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화되는 아시아의 LGBT운동

필리핀, 싱가포르, 중국, 한국의 변화와 도전

나랑 | 기사입력 2015/06/01 [21:33]

가시화되는 아시아의 LGBT운동

필리핀, 싱가포르, 중국, 한국의 변화와 도전

나랑 | 입력 : 2015/06/01 [21:33]

2015년 퀴어문화축제가 준비에 난항을 겪고 있다. 작년 퀴어퍼레이드 때 1천여명의 성소수자 혐오 세력이 집회를 갖고 행진을 막아선 데 이어, 올해에는 퀴어퍼레이드 자체를 봉쇄하기 위한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는 당초에 오는 6월 13일 서울 대학로에서 퀴어퍼레이드를 하기로 예정했다. 그런데 일부 보수 기독교 세력이 이를 방해하기 위해 관할 경찰서인 혜화경찰서 앞에 일주일이 넘도록 텐트를 쳐놓고 대기하고, 서울시내 주요 장소에 모조리 집회 신고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는 퀴어퍼레이드 날짜를 6월 28일로 미루고 수일간 노숙까지 하며 남대문경찰서에 집회 신고를 했다. 그리고 5월 30일, 남대문경찰서는 ‘옥외집회 금지 통고서’를 보냈다. ‘퀴어퍼레이드 행진로가 먼저 집회 신고를 한 단체의 행진로와 경합되고, 주요 도로에 해당하여 시민들의 통행과 차량 소통에 불편을 줄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뜻함) 인권운동이 가시화되면서, 성소수자 혐오 세력 또한 결집하고 더욱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다. 비단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아시아 최초 LGBT 퍼레이드가 열린 필리핀

 

지난 5월 9일, 한국화재보험협회 강당에서는 “변화와 혐오에의, 이중노출”이라는 주제로 <2015 아시아 LGBT 컨퍼런스>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필리핀, 중국, 싱가포르, 한국 네 개 나라의 성소수자 운동의 역사와 성과, 그에 뒤따르는 혐오와 차별의 역사가 공유되었다.

 

▲  ‘2012 메트로 마닐라 프라이드 마치’. 동성애는 죄라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는 혐오 세력과, 그 옆에서 키스하는 남성 동성애자 커플.   © 출처: ‘메트로 마닐라 프라이드 마치’ 페이스북 페이지

 

패트릭 에스피노(Patrick Espino)는 필리핀의 LGBT 정당인 라드라드당(Ang Ladlad) 미디어국 활동가다.

 

필리핀에서는 1994년 6월, 아시아 최초로 ‘LGBT 프라이드 마치’(Pride March. 자긍심 행진)가 열렸다. 동성애 단체인 ‘프로-게이 필리핀’(PRO-GAY Philippines)과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 교회의 주도로 일어난 이 시위는, 필리핀의 많은 성소수자들을 고무시켜 벽장 속의 LGBT들이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자긍심을 주었다.

 

이후 필리핀 전역에서 다양한 성소수자 단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클럽, 바 등 LGBT 친화적인 가게들도 문을 열면서 LGBT 문화는 점점 더 활발해졌다. 올해 21주년을 맞이하는 LGBT 프라이드 마치의 정식 명칭은 ‘메트로 마닐라 프라이드 마치.’(Metro Manila Pride March. 페트로 마닐라는 필리핀의 수도권 지역을 뜻한다.)

 

필리핀은 세계 유일의 LGBT 정당이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필리핀의 하원의원 선거(비례대표제)에서 의석을 따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라드라드당은 선거위원회로부터 ‘전국적인 당원을 갖고 있지 않다’, ‘비윤리적이다’ 등의 탄압을 받으며 후보 출마가 좌절되기도 했다. 하지만 선거위원회의 결정이 대법원에 의해 뒤집히면서, 2010년에는 전국선거 출마를 승인 받았다.

 

2개주, 7개 시·군에 차별금지 조례가 생겼지만

 

패트릭 에스피노는 “매년 천주교 단체와 그 외 반(反)LGBT 근본주의자 세력이 퍼레이드 장소에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들은 피켓과 성경 구절 등을 이용해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공격적으로 표출한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고 지난 10년간 노력해왔지만 제정하지 못했다. LGBT를 차별로부터 보호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별다른 제지 없이 차별행위가 계속된다.”

 

필리핀의 82개 주 중에서 2개 주, 1천637개의 지방 시·군 중에서 7곳에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조례가 제정되었다. 필리핀 인구 중 10.4%가 차별금지 조례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패트릭 에스피노는 “나머지 8천280만 필리핀인은 차별에 대한 보호가 없는 지역에서 살고 있다”면서, “LGBT에 대한 차별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고 말했다.

 

작년 10월에는 한 트랜스젠더 여성이 미군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가해자는 이 여성과 데이트를 시작했다가 상대가 트랜스젠더임을 알고 “넌 진짜 여자가 아니다”라면서 머리를 변기에 부딪치게 해 살해했다. 이후 필리핀 내에서 분노한 시민들의 광범위한 시위가 일어났으며, 가해자는 필리핀 검찰에 기소됐다.

 

이성애자와 함께, ‘핑크닷 싱가포르’

 

한편, 국가의 시민 통제가 엄격한 싱가포르에서는 미디어에서 성소수자를 멋있게 표현하는 것이 검열법에 의해 금지된다.

 

핑크닷 싱가포르(Pink Dot SG.) 조직위원회의 페어린 초아(Paerin Choa)는 “주류 매체에서 LGBT가 충만한 삶을 살거나 가족의 지지를 받는 것이 금지된다. LGBT는 슬픔에 빠져있거나 혼자 외롭게 죽거나 미치거나 연쇄살인범으로 표현된다”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많은 국민들이 성소수자에 대해 왜곡된 시선을 갖게 된다.

 

페어린 초아는 “하지만 싱가포르 국민이 모두 다 보수적인 것은 아니다”라면서, “LGBT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그동안 자기 의견을 표현할 기회가 없었다”고 말했다.

 

▲  싱가포르 홍림공원 안, 2014 핑크닷 싱가포르 행사.    © 출처: 핑크닷 싱가포르 페이스북 페이지

 

이러한 상황은 2009년을 기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기존에 싱가포르에서 정치 집회의 장소로 많이 이용되었던 홍림공원 안에 있는 ‘Speaker’s Corner’(자유발언대)가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면서, 누구나 등록만 하면 행사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 LGBT 활동가들은 행진이나 시위를 꺼려하는 싱가포르 국민들의 여론을 고려해, ‘핑크닷’이라는 분홍색(동성애자를 상징하는 색)의 인간 동그라미를 만드는 행사를 개최했다.

 

“LGBT뿐만 아니라 LGBT를 지지하는 이성애자도 우리 행사의 주 대상입니다. 저희는 생각이 열려 있는 이성애자들에게 다가가 ‘당신 주변에 LGBT 가족이나 친구, 동료가 있다면 분홍색 티를 입고 나와 그들의 사랑할 자유를 지지해 달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이성애자들과 함께하는 핑크닷 행사는 첫 해인 2009년에 2천5백 명이 참가한 후로, 참가자가 급증해 2014년에는 2만6천 명이 참가했다.

 

그러나 행사 규모가 커짐에 따라 성소수자 혐오 세력도 결집했다. 2014년에는 보수 기독교 세력이 핑크닷 행사가 열리는 날 ‘빨간 옷 입기’ 행사를 진행하려 했다가 무산되었고,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은 ‘흰 옷 입기’ 운동을 시작하며 “삶의 순결성을 되찾자”고 촉구했다. 페어린 초아는 “혐오 세력이 일으킨 파장으로 핑크닷에 대한 언론의 보도와 관심 또한 뜨거웠다”고 전했다.

 

▲  분홍색의 인간 동그라미를 만드는 <2015 핑크닷 싱가포르> 홍보 동영상 중. ©출처: 핑크닷 싱가포르 홈페이지

 

남성 간 성행위 금지 ‘형법 377A조’ 논란

 

싱가포르에서 LGBT 운동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은 2007년이다. 싱가포르 내무부가 형법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와 개정 시행을 공표하면서, LGBT 활동가들이 남성 간의 성행위를 금지하는 ‘형법 377A조 폐지’ 온라인 캠페인을 시작한 것.

 

의회 청원을 위한 서명 운동이 시작되었고 총리에게 보내는 공개 항의서도 작성되었다. 377A조 폐지 운동이 시작되자 이를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 세력은 377A조 지지 운동을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2007년 LGBT에 관한 언론 보도가 3배 가까이 증가했다.

 

하지만 싱가포르 의회는 사회 분위기가 보수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결국 형법 377A조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페어린 초아는 “정부는 사회 대다수가 용인할 수 있을 때 법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정책에 변화가 없다면 LGBT는 계속 낙인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 싱가포르 Pink Dot 2015 홍보 영상 “Where Love Lives” http://bit.ly/1AFlQyu

 

문화축제로 자리잡은 중국의 ‘상하이 프라이드’

 

상하이 프라이드(ShanghiPRIDE) 조직위원회 활동가이며 중국의 제1회 ‘퀴어 도심 달리기’를 주최한 리 레이레이(Li Leilei)는 “2009년에 상하이 프라이드를 시작한 건 일종의 모험이었다”고 말했다.

  

성소수자에 대해서나, 대규모 집회에 대해서나 중국 정부가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행사의 제 1 모토는 ‘안전’이었다. 상하이 프라이드 조직위원회 대표들은 중국인이 아닌 외국여권 소지자들이 맡았다. 탄압을 우려하여 행사에서 행진을 제외한 적도 있었다.

 

▲  2014 상하이 퍼레이드 폐막 파티.   © 출처: 상하이퍼레이드 홈페이지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상하이 프라이드는 일주일간의 ‘문화축제’가 되었다. 일주일 동안 미술 전시, 운동경기, 영화제, 도심 달리기, 퀴즈 대회, 토론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리 레이레이는 “상하이 프라이드는 LGBT를 가시화해서 중국 사회가 예전에는 유령처럼 여겼던 사람들을 대면하게 했다”면서, “매년 140%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고 2014년에는 참가자가 6천명에 달했다”고 밝혔다. 대규모 집회를 허락하지 않는 중국 상황에서는 굉장히 큰 수치라고 한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리 레이레이는 올해 LGBT 단체 소속의 페미니스트 활동가 다섯 명이 37일 동안 구금되었던 사건을 언급하며, “예측할 수 없는 중국 정부의 대응은 상하이 프라이드의 운명도 불안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레즈비언-게이 ‘위장결혼’하는 현실 바뀌려면

 

‘가족의 압박’이 가장 큰 고민 거리인 중국 성소수자들 사이에는 정략결혼의 관습이 널리 퍼져있다고 한다. ‘레즈비언-게이 위장결혼 배우자 찾기 파티’가 인기가 높다. 리 레이레이는 “정략결혼 관습을 끊는 방법은 LGBT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개적으로 활동을 하는 LGBT가 없고 커밍아웃한 스타들은 대부분 홍콩이나 대만에 기반을 두고 있다 보니, 기성 세대가 성소수자를 혐오한다기보다 아예 정보가 없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리 레이레이는 “한국이나 필리핀과 달리, 중국에는 주목할 만한 혐오 세력이 없다”고 말했다. 공교육이나 미디어에서 동성애에 대해서 접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LGBT를 혐오할 기회도 없다는 것. 이어 이러한 사회분위기가 일종의 ‘소극적 혐오, 의도하지 않은 무지’를 초래한다면서, “LGBT를 향한 적대감을 일으키지 않고 조금씩 전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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