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부락에 백이 대단한 사람이 삽디다”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117화

김담 | 기사입력 2015/12/15 [16:26]

“당신 부락에 백이 대단한 사람이 삽디다”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117화

김담 | 입력 : 2015/12/15 [16:26]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손을 잡고 애처롭게 울었다고? 비록 오라버니를 만나긴 했지만 돈만 건네주고 헤어졌는데 울기까지 해? 자신이 그때 그랬나 하고 기억을 되돌리는 사이에 창호어마이는 옳다구나! 하는 마음으로 뒤돌아서서 한 발짝 걸어가며 말을 남긴다.

-니, 그카모 안된데이. 내만 알고 갈라 켔는데- 하고 사라져 버린다.

어어 하는 사이에 이미 창호어마이는 어둠 속으로 가버렸고 광수에미는 벙벙한 정신을 애써 차리려 한다. 그리고는 자책하고 만다. 애초부터 딱 잡아뗄 것을, 봤느냐고 묻긴 왜 물을 것이며, 창호어마이한테는 말해도 된다고 했을 때도 역시 딱 잡아떼며 미친년이라고 욕이라도 한마디 할 것을 왜 그리 바보같이 휘둘렸는지 이제야 정신이 드는 것이다. 

사람들이 대청에서 우르르 내려오는 소리와 아낙들이 시끌시끌한 정기를 분주히 드나드는 것으로 봐서 모임이 끝난 모양이다. 광수에미가 쏙 빠진 기운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정기로 가는 중에 남정네 누군가들이 인사를 건네지만 눈에 보이는 게 하나도 없다.

 

*   *   *

 

아침나절에 떠났건만 밀양에서 기차를 바꿔 타고 김천까지 오고 보니 어느새 늦은 오후가 돼버렸다. 꼬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잡고 기차역을 빠져나오면 우선 허기부터 채워야지 생각하며 개찰구를 빠져나오는데 순경둘이 떡 버티고 서서 아이, 여자, 노인들은 보내고 남자들만 골라서 신분증검사를 하고 있다.

-도민증 봅시다-

검은 모자를 눌러쓴 순경 하나가 쳐다보지도 않고 모두에게 하는 말이다.

장서방은 난감하지만 등이 떠밀려 차례가 되었다.

-없습니다. 아직 만들지를 못 했습니다-

어차피 직면해야 할 판이라 장서방은 또렷한 목소리로 말한다. 다른 사람의 도민증을 들여다보던 순경은 고개를 들어 장서방을 보며 -도민증 발급한 기 운젠데 여태 못 만들어? 이쪽으로 서시오- 하고 검사를 계속한다. 남은 사람들이 다 나오도록 검사를 마치기까지 한참이나 걸렸다. 장서방과 같이 붙들린 사람이 둘이었다. 하나는 고장물이 줄줄 흐르는 한복을 입은 중년이고 또 하나는 양복을 점잖게 차려입고 안경까지 낀 남자였다.

 

-들고 있는 짐 좀 풀어보시오-

순경은 장서방 무리를 향해 말하고 양복쟁이는 들고 있던 가죽 가방을 열어 보이며 -아침나절에 출장 가느라 옷을 바꿔 입는 바람에 신분증을 못가지고 왔습니다. 학교에 연락하면 지금이라도 제가 누군지 알 겁니다-

순경과 신사쟁이는 몇 마디 학교이름과 교장이름을 주고받더니 인사까지 하고는 보내주었다. 그리고 한복 입은 남자 역시 인근 지역의 이름을 대며 면장이름을 들먹거리더니 또 보따리를 들고 갔다. 이제 남은 사람이 장서방 홀로다.

 

장서방이 들고 있던 가방을 뒤지던 순경 하나가 그 속에 든 라디오를 발견한다. 흔치 않은 물건이다. 평소에 잠자기 전에 세상소식을 듣는다고 마련한 라디오를 여행에도 들고 간 것이다.

라디오를 한손에 치켜든 순경이 장서방을 보며 -어디 사시오?- 하고 묻자 -상주 함창의 태봉이라는 동네에 삽니다- 하고 답하자 순경의 말투는 사뭇 위협적이다.

-그서 뭐하요?-

그러나 그 위협을 느낄 장서방은 아니지만 귀찮아질 것이 성가시다.

-그곳에서 머슴 살고 있습니다-

순경의 눈에 비친 장서방은 그야말로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서울 말씨에다 귀한 라디오를 지니고 다닌다? 그리고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남자가 머슴을 산다고? 간첩 색출에 눈이 벌겋게 단 순경들이다. 혹시라도 소 뒷발질에 쥐새끼 잡듯 행운이 생기는 날에는 특진에다 포상금까지 그야말로 횡재인 것이다.

-서까지 갑시다-

달랑 혼자만 잡힌 신세가 저물어가는 날씨만큼이나 을씨년스럽지만 별수가 없는 장서방은 가방과 소향의 건어물 보따리를 들고 경찰서까지 갔다.

 

다짜고짜 우선 유치장에 넣은 후 순경들은 저녁을 먹으러 가는 눈치다. 고팠던 배가 감쪽같이 나았다. 머릿속에는 상황을 어찌 해결해야 할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지만 생각할수록 막연하기만 하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가방을 머리 밑에 넣고 시멘트 바닥에 등을 붙여보니 한기가 뼛속까지 전해와 할 수 없이 도로 일어나 앉아서 눈을 감은 채 그저 운명에 맡기기로 체념을 하는 사이 시장기와 한기가 겹쳐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요란하게 불러대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창살 밖을 보니 아까 전의 순경 하나가 유치장 열쇠를 열면서 나오라고 한다. 그리고는 취조를 한다. 본적은 어디며 어디서 무얼 하는 사람인지 반복해서 묻고는 -신원보증을 할 사람이 와야 나갈 수 있소. 함창지서에 연락해 놓을 테니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시오. 내일까지요. 낼까지 아무도 안 오면 도로 넘길 것이요- 하고는 도로 유치장으로 장서방을 밀어 넣는다.

 

-여보시오. 내가 죄진 사람도 아닌데 밥이라도 먹게 해야 될 거 아니요? 순경 나리!-

화가 슬며시 치민 장서방이 순경 나리라고 빗대 부른다. 자물쇠를 잠그고 돌아서던 순경이 도로 돌아서더니 -이봐! 신분증 없으면 그것도 죄야! 죄! 뭘 알고 얘기해!- 하고는 그냥 가버린다.

함창지서에 연락을 한다는 것은 태봉에 연락하여 누군가 김천까지 와서 자신을 신분 보장을 한 후에 자신이 유치장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종가에서 누가 김천까지 자신을 찾아올 것인가? 소향이는 아니고 태섭이가 머슴 찾으러 김천까지 올 위인도 아니고 더군다나 안방마님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우선은 허기부터 해결해야 하겠기에 밑질 것 없다는 뱃장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난동을 피운 후에야 겨우 사식을 먹게 되었다.

 

눈을 감고 먹은 음식이 흘러 내려가는 뱃속 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긴 장서방은 별수 없이 채송철이에게 신세를 져야 하나 하고 내키지 않는 생각까지 이르렀지만 며칠 전에 본 그의 얼굴이 창백하고 뭔가 밝지 못한 것이 떠올라 짐이 되기는 싫다고 마음먹고 혹시라도 태봉에서 내일까지 무슨 연락이라도 오면 되겠지 하고 체념한 채 춥고 고달픈 밤을 보낸다.

그러나 이튿날 오후가 되어서도 아무 소식이 없다. 유치장 속에서 혼자만 마음이 닳고 있지 같이 있는 몇몇이 잡범들은 세상에 둘도 없이 편하게만 보인다.

 

한편 태섭의 종가에 자전거를 탄 순경이 연락한 것은 이튿날 늦은 아침나절이나 돼서다.

-뭐라고? 장서방이 김천 유치장에 있다고? 서울 간다쿠더만 김천엔 와?-

태섭이 대청에 선 채로 마당에 있는 태광에게 묻지만 태광인들 알 리 없다.

-내는 압니꺼? 와 그 있는지. 암튼 도민증 없다고 붙들린 모양입니더. 신원 보증을 서야 나온다 안 합니꺼? 우짤랍니꺼?-

-니가 좀 갔다 오든가?-

태섭의 말에 태광이 눈을 크게 뜨고 -지가예? 참! 그 먼 길을 머슴 하나 델꼬 온다고 가란 말입니꺼? 우짜다 상전 하나 더 모시게 됐십니꺼?- 하고 혀를 끌끌 차대며 못마땅한 얼굴을 해대다가 -아, 행님은 무신 장관이다 도지사다 시장이다 하고 같이 댕기민서 돈도 뭉태기로 갖다 받쳐놓고 이런 것도 하나 해결 못 합니꺼?- 하고 역정을 내자 문득 태섭도 김천까지 가지 않고 장서방건을 해결할 수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해본다.

그래서 점심을 먹고난 후 옷을 차려입고 느긋하게 자전거를 타고 함창지서로 향한 태섭의 시간은 늦은 저녁이 다 돼서다.

 

유치장 속에서 오후가 돼도 아무 연락이 없자 이제 곧 대구로 이송될 것이라는 순경의 말을 들은 장서방은 속이 불편하다. 장서방답지는 않지만 타들어간다.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여보시오. 순경 나으리!- 하며 크게 오장육부가 뒤틀려 부르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다.

-이 사람이 우째 말끝마다 나으리라 카노?-

눈치 빠른 순경 하나가 눈을 부라리며 삐딱하게 장서방을 쳐다본다.

-신원 보증만 서면 내가 나갈 수 있다 했잖소?-

-그런데?-

순경은 이제 아예 반말이다.

-그럼 부탁이 하나 있소이다. 신원보증을 할 사람이 있으니 전화 한 통만 해주시오-

-봐! 어제 당신 거주지 지서에 한 통 했으이 그걸로 됐능기라. 우리가 무신 우체국 직원인줄 아나?- 하며 눈을 꼬아서 장서방을 본 후 등을 돌리자 -감찰 실장한테 전화 한 통만 해 주시오- 하는 장서방의 말에 순경은 멈칫하는 태도와 함께 돌아선다.

-당신, 지금 뭐라 켔노? 뭐? 감찰실장? 지금 놀리나? 이 사람이?- 한다.

-예, 서울본청에 있는 감찰실장 체송철이한테 전화하면 내 신원보증을 설거요-

 

내키지는 않지만 저물어가는 오늘이 화급한 장서방의 마음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이름까지 분명하게 입에 올리고 또 농담처럼 말할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 바람에 순경들이 수군수군하다가 그중 주임정도로 보이는 자가 오더니 -당신 그 말이 농이거나 거짓이모 경치는 거 아나?- 하며 다짐이나 확인을 하는 듯하다.

-내가 왜 바쁘신 나으리들한테 거짓이나 농을 하겠소? 채송철이한테 내 이름 장지우라 하며 전화 한 통만 해주시오-

일부러 감찰실장님이라 부르지 않고 수식 없이 채송철이라 부르는 장서방의 말에 주임쯤 되는 자는 뒤를 쭈뼛거리며 돌아보더니 전화기를 붙들고 손잡이를 돌려대고 큰소리로 교환에게 말한다.

 

한편 함창지서에서 지서장과 마주한 태섭이 자초지종을 말하고 그 먼 곳까지 가기가 불편하니 지서장이 전화로 신원을 확인시켜 보내주도록 부탁을 하였다. 지서장은 그래도 인근의 유지가 하는 부탁이라 흔쾌히 수락하고 앉은 자리에서 김천경찰서로 전화를 넣는다.

 

-예, 여기는 김천경찰서입니다. 장지우라는 사람이 감찰실장님을 찾고 있습니다. 예, 예! -

뭐라고 주고받는 말을 유치장 안에서도 들을 수 있는 장서방은 그저 송철이가 사무실에 있기만 기대한다.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하고 주임처럼 보이는 자가 순경더러 장서방을 불러오라 시킨다. 장서방이 줄줄이 붙어있는 사무책상 앞으로 가자 주임 같은 자는 경직되어있는 태도로 전화기를 장서방에게 건네준다. 장서방은 속으로 다행히도 송철이가 사무실에 있었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목청을 다듬은 후 -여보시오- 하고 부르자 -야, 이놈아, 누가 내 이름 팔고 다니라고 했냐?- 하며 전화기 저쪽 끝에서 송철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난번에 너 얼굴을 보니 저승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더구나. 자리도 좋고 돈도 좋지만 너무 힘들게 살지 말아라- 하며 헤어질 때 당부하지 못한 진정의 안부로 답한다.

-안 그래도 너 때문에 내가 시간을 내서라도 한번 내려가려고 했는데 그전에 네놈이 콩밥을 먹는구나. 암튼 내가 가기 전까지는 쥐죽은 듯 살아라. 당부한다. 순경 바꿔라 바쁘다-

 

장서방은 씩 웃기만할 뿐 마지막말은 나누지도 않고 전화기를 주임 같은 자에게 전해주자 직립자세로 목청 크게 전화를 받더니 그저 예! 예! 복창한다. 그리고는 장서방은 깜깜한 밤하늘을 쳐다보며 보따리 두 개를 들고 경찰서를 나섰는데 그리고 잠시 후 함창에서 김천경찰서로 전화가 걸려왔다.

-장지우? 그 사람 좀 전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당신 그거 압니까?-

함창지서장은 영문도 없이 묻는 질문에 - 뭐를 말입니까?- 하자 김천 쪽에서 -와! 당신 부락에 백이 아주 근사한 사람이 삽디다. 당신들 그 사람만 잘 구슬려도 한 몫 하겠던데. 모르고 있었단 말입니까?-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도 태섭을 앞에 둔 지서장은 한참이나 전화기에 귀를 대고 들으면서 점점 눈이 커지고 있었다. 한참 후에 전화기를 조용히 내려놓더니 태섭을 보고 -회장님, 종가에 머슴을 산다는 그 장지우라는 자가 언제 들어왔십니꺼?- 하고 묻자 태섭은 순간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어 의자를 당겨 앉으며 -왜 그러시오? 그러니까 올봄에 왔나? 그렇지 봄이지! 쿤데 와요?- 하고 다그치자 지서장은 조용히 태섭의 눈을 보며 -그자가 보통사람이 아니구만요. 지금 김천 경찰서에서 들었는데 석방은 됐답니더. 쿤데 신원보증을 누가 섰나 하면 본청에 있는 감찰실장이 섰다 아입니꺼?-

 

태섭은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김천까지 가지 않고도 해결된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고 또 마누라가 장서방에 대해 알아보라고 한 것을 일순간에 다 알아본 것처럼 마음이 놓인다.

일단은 서울경찰청 본부의 감찰실장이라면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자리인데 그 실장과 막연한 친구사이라면 무슨 불온한 자나 범법자가 아님이 확실하다. 그런데 왜 그런 자가 자기 집에서 머슴을 살고 있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참! 참! 하고 혀끝을 차대며 자전거를 밟는 태섭은 예사 인물은 아니라고. 그러니 그 생각지도 못한 생각들을 쏟아낼 수 있었겠지 어디 그뿐인가? 말이며 행동이 빈틈이 없고 농사일에는 비록 서툴지만 서툰 일조차도 실용성과 효율을 견주어 해내니 오히려 경험과 경력만 내세우는 무식한 농사꾼보다 한결 조리가 있기도 한 것을 태섭은 느낀다. 시월상달이 하늘 높이 걸려있다. 자전거에서 나오는 불빛보다 달빛이 더 밝아 길이 시원하다.

 

*   *   *

 

밤길에 기차며 버스가 끊겨버려 장서방은 할 수 없이 여관을 찾아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일찍 떠나 태봉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때였다.

대문을 들어서며 댓돌 위를 보니 태섭의 신발이 보인다. 그리고 정기에서 서성거리는 소향이도 보인다. 비록 내 집 내 식구는 아니지만 그래도 낯익은 얼굴이 반가워 장서방은 미처 자신을 보지 못한 소향을 크게 부른다.

-소향아, 내다-

정기에서 고개를 휙 돌리며 소리 나는 쪽을 보던 소향이 활짝 웃는 얼굴로 정기 문턱을 넘는데 무거운 몸이 여실하다. 기우뚱거리는 오리처럼 양손을 허리에 대고 마당으로 내려서는 소향은 장서방에게 생긴 일은 전혀 모른 채 그저 반갑기만 하다. 

-오십니꺼? 점심 안 잡샀지예? 마침 지금 점심 채리는 중이었심더- 하며 돌아서는 소향에게 장서방은 들고 온 보따리 하나를 불쑥 내밀며 -자, 이거는 너거다- 하자 소향이 -뭔데예?- 하며 보따리를 가슴팍에 안자 코끝에 전해지는 어물냄새가 가득해 장서방을 보는 눈이 크게 떠진다. 장서방은 아주 작은 소리로 -내가 삼천포에 다녀왔다. 너희 엄마께서 주신 거고 그 안에 너 동생 숙향이가 준 것도 들어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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