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에는 민감해도 성폭력은 ‘패스’

<초딩아들, 영어보다 성교육> 3. 성폭력은 오직 딸 문제?

김서화 | 기사입력 2015/03/15 [21:00]

폭력에는 민감해도 성폭력은 ‘패스’

<초딩아들, 영어보다 성교육> 3. 성폭력은 오직 딸 문제?

김서화 | 입력 : 2015/03/15 [21:00]

‘아들 키우는 엄마’가 쓰는 초등학생 성교육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필자 김서화 씨는 초딩아들의 정신세계와 생태를 관찰, 탐구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편집자 주]

 

‘싸우며’ 노는 남자아이들

 

한 녀석이 어떤 녀석을 가리키며 “이젠 얘가 나쁜 놈이야” 하고 ‘선언’하면 한 무리의 남자아이들은 ‘정의의 사도’가 되거나 ‘이순신’이 되어 우르르, ‘나쁜 놈’을 향해 막대기를 휘두르거나 발길질을 한다. 그게 놀이란다.

 

친구를 때리거나 위협하는 건 절대 놀이가 될 수 없어, 지금 너네가 하는 행동이 나쁜 거야. “아니 지금 ‘쟤가’ 나쁜 놈이라구요.” 얘야, 그 말이 아니잖니. 그토록 폭력은 나쁜 거라고 알려주었건만 왜 그러고 노니? 그래 봤자 그건 그냥 엄마들 잔소리다. “아, 쟤가 지금 악당인데. 우린 그냥 악당을 물리치는 거라고요. 폭력은 악당이 하는 거지. 왜 저한테 그래요.” 에구구 이거 뭐 대화가 돼야 말이지.

 

일단 떼어놓고 설명하려 치면 매번 노는 애들 방해한 꼴만 되고, 놀이가 갑자기 중단된 녀석들은 그저 뾰로통. 고민을 어찌나 많이 했는지 모르겠다. 레고를 해도 완성하면 악당놀이, 그림을 그리다가도 스케치북에 악당놀이, 배드민턴처럼 막대기 비슷한 것만 있어도 악당놀이. 급식을 먹다가도 숟가락으로 악당놀이, 쉬는 시간이면 런닝맨형 악당놀이, 기승전 악당놀이에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로 끝나는 아들의 창의력 없는 레퍼토리라니.

 

2학년 되고, 3학년 되니 그런 식으로 무지막지하게 노는 경우는 줄었지만 여전히 남아들은 정말 ‘싸우며’ 논다. 애들이 이러다 보니 아들엄마들은 아이들이 놀 때 굉장히 신경을 쓰는 편이다. 실제 딸엄마들보다 아이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놀이에 개입하는 일이 많다. 사실 안 좋은 방식인 걸 알면서도 막상 눈앞에서 보면 별수 없을 때가 많더라. 그래도 일단 서로 ‘치고 박는’ 것은 막아야 하니까.

 

특히 저학년일수록 심하다. 친구를 때리거나 욕설을 하는 경우, 열심히 전화하고 문의하고 상담하는 경향도 있다. 절대 아이들끼리 문제를 해결하도록 내버려두려는 부모가 대세는 아닌 시대다. 아무래도 학교폭력에 대한 걱정 때문이리라.

 

성폭력 문제, ‘해당 사항 없음’

 

“폭력!” 요즘 엄마들에게나, 아이들에게나 이 단어는 흔한 말이다. 여러 이유로 요새 아이들은 ‘폭력’이라는 단어를 정말 쉽고 가깝게 알고 있다. 그들의 행동거지와는 상관없이. 또 엄마들은 아이들끼리의 사소한 다툼에서부터 각종 괴롭힘까지 일명 ‘폭력’ 전반에 예민하다. 아이의 사회생활에 있어 이는 진심으로 첨예한 것이 되었다.

 

덕분에 나는 한 가지 큰 착각을 했다. 아들엄마들이 폭력에 그토록 민감한 만큼 성폭력에 대해서 역시 유사할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막상 내가 목격한 것은 무관심이라고 칭해도 될 만한 것들뿐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이기적이고, 제 자식만 생각하는 엄마나 그렇다고? 아니다! 나 스스로도 마음 깊은 곳에 ‘아들이라 조금은 안심’이라는 맘을 거주시키고 있다. 그런 맘이 없다는 게 거짓말일 것이다. 엄마로 대변되는 주 양육자를 비롯해 모든 사람, 모든 교육, 모든 제도들이 성폭력 문제에 있어 ‘아들은 그나마 안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하! 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의 어린이 체험형 참여 프로그램(성교육) 중에서. © 아하! 청소년성문화센터

섣부른 직감이지만, 심지어 이 시기 아이들을 아들이거나 딸이게 하는 것은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담론이 아닐까 생각도 해봤다. 아들은 왜 아들이고, 딸은 왜 딸일까? 염색체? 세포? 호르몬? 성기관의 생김새? 뭐가 되든 2차 성징도 시작하지 않은 초등 저학년, 이 아이들을 남녀 둘로 가르는 건 그들의 몸이라기보다는 어떤 몸이 되어야 하는지 말해주는 각종 성적 담론들이다.

 

그 중에서도 성폭력 담론은 매우 명백하고 뚜렷하게 다른 말을 전한다. 아들과 딸을 이열종대로 세우는 기준은 성폭력 문제를 두고 가장 명백해 보인다. 그 말들이 그려낸 이미지에 따라 딸은 딸이 된다.

 

다소 단순하게 말하자면, 성폭력의 잠재적 피해자라고 여겨지면 딸이다. 이열종대 중 한쪽의 몽타주! 여기서 나는 딸이 어떻게 여성이 되는지 구구절절 읊지 않고 싶다. 너무 익숙해 지겨우니 말이다. 다만 변함없이, 일단 본인이 조심하고 봐야지 하는 생각들은 21세기에도 지배적이다.

 

그럼 다른 쪽의 몽타주는 뭘까? 기계적 대칭에 따라 잠재적 가해자? 착각 중의 착각이다. 현실은 ‘해당사항 없음’, ‘그런 단어와는 무관함’이다. 다른 쪽은 몽타주 자체가 없다. 이게 진심으로 놀라운 점이다. 아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상상하는 엄마는 보지 못했다. 그럼, 아들 역시 잠재적 피해자로 볼까? 유괴를 걱정하기는 해도 초등아들의 ‘성’문제를 일상적으로 걱정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기껏해야 아들의 자위는 자연스러운 거라든지, 포르노를 보면 어찌할 것인가 하는 고민 정도랄까.

 

아래 대화를 잠깐 보자.

 

① “사건 나면 우리 애는 인생 완전히 망하는 거잖아. 엄청 두렵지.”

② “걱정은 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애가 직접적으로 피해 입는 건 아니니까.”

 

성폭력 사건이 기사화되거나 집으로 성범죄자 신상 공개서라도 날아오는 날이면 엄마들의 수다는 길어진다. 흔히 딸엄마들은 ①번처럼 말을 한다. “무서워 미치겠어”, “왜이리 미친놈이 많아”, “애 혼자 돌아다니게 못하겠어, “딸 어떻게 키우라는 거야?” 등등.

 

반면 아들 입장의 엄마들은 ①번처럼 말하지만 ②번처럼 생각한다. 실로 생각만 한다. 혹은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생각한다. 사건의 심각성을 모르는 바가 아니기에 ‘말’로는 전해지지 않을 뿐이다. 딸엄마들이 두려움과 불안에 곧장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대책들을 고민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아주 작정하고 인터뷰를 해야만 아들엄마들의 속내를 좀 엿볼 수 있다.

 

남아들의 행태 때문에라도 폭력 문제에 유독 민감한 게 아들엄마들인데, 성폭력 문제는 지나칠 정도로 ‘패스’하는 경향이 있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진심으로 관심의 영역에서 비껴져 있다. 순진하고도 솔직한 반응이다.

 

‘내 아이의 일은 아닌 것’ 같은 이유

 

친구나 주변 학부모들과도 이야기를 해보고, 프로젝트를 걸치고 심층 인터뷰도 해본 적이 있다. 성폭력 사안에 대한 아들엄마들의 생각은 꽤나 일반적이었다. 심히 걱정되나 그 걱정은 구체적이기보다 모호하고, 아이 양육에 있어 성폭력 불안이란 그다지 큰 사안이 아니다. 무엇보다 딸엄마들에 비하면 명백히 낮은 불안을 가지고 있는 경향을 보인다. 아들엄마들에게 성폭력 뉴스는 무섭고 걱정되는 일이지만, ‘내 아이의 일은 아닌 것 같은’ 뉴스이다.

 

물어봤다. 왜 덜 불안한지. 혹 딸 키우면 어떨 것 같은지 묻거나, 남매를 키우는 분들에게 딸 생각할 때와 아들일 때가 다른지 물었다. 한결같이 “아무래도 딸이 더 걱정이지. 왜 아니겠어. 세상이 무서운데.” 몇몇은 그게 물어 볼 거리가 되는가 하는 의아함까지 보였다. 즉, 당연한 거 아니냐는 반응.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보채면 ‘어쨌든 남자잖아’ 라는 말이 마지막 종착지가 되었다.

 

어쨌든 남자. 어쨌든 남자라! “그게 왜요?” 그 다음은 대화를 이어가기 힘들 정도가 된다. “어어… 왜냐고? 왤까?” 그러면서 잠시 침묵. 어색함. ‘당연하지 뭘 물어’하는 반응, 뒤통수를 맞은 듯 충격을 받는 이, 스스로에게 ‘왜 그랬을까?’ 하고 자문하는 유형, 귀찮은 듯 ‘모르겠네’ 하고 마는 사람 등. 다양하지만 모두들 이런 질문 자체를 받은 적이 없어서 당황했다. 본인도 본인이 그런 차이를 두고 생각하고 있는지 처음 직면하는 경우가 많았다. 스스로에게 어떻게든 설명을 해보려는 몇몇을 통해 간신히 들은 단어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직접적 피해’였다.

 

직접적 피해란 뭘 말하는 걸까. 그렇다, 우리가 상상하는 그것들 때문일 것이다. 성폭력이란 게 바로 그것이니까. 직접적 피해라는 말은 사실이다. 성적 관계와 그 우연적 결과들, 예를 들어 임신과 출산과 같은 사건을 온몸으로 치르는 것은 여성의 몸이다. 이를 폭력으로 경험하게 될 경우 그 피해는 여성에게 실로 직접적이고도 치명적이다. 남자아들은 그런 면에서 직접적 피해를 당할 일은 없다.

 

하지만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기도 하다. 성적인 것이 어찌 임신과 출산으로 수렴된단 말인가. 인간과 또 다른 인간의 몸이 만나고, 그 몸들에 역사를 만들고, 그 몸으로 소통하고 감정을 전하고, 그게 성적 관계이다. 그런 관계를 폭력적으로 경험한다면 남자 또한 직접적 피해를 입는다.

 

어찌 아니겠는가. 성폭력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공간 그 자체에 대한 침범이고, 그래서 어떤 범죄보다도 ‘직접적’인 상흔을 남긴다. 단지 어떤 ‘성별’을 농락하는데 그 가혹함이 있지 않다. 그 가혹함이 성별이나 나이나, 성적 취향에 따라 구분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왜 아들에게는 직접적 피해가 없다고 죄다 생각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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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존 2015/03/17 [21:29] 수정 | 삭제
  • 위 글 중 "...이 아이들을 남녀 둘로 가르는 건 그들의 몸이라기보다는 어떤 몸이 되어야 하는지 말해주는 각종 성적 담론들이다..."
    한국은 이 문제를 넘지 않고는 성교육이 교과과정으로 자리잡더라도 실효성은 요원할듯합니다.

    특히 부부관계(호칭, 명절풍속, 부부간 성폭력개념 불인정 등)에 동등성개념이 없어 가정환경에서 이미 남자아이들은 남성을 갑으로 인간관계를 서열화하고,
    '사회화 과정 = 가해자가 갑임을 경험하는 과정'일뿐인 한국이기에 부모들이 성범죄에서 가해자일 확률이 높은 성별인 아들에 대해서는 갑 입장이 되겠지요.
    처벌된 성범죄 가해 남성은 물론, 극소수 남성에 의한 성범죄 피해 남자아이도 자라면서 오히려 여성을 증오하게 될수도있다고하니 결국 여성은 성범죄대상 + 증오범죄대상으로도 늘 불리하게되고, 민주적공동체 사회복지안전망을 경험하지못한 한국사회는 불리한 을의 입장을 차라리 혐오하는 대중심리가 강하지요.
    결국,
    온라인상에서(만?) '일본군 성노예도 조작됐다'며 망각을 택하는 일부(?) 한국남성들(남자아이들)의 심리도 차라리 가해자-갑을 동경하고 동화되는 예정된 수순인듯도합니다.

    우선,
    이미 ‘한국화’되어 입만 열면 아이들 성교육 망치기일쑤인 어른들(부모 교사 공무원 방송국 언론)부터 성교육 성적정체성교육 성과를 인정받은 영국TV프로그램들을 보고 개안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일명 '처녀막(생물학적 차원이 다른 메커니즘의 증거-명칭 정정 시급, 학생들에게는 남성의 포피 등과 비교수업 필요)'을 남성-좆(성적주체 또는 주체성기)을 위한 숫처녀(성적대상 또는 성적도구)감별법으로만 인식하는 수준인 한국남성문제-성교육이 불가능한 근원을 종식시키려면,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에 초점을 맞춘 정규수업으로서의 성교육이 필수겠고,
    동시에,
    국어국립원과 대법원판결의 정정과 국가의 여성노인들께 대한 사죄-'양공주'포함 구조적 폭력 성폭력 가정폭력, 구조적 기회배제 사기 겁박 등에 대한 과거청산-를 건너뛰어서는 사회심리 국민정서의 변화는 불가능하다는것을 새삼 깨우치는 요즈음인듯합니다.

    그러면서,
    고등학교 이상에서는 여성은 생리 임신 수유 등 생물학적으로 성범죄대상이나 성노동자로 적합하지않음-생명 생태 성선택론-을 교육하고, 인류역사에서 자본주의 가부장제 역사의 짧음과 한국근현대 국가주의(국가가 곧 인신매매자이자 성범죄자이자 포주이자 브로커였던)문제를 대안학교의 민주적 회의시간을 차용하여 토의해야겠습니다.

    이러한 교육과정 없이는 특히 남자아이들(결국 남자어른들)은 늘 혼란스러워하는 답보상태일듯합니다.
  • hanna 2015/03/16 [12:52] 수정 | 삭제
  • 동감합니다. 아이가 성추행을 당했는데도 남자애라 괜찮다며 별 일 아니게 넘어가는 경우도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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