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방에 간 큰아지매와 소향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96화

김담 | 기사입력 2015/05/13 [10:55]

한약방에 간 큰아지매와 소향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96화

김담 | 입력 : 2015/05/13 [10:55]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버스 창에 기댄 머리는 터져나갈 것 같이 두통이 심하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친구들이 각자의 길을 걷고 있어서 인가 아님 이제 나이가 들었다는 것인가. 예전 학창시절의 거의 맹목적인 우정은 없고 세상과 가족과 타협하고 절충하고 밀고 당기는 면모가 모두에게 있었다. 어쩌면 장서방 본인도 이제 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여겨진다. 비록 말은 서로 주고받지 않았지만 그 우정이 그리운 친구들 모두가 세월을 탓하며 늦게까지 마셨고 그리고 식당에서 잤다. 아침에 홍희가 학교 가기 전에 들려서 인사를 했을 때 겨우 잠에서 깬 장서방이 방안을 둘러보니 송철이와 명식이는 간데온데없고 신문사 글쟁이 근식이와 산도적 부명이만 뒹굴고 있었다. 누님이 차려준 아침 해장국을 먹자마자 길을 나서고자 서둘렀다. 상주까지는 하루해가 걸리는데 이미 해가 중천에 있으니 지금 나서도 그리 빠르지는 않은 시간이었다.

 

-누님, 혹시 어제 마루에 둔 종이 뭉치 보셨습니까?-

-종이 뭉치라니? 그 생선 싼 신문지 뭉치 말이냐?-

-예- 하고 대답하던 장서방은 아차 하고 무언가 떠오른다.

-너? 그거 어제 우리 먹자고 가져온 거 아니였나? 내가 반찬해서 들였는데?-

-예, 잘하셨습니다. 오랜만에 친구들 만난다고 사온 건데 말씀드린다고 하다가 잊어버렸네요. 웬걸 어제 안주가 푸짐하다 했지요- 하며 호탕하게 웃어 보였지만 눈치 빠른 누님이 놓칠 리가 없다. 가만히 자신을 한참 쳐다보던 누님이 조용히 물었다.

-너 여자 두었니?-

엉뚱한 질문에 장서방은 박장대소를 하고서 -누님, 그런 일이 있다면 누님이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알게 될 겁니다. 아직은 아니니 염려 놓으시죠- 하고 또 한바탕 웃었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누님의 말이 생각나서 입에 미소를 떠올리지만 과음한 탓에 생긴 두통은 조금도 사그라질 것 같지 않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또 소향이도 기대하고 있지 않을 것이라 사실 부담도 없는 일이지만 아쉬운 마음은 있다. 잠이 들었는지 의식이 있는지 장서방 자신도 그저 두통과 싸우느라 혼미하게 버스에 몸을 맡기고 있는데 어느 틈에 버스가 점촌에 왔다. 해가 완전히 졌다고는 하지만 남은 햇살에 아직 사물은 훤히 보인다.

 

봄기운이 이제는 흘러넘친다. 싱그러운 바람이 태봉으로 걸어가는 발걸음도 가볍게 한다 싶었는데 문득 그렇게 짓눌러대던 두통이 감쪽같이 사라진 걸 느낀다. 걸음을 멈추고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조용히 머릿속을 느껴보니 정말이다. 장서방은 팔을 허공으로 내뻗고는 크게 기지개를 켜고, 그래, 내 이곳에서 홍희의 졸업까지만 뒷바라지를 하자, 그리고는 홀연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에 미치자 과히 처량하지도 않고 오히려 담담한 마음으로 이어진다.

 

장서방이 태봉으로 돌아오고서 사흘 밤이 더 지나고서야 큰아지매가 왔다. 그러고 보니 실로 거의 오 개월 동안 집을 비운 것이다. 소향은 이틀 전부터 집안을 윤기 나게 닦고 쓸고 하기를 수십 번도 더했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죄스런 마음에 큰아지매가 오기도 전에 이미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광수에미는 광수에미대로 광속을 둘러보고 정리하고 간간히 무언가 들고 나와 별채로 들고가기도 했지만 큰아지매에게 책잡힐 일을 남기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정리정돈을 했다. 집으로 들어서며 큰아지매가 식구에게 한 말이라고는 광수에미에게 한 -동서, 고생했네- 한 마디뿐이고 소향에게는 그저 눈길을 주었을 뿐이다.

 

제 땅이 생긴 작은아지매는 연일 일하러 다니느라 신바람이 났다. 시집 온 뒤로 자신의 손으로 돈을 만져보지 못했던지라 살림을 냈다는 것만으로도 날개를 단 작은아지매다.  태광이도 떼어준 논 열다섯 마지기를 짓는다고 정신이 없다. 어느새 풀이 무릎까지 큰다 싶더니 돌아보면 벌써 허리까지 쑥대가 자라있다.

 

장서방도 종가의 일을 직접 하지는 않지만 소작하는 사람들을 독려하기가 바쁘다. 소출을 많이 기대하기는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때론 일하기 싫어하는 소작꾼들은 풀을 깎으라는 둥 논둑을 메우라는 둥 또는 서로서로 귀한 소를 돌려주기를 권고하는 둥 장소방 나름대로 발품이 아니면 입품 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탓에 저녁이 되면 밥을 먹자마자 그저 잠에 취하곤 한다.

 

오월이 들어서고 모가 제법 한 뼘이나 되었을 때 장서방이 주동이 되어 모를 심을 순서를 정하고자 회의도 하고 또 그날그날 해당되는 소작꾼 집에서 술이며 밥을 내오도록 간섭도 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 집에서는 넉넉히 내오는데 누구 집에서는 먹을 것도 없이 일만 시킨다고 불평이 나올 수 있어서 장서방은 종가의 입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지 않도록 형평을 잘 취하고 있다.

 

*   *   *

 

유월이 들어서자 소향도 이제 그 지긋지긋하던 입덧이 어느새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러더니 이제는 뭐가 그리 먹고 싶은지 자나 깨나 머릿속에는 새콤달콤한 먹을 것들이 생각나서 엿장사한테는 엿을 사먹고 떡장사가 오면 빼놓지 않고 바람떡이며 콩떡이며 특히나 찹쌀떡은 빼놓지 않고 사먹느라 지난번 털보무당이 눈을 흘기며 갚은 돈이 어느새 헐렁하게 비어지기도 했다.

 

-소향아, 너 좀 들어오너라-

오랜만에 방안에서 배를 깔고 삼천포에 편지를 쓰던 소향의 귀에 큰방 아지매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방바닥에 손을 대고 일어서던 소향이 문득 자신의 행동이 굼뜬 것을 느끼고는 가만히 생각해본다. 지금이 유월이니 하고 자신의 배에 손을 대고는 문질러보다가 큰아지매가 부른 것을 기억하고는 후다닥 나선다.

-예, 불렀십니꺼?-

대발이 늘어진 안방은 문을 아예 열어놓고 있지만 속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나갈 채비를 해라 나하고 같이 갔다 올 때가 있다.-

-오데를예?-

-가보면 알 걸 왜 묻고 그러냐?-

 

소향의 마음이 요즘 편치 않다. 사실 큰아지매가 지난겨울에 서울로 가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마음 불편한 일은 만들지 않았고 살갑게 대해주었는데 몇 달간 서울물을 마시고 온 후부터는 왠지 모르게 표정 없는 얼굴로 말을 한다거나 혹은 아예 말을 하지 않거나 하는 것이다. 제일 힘든 것은 농사철 일 때문에 작은아지매가 거의 종가 출입을 하지 않는 탓에 소향이 조석을 혼자 도맡아 하는데 때마다 들이는 밥상을 숟가락을 들기 전에 한참씩이나 쳐다볼 때마다 소향은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맛이 없다는 것인지 도무지 무슨 말이라도 하면 속이 시원하겠는데 큰아지매는 특유의 표정 없는 얼굴로 밥상을 쳐다보다가 겨우 숟가락을 들곤 하는 것이다.

 

-예, 운제 가실 낍니꺼?-

-지금 준비하란 말 못 들었나?-

소향도 속에서 심지가 돋아나는 걸 느끼지만 그저 받아주고 만다.

-예-

준비라고 할 것도 없는 차람이다. 입고 있는 치마에 입고 있는 저고리면 됐지 무슨 선보러갈 일도 없고 사진 찍으러 가는 일도 아니겠지 싶은 소향은 그저 머리만 풀어서 참빗으로 빗어내려 다시 묵었다.

 

어느덧 모내기가 끝나가고 있는 들판은 그야말로 초록색의 잔치다. 태봉들 끝자락에 아직 남아있는 빈 논에 모를 심는 사람들의 후렴소리가 아득히 들리는 것을 뒤로하고 소향은 큰아지매의 치맛자락이 길다는 생각을 하며 뒤따르는데 고개도 돌리지 않고 큰아지매가 느닷없이 묻는다.

-어제 그것이 뭐더냐?-

영문도 없이 묻는 질문에 소향은 대답도 아니고 질문도 아니게 -예?-하고 일단 말을 한 후 생각해보니 어제 방안에 놓여있던 과자를 일컫는 것이구나 하고 짐작이 간다.

-영감이 방안에 놓은 것 말이다-

-과자라예-

 

어제 초저녁 아직 해가 남아있을 때쯤 태섭이 함창에서 돌아오면서 소향이 잘 먹는 센베이를 한 봉지 사왔는데 집에 들어서서 안방을 보니 발이 문 앞에 늘어져있어서 안의 동정이 짐작이 되지 않은 탓에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소향의 방문을 얼른 열어 안에다 넣어놓고 시침을 뚝 떼고 건넌방으로 들어갔었는데 그것을 대발 안쪽에 있던 큰아지매는 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달라고 했더냐?-

-언지예. 아니라예!-

강한 어조로 말하는 소향은 한편 자신이 왜 이런 일에 시달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라도 나한테 말해라-

-그런 거 없어예- 

자신이 사달라고 하지도 않았으니 죄스러울 것도 없으련만 괜히 마음이 불편하다. 한편 큰아지매도 자신의 언행이 요즘 왜 이러는지 스스로도 언짢다. 자신이 들어서서 벌린 일이고 또 하늘이 도와 이제 씨도 잘 자라고 있는 마당에 무슨 새삼스런 시기심으로 이러는지 한심할 노릇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러면 안 되지 하고 마음을 고쳐먹다가도 또 어느 순간 잊어버리고 말과 행동이 돌출하곤 하는 것이다. 

 

-들어가자-

말과 함께 큰아지매 자신이 먼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선 곳은 한약방이다.

희한한 냄새로 가득한 약방 안은 초랭갓을 쓴 노인 한 사람이 앉아있을 뿐 텅 비어있다.

-아이구, 마님 아이신교? 우짠 일입니꺼?- 하고 일어서는 노인을 향해 미소도 없는 얼굴로

-예, 진맥하고 약이라도 지을까 해서요-

-예, 자자, 들어오이소- 

노인이 한 편으로 비켜나고 큰아지매가 고무신을 벗고 방안으로 들어섰지만 소향은 아직 약방 안을 휘둘러보고 서있자 큰아지매가 날카롭게 말한다.

-뭐하고 있나?-

소향도 얼른 신을 벗고 들어가자 큰아지매는 노인을 향해

-이 아이 진맥을 하시고 태중이니 거기에 맡는 약을 잘 지어주세요-

노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곧 -아, 예. 자자, 앉으이소. 니도 이리 앉고- 한다.

 

종가에서 종종 이용하는 약방이라 노인도 큰아지매를 잘 알고 있지만 갑자기 잉태한 아이를 대동하여 진맥하고 약 지어달라 하는 말에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그러나 곧 일가친척이라도 되는 모양이겠지 하는 생각으로 소향의 손을 잡아 맥을 짚느라 물끄러미 소향을 보는데 소향의 형색이 종갓집 일가답지 않게 보인다. 한참을 눈을 내리깔았다가 떴다가 또 얼굴을 보다가 하던 노인이 옆에 앉아있던 큰아지매를 향해 몸을 돌리더니

-태아는 건강합니더. 맥도 좋고. 쿤데 무신 약을?-

병 없이 약 얘기를 했으니 무슨 약인지 물어볼 수밖에 없는 노인은 큰아지매를 향해 눈을 크게 뜨고 묻는다.

-태아도 산모도 몸이나 실하게 보약을 지어달라는 말입니다-

-아! 예, 좋지요, 지금쯤 보해놔야 탈고 없고 또 아아도 실하게 태날 겁니더-

얼굴에 웃음기를 잔뜩 띄운 노인은 아마도 부잣집에 어울리는 약을 짓게 되어 오랜만에 큰돈이 들어올 것에 신이라도 난듯하다.

 

그날 저녁에 큰아지매의 당부가 있었다. 약탕관을 태우지 말 것과 약을 다릴 때 꼭 풍로 앞에서 기다릴 것과 그리고 초탕은 아침에 재탕은 저녁에 꼭 먹으라는 것이었다.

 

밥 짓는 일에도 쉽지 않은 판에 일이 하나 더 늘어났다. 아침 먹기 전에 빈속에 먹으라는 초탕은 그야말로 쓰디쓴 약이지만 그보다 더 힘든 것은 밥 짓기 한참 전에 일어나 약을 달여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들어 잠을 자도 자도 또 쏟아지는 잠인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약을 달이는 데는 족히 두 시간이 더 필요하니 그것이 힘든 것이지만 소향으로서는 별 도리 없이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녁 전에 먹으라는 재탕은 오후에 여유 있게 다릴 수 있으니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집안에 약 다리는 냄새가 가득한 오후에 오랜만에 작은아지매가 들어왔다.

-행님, 요새 보약 자십니꺼? 약내가 나네예-

수다와 함께 마루에 걸터앉으며 머리에 썼던 수건을 벗는다.

큰아지매는 대발도 걷지 않고 그냥 방안에서 대답한다.

-무슨… 소향이 먹을 약일세-

소향이라는 말에 작은아지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예? 와예? 오데 안 됐십니꺼?-

정기 바닥에 쪼그려 앉아 풍로에 부채질을 해대던 소향은 허리도 펼 겸 일어나 밖으로 나와  광수에미에게 인사를 건넨다.

-지는 안 아파예. 쿤데 요새는 통 안 오시네예?-

-야야, 일하니라 안 카나? 일을 해도 해도 끝이 없다. 풀 뽑고 돌아서이 풀이 니 갔나 하고 안 묻나?- 하고 웃어 보인다. 소향도 작은아지매의 검게 그을린 얼굴이 왠지 보기가 좋다.

-니 을순이 봤나? 아가 배가 남산만 하데. 여 오는데 샘 앞에 있더라- 하고 혀를 찬다.

소향은 잠시 고구마를 캐러갔던 날을 떠올린다. 그렇지 추석 무렵이었으니… 벌써….

-배를 보이께네. 오늘 낼 하겠던데… 우짤 낀지-

작은아지매는 계속 안됐다는 듯 혀를 차댄다. 그러더니 서있는 소향의 배를 보고는 -니도 배가 어법 부르다 인제- 한다.

그 소리를 들은 큰아지매는 -너는 약 안 보고 거기서 뭐하나?- 하는데 냉랭함이 느껴진다. 소향은 아무 말 없이 그냥 정기로 돌아와 약탕관 앞에 다시 쪼그려 앉아 숯불을 보는데 마루에 있던 작은아지매의 소리가 들린다.

 

-행님, 지기 돈 좀 채해 주이소. 가을에 갚을게예-

하긴 살림이라고 따로 차렸으니 돈 들어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전에 종가에 살 때는 광수나 재수를 시켜서 학교에 필요한 것들을 안방에 말하게 시켰고 또 큰돈은 광수아범이 태섭에게 직접 말해서 해결하곤 했지만 이제는 딴살림 난 판에 돈주머니도 따로 찰 수밖에  없는 판이다.

-갑자기 돈은 왜?-

-행님, 아 둘 키워보이소. 돈이 있는 기 한이라예. 올가을에 걷이 끝나면 다 갚아드릴게예. 좀 채해 주이소-

작은아지매의 돈 꾸어달란 말에는 응대도 없이 엉뚱한 말로 큰아지매가 묻는다.

-소향이가 아나? 자네가 아나? 언제쯤 보살님이 오실런지. 한번 봤음 하는데-

-그기사 소향이가 알겠지예. 같은 고향 사람인데, 그건 그렇고, 행님예, 지가 좀 급해서 캅니더. 돈예-

사정조로 말하는 작은아지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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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노 2015/05/20 [00:22] 수정 | 삭제
  • 한달쯤 미뤄두었다가 한번에 보는 맛에 지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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