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족이 고립되지 않게 ‘눈’이 되어주길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한 시간(4)

화사 | 기사입력 2015/08/02 [20:39]

유가족이 고립되지 않게 ‘눈’이 되어주길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한 시간(4)

화사 | 입력 : 2015/08/02 [20:39]

저는 매주 수요일 동네 전철역 앞에서 언니와 함께 세월호의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습니다. 긴급한 서명이 있을 때는 서명운동을 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이 챙겨준 사진을 함께 전시해놓고, 세월호를 잊지 말자며 노란 리본을 나눠드리고 있습니다.

 

▲  매주 수요일 망원역 1번 출구.    © 화사

 

많은 분들이 노란 리본을 받거나 피켓을 읽어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미수습자 아홉 명의 얼굴 사진이 있는 피켓에는 눈길이 많이 향합니다. 사진을 보면, 다들 마음이 좋지 않겠지요. 하지만 보아야, 잊지 말아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 피켓을 꼭 가져다 놓습니다.

 

일곱 달째 같은 요일 거의 같은 시간을 지켰더니, 처음에는 욕을 하고 지나가시던 할아버지도 이젠 욕을 하지 않으십니다. ‘세월호 지겹다’고 큰 소리로 투덜거리시던 할머니도 이제는 그냥 지나가십니다. “누가 시켜서 나왔냐” 같은 질문들도 받지 않게 된 지 오래입니다.

 

혼자 피켓을 들고 있다가 역무원에게 쫓겨나거나 술 취한 분들이 다가와서 무서웠던 경험이 있은 후, 부천에서 매주 언니가 와서 저와 함께 해주고 있는데요. 요즘 우리는 ‘그래, 더디더라도 진심은 통하나 보다’ 하고 시민들의 반응에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정권 유지’와 ‘진실 규명’이 대립하는 시국에서

 

 최근에는 김초원, 이지혜 선생님의 순직 인정을 위한 서명을 다시 받고 있어요.   © 화사

하지만, 안산 세월호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를 지키는 유가족들에게는 수난이 계속됩니다. 7월 29일, 60대 여성이 분향소 옆 유가족 대기실로 찾아왔습니다. 그분이 처음부터 ‘따지러 왔다’고 말해서, 유가족은 뭔가 오해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음료수도 드리고 대화로 풀려고 했지요. 그런데 그 분은 ‘애들 운명이 그뿐인데, 정부가 세월호에 무슨 책임이 있느냐’고 몰아붙이며 유가족의 뺨을 세네 차례나 때리고, 대기실에 있던 세월호 모형도 부숴버렸습니다.

 

며칠 전부터는 약속이나 한 듯,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4.16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예산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특별조사위원회 예산은 ‘공무원 보수규정’ 등 관련 법령과 정부의 예산편성 지침, 타 기관의 사례에 맞춰 책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호 ‘시행령’으로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 범위를 제한한 것도 모자라서 갑작스레 방만한 예산 책정이 문제라며 일부를 부풀려 제동을 걸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을 방해하는 꼼수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는 돈 때문에 국민의 안전을 등한시한 채 공공영역의 많은 부분을 민영화하였고, 돈으로 현혹하여 유가족의 진실 규명 의지를 단념시키려 하였으며, 그것이 실패하자 유가족을 돈 달라고 떼쓰는 폭도로 둔갑시켰고, 돈을 핑계로 진실 규명의 열쇠인 세월호 인양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이제 돈을 문제 삼아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정권 유지’의 의지와 안전 사회를 위한 ‘진실 규명’의 의지가 대립하는 이 이상한 형국에서 국민의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를 확보하는 일은 요원해 보입니다. 민주국가에서 보장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권리인 집회 결사의 자유를 공권력이 어떻게 제압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세월호 이후를 논의하려던 캠핑은 최루액에 휩싸여

 

경찰의 진압이 없어 평화롭게 마무리 되었던 4월 25일 추모 집회와 달리, 노동절이었던 5월 1일에는 다시 경찰의 과잉, 폭력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날은 ‘1박 2일 범국민 철야행동’의 날로, 광화문 광장에서 텐트를 치고 캠핑 분위기에서 세월호 이후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자리로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정을 마치고 밤 10시가 다 되어 광화문 광장에 도착했는데,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위에 물어보니 안국동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쪽에 가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해보니, 물대포와 최루액이 엄청나고 폭력진압이 심해서 위험하다며 저에게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유가족들이 거기 다 계시기 때문에 걱정스러운 마음에 가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광화문에서 인사동으로 가는 인도에도 경찰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노란색만 봐도 못 지나가게 막는다고 했습니다. 하긴, 며칠 전 세월호 1주기 때 노란 리본을 달았다고 경찰에게 붙잡힌 고등학생 소식을 알고 있어서 저도 옷이며 가방에 있는 노란 리본을 다 떼긴 했지만 지금이 과연 2015년이 맞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인사동 입구에 들어서니 눈과 코가 아파왔습니다. 물대포와 최루액에 맞아 흠뻑 젖고 지친 사람들이 계속 안국동 쪽에서 나왔습니다. 구토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안국동 사거리에 도착하자 전쟁터가 따로 없었습니다. 바닥은 비가 온 것처럼 온통 물바다에 하얀 거품 물이 잔뜩 있었었는데 그것이 최루액이라는 걸 한눈에도 알 수 있었습니다. 한바탕 물대포와 최루액을 쏜 후 소강 상태인 것 같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지쳐서 난민처럼 여기저기 주저앉거나 쓰러져 있었습니다.

 

제 이웃에 사시는 분들도 너무 지쳐서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 계시다고 하기에 찾아갔는데, 모두 목이 아프고 추워서 연신 따뜻한 차를 들이키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물대포에 완전히 젖은 분들이 부들부들 떨며 들어왔습니다. 최루액 때문에 아파서 의자에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계속 고통을 호소하였습니다.

 

▲  2015년 5월 2일 오전 6시경 안국동 사거리. 길 건너에 갇혀있는 유가족들이 걱정되어 밤새 기다린 시민들. 그리고 시민보다 더 많은 수의 경찰들.    © 화사

 

방패에 밀려 또다시 고립된 유가족들

 

안국역 사거리에서 지루한 대치가 계속 되었습니다. 평화롭고 의미 있는 캠핑을 기대하고 준비해온 사람들은 돗자리를 깔고 앉아 야식을 먹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검거를 시작하겠다는 방송이 나오더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경찰이 방패로 밀며 시민들 쪽으로 이동해왔습니다. 놀라서 모두 일어나 물러서는데, 경찰이 유가족들 또 고립시켰습니다. 방패와 힘으로 도로에 있던 시민들을 인도 위에 올려놓고도 계속 최루액과 최루탄을 쏘았습니다.

 

유가족이 경찰에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 걱정되었습니다. 보는 눈이 없는 데에서는 경찰이 유가족에게도 함부로 대한다는 것을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경찰을 감시하는 눈이 되고자 많은 사람들이 추위에 떨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피곤한 시간들이 이어졌습니다. 경찰은 시민들이 모두 인도 위에 있는데도 도로를 점거하여 통행에 불편을 초래했고, 횡단보도를 모두 막고서 시민들을 불법 채증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폭력을 선동하는 사복경찰과 집회 참가자들을 채증하고 다니던 ‘일베’ 회원이 적발되어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유가족들은 시민들이 있는 쪽으로 오려고 했지만 경찰에 계속 막혔습니다. 날이 밝아 통행량이 많아지자 차가 몇 대 도로로 진입하였는데, 경찰은 시위 때문에 도로를 통제하는 것이라고 말해서 운전자들은 애꿎은 유가족에게 욕을 퍼붓고 가기도 했습니다.

 

아침이 되어 너무 지치고 허기져서 광화문 광장 쪽으로 돌아갔습니다. 원래 5월 1일에서 2일까지 광화문 광장에서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며 세월호 이후 1년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지려던 계획이었기 때문에 아침 밥차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는데, 경찰에 막혀 절망스러운 아버지들이 서로 목을 빨랫줄로 메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골목을 돌고 돌아서 안국역 근처까지 갔습니다. 관광객과 섞여서 들어오다가 유가족들이 계신 곳으로 뛰어들어왔습니다. 다행히 어머니들이 말려서 위험한 상황은 지났지만, 몇몇 아버지들은 목에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과연 이 정권 하에 자식이 희생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규명될 수 있을지, 답답함과 좌절감에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자해를 시도한 분도 있었습니다.

 

▲  2015년 5월 2일 오전 10시경. 안국동 사거리에서 경찰에 의해 갇혀있는 유가족들.    © 화사

 

유가족과 이야기한 죄?! 5시간 동안 갇히다

 

경찰은 유가족을 오도가도 못하게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걱정이 돼서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너무 힘이 들어 집에 가려고 하는데, 경찰이 방패를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제가 유가족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웃들과 함께 집에 가겠다고, 청와대에 가려는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방패를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관광객이 지나갈 때는 방패를 열어주었습니다. 왜 우리는 못 지나가게 하느냐고 아무리 항의해도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무전을 통해 ‘시민들과 말 섞지 말라’는 명령이 간간히 들렸습니다.

 

제가 집에 가겠다고 인사를 하고는 못 가고 있는 걸 보고서 영석 아버지가 다가오셨습니다. 이번에 유가족을 막고 섰던 경찰들은 이름표를 달고 있었는데 그 중 ‘영석’이라는 이름의 경찰을 보았습니다. “내가 영석이 아빠예요. 우리 아들이 오영석이야” 라고 말씀하시는데,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유가족들에게 이렇게 해도 되는 건지, 아이들을 먼저 보낸 것만으로도 괴로운 분들에게 어떻게 이렇게 가혹하게 대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112에 전화를 했습니다. 경찰이 방패로 막아서 집에 갈 수가 없다고 했더니, 난처해하면서 ‘돌아서 가라’고 했습니다. 모두 경찰이 둘러싸고 있다고, 도와달라며 관등성명을 물었더니 그제서야 전화 받은 경찰이 직접 와보겠다고 했습니다. 한참을 기다렸더니 경찰이 왔습니다. 우리가 집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자, 안국역 앞 도로로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경찰을 따라가는데, 도로에 있던 경찰이 방패로 막더니 여경들이 압박하며 우릴 둘러쌌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통화한 경찰에게 도와달라고 하자 자기는 더 도와줄 수 없다며 가버렸습니다.

 

다시, 처음에 있던 경찰방패 앞에 앉았습니다. 잠도 못 잔 채 몇 시간 동안 실랑이에 지쳐서 방패에 기대앉은 일행을, 경찰이 방패로 쳤습니다. 왜 때리냐고 항의하니 실실 웃으면서 대꾸도 안 하더군요. 더 항의하니 그 경찰을 뒤로 보냈습니다.

 

아직도 길 건너에는 유가족을 걱정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경찰은 해산하면 유가족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람들은 해산했는데, 우리는 그대로 갇혀있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새하얀 대낮에 경찰에 의해 감금되어 오가지도 못하는 상황을 어느 누구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집에 가려고 일어났던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무려 5시간동안을 길바닥에 앉아있었습니다. 물론 유가족들도 함께요.

 

▲  2015년 5월 2일, 경찰의 방패에 막혀있으면서 뜬 별들. ‘우리 아이들이 별이 된 것 같다’고 하신 유가족의 말씀을 듣고 노랑 별을 뜨게 되었습니다.    © 화사

 

민주국가라면 유가족이 박해당하지 않을 것

 

그러다 저는 방패로 막고 있던 경찰이 교대를 하는 틈에, 운 좋게 뚫고 나와서 가방을 가지러 광화문 광장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오고 얼마 안 지나서 경찰들이 방패로 밀고 최루액을 쏘며 유가족들을 길 한쪽으로 몰아붙였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정부는 유가족들을 ‘보상금 더 달라’는 폭도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으니, 현장을 증언해줄 시민들이 없다면 언제라도 유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물리력을 동원해서 공권력이 개인의 신체의 자유를 억압하고 불법을 저지르면서 감정적으로 시민을 대하는 것에 화가 납니다.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개인의 의사가 너무 쉽게 무시되고, 시민의 발언권을 원천 봉쇄하는 정부가 정말 원망스럽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유가족에게 계속 거짓을 말하고, 제대로 구조하지 않고, 구조를 막고, 전 국민을 속인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렇게 유가족을 박해해도 되는 것인지 두렵기만 합니다.

 

지난 일년 넘게 외면당하고 무시당하고 수모를 당한 유가족들의 상처는 어떨까요? 아이의 생명을 억울하게 빼앗기고, 진실을 밝히라는 목소리가 진압 당하고, 보상금을 노린다는 모욕을 눌러쓰고, 그럼에도 이렇게 억울한 상황을 다수의 사람들이 알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유가족과 함께하며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글로 쓰는 작업은 저에게 쉽지 않지만, 이 기록을 통해서 유가족들을 모른 척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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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로피카나 2015/08/11 [13:48] 수정 | 삭제
  • 기사 잘 봤습니다. 유족들 마음에 힘이 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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