가 어디에 있는지도 한눈에 꿰고 있으니 교환을 삶아놓은 주인은 그것을 십분 활용한다.

 

요정에서 누가 찾는다는 말을 기피할 남정네는 아무도 없다. 그것도 좁은 지역유지들 사이에 공술 먹는 것도 좋은데 더군다나 요정이라면 아리따운 색시를 옆에 앉히고 먹는 술 아닌가? 역시나 잠시 후 주인은 들락거리기를 몇 번 한 후 태섭이에게

-오신다꼬 했심더! 서장님, 조합장님 군수영감. 쿤데… 의원님은 여태 연락이 없심더. 좀 기대리보이소. 오겠지예 뭐!-

-그래! 됐다! 니는 상이나 잘 봐라 오늘! 카고… 야는 이름이 뭐꼬?-

태섭은 이름보다 나이가 알고 싶지만 그냥 이름으로 물음을 대신한다. 야들거리는 자태가 콱 물어주고플만큼 싱그럽지만 일단을 점잔을 빼고 본다.

-야는 온 지 울매 안 되는 아라서 아무 것도 모립니더-

물어본 이름보다 엉뚱한 대답으로 대신하는 주인은 몸을 꼬아대며 태섭의 한쪽 팔을 쳐댄다.

-모릴 건 또 뭐 있노? 내가 갈치주모 되지! 안 글나? -

태섭은 상 앞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어린 색시에게 물어보듯 말한다.

 

제일 먼저 달려온 것이 문경경찰서장이다. 옆 동네 상주서장한테 들은 말이 있어서다. 서울본부에 어마어마한 백이 있다는 것은 지역서장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엄청난 사실이기 때문이다.

-회장님이 다 불러주시고… 잘 지내싰습니꺼?-

평소와는 다른 살가운 인사말이다. 태섭은 순간 의아했지만 금방 알아차린다. 관료들 사이에 전해지는 말이 번개처럼 퍼지지 않는가? 누가 누구 끄나풀이고 누구는 누구 백이고 누구 등에 업혀있고 하는 것들이 난무하는 세상이라 백 없고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만 그것들을 가진 사람들을 떠받치고 사는 세상꼴인 것이다.

하지만 태섭은 속으로는 갑갑한 그 풀지 못한 의문 때문에 계면쩍지만 내색 없이 넘어간다. 까짓 내 입으로 말하지 않은 이상 자기들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예, 어서 오이소. 서장님! 봄도 됐고 해서… 좋은 말씸이라도 들을라고 모싰습니더- 

자리에서 떼었던 엉덩이를 도로 내리며 서장과 거의 같은 시간에 앉는다. 그리고 옆에 있던 주인여자를 거의 흘겨보듯 하며

-자네는 뭐하나? 서장님 잔을 챙기든가 안 하고?-

-아따~ 회장님! 아직은 긴 밤이 남았는데 뭐한다꼬 그리 서두릅니까? 이따 상이 들어오민사… 오죽 할까봐서예?-

주인여자는 오히려 태섭을 흘겨보며 타박을 한다. 한참 상을 마련하는 중이니 조금 기다리라는 말이다. 목구멍에 기다리는 단술이 있는 판에 지체할 놈들이 없고 여린 치마자락이 휘청거리는 기생술판이 눈에 아롱거리는데 몸이 달지 않을 놈이 없다. 얼마 안 가서 지역의 유지들이란 작자들이 모두 모였지만 민의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강의원은 요새 한양에 계신갑지?-

누군가 강의원이 안 보이는 것을 확인한 모양이다.

-요새 울매나 시끄럽소? 그 카이 오데 서울을 떠나겠소? 이박사 옆에서 딱 붙어있어야지!- 

그렇다. 시절이 하 수상한 것이 온통 천지를 뒤덮은 듯하다. 연일 이어지는 데모가 서울거리를 뒤덮고 무슨 단체가 그리 많은지 일반 사람들은 그 단체들이 뭐하는 단체인지도 모른 채 돈 몇 푼 주면 깃발 들고 따라나서는 것이다. 좌익은 좌익대로 우익은 우익대로 청년단체는 또 그들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다 시시각각 다른 구호를 내걸고 시커먼 고무신을 끌고 거리를 배회하는 중이다. 이박사가 정말 독재자인지도 모른다. 이쪽에서 그렇다 하면 오늘은 그런 것이고 또 다른 쪽에서 아니다 하면 내일은 아닌 것이다. 재건, 민주 민족 평화 가 난무하는 사이에 굶거나 추운 사람들만 죽어나가는 세상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이 불평등이거나 불합리한 것이라고 눈뜨고 보지 않고 오히려 더 큰 백을 구하려 돈다발을 싸들거나 연줄을 대느라고 사돈의 팔촌까지 팔아대며 대갓집 문전을 드나든다. 

-자!자! 한양은 한양이고! 여는 여지! 우리는 그저 지역을 위해 일하모 되는 것 아입니꺼? 너거 뭐 하노? 술 안 따르고?-

기생들에게 역정을 내다시피 하며 태섭은 좌중의 흥을 돋운다. 사실 오늘밤은 자신의 흥을 돋우고 싶은 마음뿐이다. 옆에 앉아있는 그 숫처녀라는 아이를 오늘밤에는 기어이 품을 마음에 벌써 군침부터 흘리는 중이다.

 

*    *    *

 

며칠 남지 않은 태봉제 때문에 오늘아침에 광수에미는 일찌감치 머리를 빗어넘기고 공단 두루마기를 꺼내 입고 장에 갈 차비를 한다. 제수를 마련하는 것도 광수에미에게는 그렇게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어서다. 바로 돈쓰는 일이기 때문이다. 흥정도 흥정이지만 무엇보다도 굽실거리는 장사치들 앞에서 콧대 세워 이러고저러고 하대를 해대며 장서방의 지게 위에 물건을 올리는 것이 그렇게 재미난 것이다.

 

마루로 나서자 아침 햇살에 느긋이 담배를 피우고 마당에 서있던 태광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마누라를 보고 한마디 한다.

-니 오데 가노?-

차림새로 보아 나들이 차림새가 분명해서다.

-태봉제 때문에 제수 사러 장에 갑니더- 하고 마루에 앉아 고무신을 들고 걸레로 이리저리 닦아내며 못마땅한 표정이다.

-그 좋다는 가죽 구두 하나 없노? 내 신세는!-

그리고는 고무신을 봉당에 툭 던지고는 코를 꿴다.

-그래? 음. 내도 가자. 장도 구경할 겸-

-당신은 모한다꼬? 가봐야 술만 무울 낀데? 고마 논에 거름이라도 한 짐 더 내소. 내 퍼떡 댕기올 거구만!-

 

함창 장날이다. 태광을 잘 아는 마누라는 태광을 대동하고 가는 것이 싫다. 여자는 또 고주망태가 되기 일쑤이고 잘못하면 주먹이 날아오는 주태가 벌어지기 십상인 서방과 같이 갈 수는 없다는 입장이고, 태광이도 아직 농사일을 한참이나 남겨놓은 지금 장을 핑계 삼아 목이라도 씻을 수 있는데 그냥 물러설 수는 없다. 

-내가 니 따라댕기민서 제수나 챙기고 하모 되제-

-아 놔! 됐소! 제수는 장서방이 지고 댕길 끼고 내도 금방 올낍니더. 이따가 보살님이 태식이 아재하고 만난다꼬 올끼고. 내도 바쁩니더. 당신 술 챈 거 치다거리할 여가 없으이. 고마 집에 있으소-

핀잔이 대단한 마누라를 힐끔거리며 태광은 -이기 아침부터 내보고 술타령을 하노?- 눈을 흘겨대며 마누라를 보지만 속으로 하긴! 괜히 술 먹을 일만 만들 것고, 또 장에 어슬렁거려보았자 마땅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겠다, 고만 마음을 접는다.

 

-소향아! 니도 장에 갈래?-

솟을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소향의 방문에 대고 크게 부른다. 소향은 방문도 열지 않고 답한다. 아마도 몸이 무겁긴 무거운 모양이다.

-언지예. 지는 고마 집에 있을랍니더. 댕기 오이소-

-그 칼래? 오야! 장서방! 오데 있능교?-

돈이 허리춤에 들어서인지 광수에미의 목소리가 우렁차다. 뒷단에서 일을 하던 장서방이 대답 없이 걸어 나온다.

-장씨 아저씨. 지캉 장에 퍼떡 갔다 오입시더. 태봉제에 올릴 기 많심니더-

장서방은 아무 말도 없이 지게를 어깨에 올리고 광수에미를 따라 나선다.

 

춘삼월 날씨가 만물을 깨우고 있다. 빛이 그저 나는 게 아니라 쏟아지고 있다. 장서방은 눈을 지그시 감고 무념의 상념으로 길을 걷는다. 신작로는 먼 까닭에 뒷동산을 돌아 짧은 길로 함창에 다닌 것이 동네사람들이다. 앞서서 걷는 광수에미를 저만치 세우고 서두를 것도 없이 걷는 성큼걸음이지만 종종거리는 광수에미를 충분히 따라 잡는다.

 

그런데 묘지들이 즐비한 모퉁이 저만치에서 비명이 아닌 신음소리가 들린다. 분명히 사람목소리다. 어찌 광수에미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는지 두 팔을 휘둘러대며 저만치 가고 있다.

장서방은 걸음을 멈추고 사람 신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묘지 쪽을 향해 걸음을 조심스레 옮긴다. 시야가 묘지 너머를 지나치자 얼굴을 땅에 박고 신음하고 있는 게 사람이다. 

지게를 후딱 벗어던지고 장서방은 급히 쓰러져있는 사람을 흔들어보지만 신음만 할뿐 반응이 없다. 몸을 돌려 얼굴을 보았지만 아는 사람도 아니다. 본적이 없다. 우선 저만치 가고 있는 광수에미를 크게 부른다.

-광수 어머니! 광수 어머니!-

그제야 광수에미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장서방 쪽을 보고 장씨는 이제는 손짓으로 오라는 시늉을 하자 광수에미가 걸어 내려온다.

-사람이 다친 모양입니다-

돌려 뉘인 사람은 다름 아닌 창호아바이였다. 하지만 장씨는 창호아바이를 들어는 봤지만 눈으로 만난 적이 없기에 그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기 누고? 창호 아바이네. 우짠 일이고 이기?-

놀란 광수에미는 입가에 피를 흘리고 누워있는 창호아바이를 보며 어쩔 줄을 모른다. 그가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지 아까운 사람이어서는 아니다.

-광수 어머니, 제가 업고 가도록 등에다 좀 업혀주시지요. 무슨 일인지는 나중이고 인사불성이니 빨리 병원에 가야지요, 자!- 하고 축 늘어진 창호아바이를 부축해 세우고 광수에미는 창호아바이의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장서방이 등을 대도록 지탱하여 겨우 장서방의 등에 올렸다.

-지게는 우짜지예?-

장씨가 벗어던진 지게가 묘 둥지 옆에 나뒹굴어 있으니 난감한 광수에미가 묻는다.

-그냥 그 놔두지요. 나중에 제가 오드라도-

 

장서방은 뒤도 안보고 추석거리며 걷는다. 지고 올 짐이 한둘이 아닌데 지게도 없이 어떻게 장을 본단 말인가? 또 장서방이 다시 여기까지 왔다 가면 시간은 또 얼마나 더 걸릴 것인가? 점심 전에 돌아와야 보살님하고 만나서 태봉제에 관해 말을 주고받을 텐데. 광수에미는 머뭇거리다가 다짜고짜 지게를 등에 둘러맨다. 생후 처음 져보는 지게다. 두루마기를 모처럼 차려입었다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지게를 지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질만 했는데 빈 지게지만 한참을 헉헉거리며 장씨를 좇아가다보니 지게만으로도 마치 천근처럼 느껴진다. 또 어깨 위에 걸린 멜빵이 왜 그리 살을 파고드는지 따가워지기 시작한다.

함창이 다 와가자 광수에미는 지쳤다. 공단두루마기고 뭐고 입에서 내뿜는 단내를 피워대며 땅에 털썩 주저앉아서 저만치 창호아바이를 들쳐 업고 병원 안으로 들어가는 장서방을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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