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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패트로누스와 디멘터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독일에서 심리치료하기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하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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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에 거주하는 20대 후반 여성 하리타님이 심리치료 과정을 거치며 탐색한 섹슈얼리티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자신의 상처를 짊어지고 국경을 넘어 문화적, 사회적, 제도적 차이 속에서 삶의 변화와 사회와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실천해가는 여정이 전개됩니다. –편집자 주

 

기억을 재처리하는 EMDR요법을 시작하다

 

매주 이어지는 면담이 별 진전 없이 더딘 것 같아 점점 답답해지던 어느 날, 나의 치료사는 EMDR이라는 요법을 시작해 보자며 인쇄물 한 뭉치를 건네주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독일에서 트라우마 치료에 주로 쓰이는 치료법인데, 다른 치료법에 비해 효과가 빠르고 과정에 융통성이 있으며 무엇보다 몸과 마음을 연결해서 다루기 때문에 본인이 선호하는 것 중 하나라고 했다. ‘몸과 마음의 연결’이란 앉아서 대화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활동도 치료 과정에 포함된다는 의미다. 힘들 때 요가나 산책 명상을 하면 ‘직방’으로 잘 듣는 나로서는 귀가 솔깃해지는 얘기였다.

 

또, 치료사의 해석이 많이 들어가는 다른 요법들에 비해 EMDR은 환자 본인이 지적, 감정적으로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많아 나의 탐구적인 성향에 잘 맞을 거라고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처음 들고 온 문제가 ‘성기능 장애’라고 해서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트라우마만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친 기억과 경험을 고르게 조명하면서 크고 작은 트라우마들을 연결해 총체적으로 다룬다는 것이었다.

 

▶ EMDR요법에서 가장 특징적인 ‘안구 운동법’ 예시.   ⓒ 출처: skeptic.com

 

그림은 EMDR에서 가장 특징적인 ‘안구 운동법’ 예시다. 작업 대상이 되는 트라우마 기억의 두 가지(부정적-긍정적) 생각과 상황을 각각 왼쪽, 오른쪽에 둔다. 치료사의 손가락이 환자의 시야에서 좌우로 움직일 때 환자는 두 눈동자를 이에 따라 움직인다. 이 운동법은 렘수면(Rapid Eye Movement, REM sleep) 원리에 기반하는데, 자는 동안 누구나 거치는 렘수면 상태에서는 안구가 좌우로 움직이고 이때 뇌에서 기억처리와 연상 작용이 일어난다. 즉, EMDR은 렘수면 상태를 재현해 비슷한 효과를 얻으려는 것이다.

 

드디어 본격적인 ‘요법’이라는 걸 쓴다니, 설레고 궁금하면서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주어진 자료 외에도 추가로 더 찾아보며 공부를 했다. EMDR(Eye Movement Desensitization and Reprocessing.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은 1987년 심리학자 샤피로 박사 (Dr. Francine Shapiro)가 안구운동을 통해 부정적인 생각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오늘날 총 8단계 과정으로 정립되어 있다.

 

주요 골자는 고통스러운 기억(트라우마) 때문에 몸과 마음에 고통이 있는 환자가 이 요법을 통해 트라우마의 ‘기억 네트워크’에 접근해서 정보처리 기능을 강화하고 정보 재처리를 통해 새로운 연상 관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정보처리’라니 무슨 정보? 참 건조하기 짝이 없다. 여기서 정보처리란 인간 뇌의 적응 시스템을 말한다. 이 시스템 덕분에 우리는 들어온 정보, 특히 고통과 혼란을 주는 상황을 경험했을 때 금세 회복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고통과 혼란, 즉 정신적 외상이 너무 클 때는 시스템이 잘 작동을 못해 처리가 안 된 기억이 그냥 뇌에 저장되어 버려 상기될 때마다 고통을 준다. 그러니까 그 기억을 불러와 ‘재처리’를 하면서 새로운 연상(association), 특히 긍정적인 생각과 감정에 연결시키면서 회복이 안 되었던 부분을 정돈하며 트라우마가 치유되는 것이다.

 

그럼 ‘재처리’는 어떻게 할까. 환자가 처리할 기억을 불러오면 이에 대해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 나서 안구운동, 손뼉 치기, 소리 자극 등의 ‘양측 자극’을 준다.

 

▶ EMDR요법을 개발한 프랜신 샤피로 박사의 책 <트라우마, 내가 나를 더 아프게 할 때>(수오서재, 2014)

EMDR요법을 개발한 프랜신 샤피로 박사가 2012년 펴낸 책 “Getting Past Your Past”의 번역서가 재작년 한국에서 출간되었다. <트라우마, 내가 나를 더 아프게 할 때>(수오서재, 2014)는 ‘EMDR을 통해 상처받은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자가 치유 기법’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100여명의 치료 성공 사례를 소개하는 대중적인 보고서인데, EMDR를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의한다.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면서 눈을 양쪽으로 움직이면, 뇌에 갇혀 있던 기억이 처리되어 현재의 여러 증상들이 사라진다.”

 

하지만 이렇게 추상적인 설명만 접해서는 실제로 내게 어떤 ‘작용’이 일어날지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다. 또, ‘머리 속’에서 이러저러한 현상을 일어난다고 해도 그건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날 감정의 소용돌이와는 별개이다. 오늘날 뇌신경과학은 ‘기억’이 작동하는 매커니즘은 고사하고 ‘생각’이 무엇인지에 대한 속 시원한 답도 아직 내놓지 못했다는데, 그래서 ‘머리는 차갑게 마음은 뜨겁게’ 같은 역설적인 표현이 보통 사람들에겐 여전히 와 닿는다.

 

앞으로 몇 달 간 치료라는 이름으로 여러 상처를 들쑤시면서도 치료사의 공식적인 도움을 받는 건 주 1회 1시간 뿐, 나머지 일상생활을 태연하게 해낼 몫은 오롯이 내 것이다. 이 부담감과 착잡함을 누가 알까. EMDR 공식협회 사이트(emdria.site-ym.com, emdr.com)에서 자랑하는 30여년의 ‘성공적인’ 임상 사례 보고, 미국정신의학협회나 세계보건기구 등에서 인정한 치료법(한국에서는 2002년 정식으로 인가했다) 같은 문구가 무색하다.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며 ‘패트로누스’를 불러라

 

첫 번째 시간 받아온 숙제는 의외로 ‘가장 좋은 기억 열 가지’ 적어오기였다. 1)그 기억을 대표하는 긍정적인 장면, 2)지금 느끼는 그 당시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 3)그 기억과 관련해 지금 느끼는 감정과 신체 감각, 이 세 가지가 답해야 할 구체적인 문항들이다.

 

이 단계는 향후 트라우마 기억을 불러올 때 고스란히 같이 불러오게 되는 좌절감, 분노, 공포, 고립감 등의 부정적인 감정에 대응하기 위한 사전 조치와 같은 것이다. 다음 치료 단계에서 혹은 나중에 삶이 힘들 때마다 종종 꺼내보고 긍정적인 기운을 얻기 위한 환자의 개인 기록이니 치료사에게 보일 것을 크게 의식할 필요 없다고도 했다. 이 설명에 나는 얼른 ‘패트로누스’(Patronus)를 떠올렸다.

 

▶ 해리 포터의 패트로누스인 숫사슴. 해리가 늘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것과 똑같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많은 해리에게는 패트로누스 마법을 해내는 게 남들보다 어려웠을 것이다.  ⓒ출처: hypable.com

 

패트로누스는 조앤 롤링의 판타지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마법이다. 독자들은 갑자기 웬 뜬금없는 소리인가 하겠지만 내게는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가 없는 것 같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패트로누스는 아주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며 주문을 외워야만 불러낼 수 있는 반투명한 은빛 형상인데, 마법사마다 다 다른 고유의 개성을 드러낸다. 이 형상은 방어막으로 주로 쓰인다. 특히 행복한 감정을 모조리 빨아들여 그 사람을 영혼이 없는 상태로 만드는 ‘디멘터’ 같은 어둠의 생물을 쫒아버릴 수 있다.

 

책 속에서는 디멘터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순식간에 절망의 나락에 빠지고 세상에 좋은 일은 하나도 없는듯 끔찍한 기분에 시달리며 얼어붙는다. 내게는 앞으로 치료 과정에서 찾아올 트라우마의 기억들, 이를테면 성폭력 가해자의 얼굴이나 목소리가 디멘터 같을지 모른다. 그 때마다 내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소환해 적어둔 이 종이뭉치를 패트로누스처럼 꺼내서 내 내면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상기하며 치료 과정을 잘 견뎌나가야 한다.

 

의외의 자기발견, ‘가장 좋은 기억 열 가지’

 

나는 내가 적은 답변을 보면서 몇 가지 뚜렷한 경향을 발견했다. 먼저, 가족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처음 기억들을 적어 내려갈 때도 이 점을 의식하고 가족들과의 좋은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애써봤지만 상처받은 사건들이 오히려 생각났다. 물론 가족이란 늘 곁에 있는 존재로 잔잔한 일상을 같이 보내기 때문에, 그 시간들이 강렬하게 좋았던 순간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꼽는 ‘가장 소중한 존재’, ‘가장 고마운 사람’인 엄마나 아빠, 형제자매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건 생각지 못한 충격이었다.

 

나는 일찌감치 심리적, 경제적으로 가족으로부터 독립해야 했던 사정이 있다.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 가족들과 서로 주고받은 상처도 많지만, 그렇다고 심각한 문제가 있거나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다. 오히려 ‘남들이 보기에’ 우리 가족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화목한 편이다. 특히 외국에서 나 홀로 떨어져 살게 된 뒤로는 거의 매일 카카오톡으로 소식을 주고받고 있다. 가족에 대한 나의 진짜 심리는 대체 뭘까.

 

▶ ‘가장 좋은 기억 열 가지’ 문항에 대한 답변을 표로 정리한 것. 영어로 쓴 것을 우리말로 번역했기 때문에 감정에 관한 단어들이 어감상 좀 어색하다.   ⓒ 하리타

 

또, 좋은 기억 중에 집단에서의 경험이 없고 혼자이거나 친밀한 대상들과 단 둘일 경우만 세 차례 나왔다. (집회에서의 기억이 하나 있긴 하지만 불특정 다수인 군중 속에서 있었을 뿐,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은 아니었다.) 학교나 회사의 크고 작은 공적인 자리에서 늘 자기표현과 주장이 강했고, 새로운 사람을 사귀거나 무대에 서는 일에 자신이 있는 편인 나는 스스로를 외향적 성격이라고 믿었었다. 주변에서도 늘 그렇게 평했다.

 

그런데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사실은 내가 내성적인 성향을 더 많이 타고 났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내가 긴장감 없이 진정 편안함을 느끼고 정서적으로 충만할 수 있는 순간들은 혼자 있을 때, 혹은 아주 가까운 사람들과 있을 때라는 것을. 이 기억들을 봐도 그렇다. 여럿이 사적으로 어울리는 자리는 지금도 불편하다. 학창시절 친구들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했던 상처가 아직도 상기되기 때문이다.

 

한편 나는 자연 속에 있을 때 큰 행복감을 느낀다. 그 행복감은 ‘강인한’ ‘야성적인’ ‘해방된’과 같은 단어들로 설명된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고 생애 대부분을 아파트에서 살았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부터 나는 콘크리트 틈을 비집고 나온 미미한 들꽃에 코를 처박고 아파트 앞 한 뙈기 잔디밭에서 하루 종일이라도 혼자 놀던 아이였다. 포유류라면 개나 고양이 정도만 직접 볼 수 있는 제한된 환경에 살았지만 동물에 대한 관심이 커서 수많은 동물들의 습성을 줄줄 외기도 했다. 어릴 때 가장 갖고 싶었던 건 시골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그걸 평생 억누르고 살다 이제야 ‘시골 비슷한 곳’에 산다. 돼지농장과 과수원이 지척인 이곳.

 

나의 ‘자유로운 자연인’이라는 이상향은 흥미롭게도 ‘해방감’이라는 감정을 통해 성적 쾌감의 순간들과 맞닿아 있다. 평소 나는 스스로를 누드나 섹스에 대한 열망, 혹은 성적 욕구가 큰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열 가지 중 세 가지나 되는 좋은 기억이 성적인 상황에서 내가 신이 나고 만족감을 느끼며 심지어 예술적으로 고양되었음을 가리켰다. ‘아, 나는 섹슈얼리티가 활발한 사람이구나’ 라는 의외의 자기발견이다.

 

그러고 보면 남들에게 드러내진 못했지만 나는 주기적으로 일종의 의식처럼 나의 누드를 기록하고자 사진이나 영상 프로젝트를 하고, 호르몬 주기에 따라 몸에서 신호가 오거나 아름다운 것에 도취할 때면 언제 어디서든 은밀히 자위를 즐기기도 하는 여자다. 또 삽입섹스를 잘 못한다는 자기 인식이 나도 모르는 새 나를 좀 움츠려들게 했을지라도, 나는 늘 사랑하는 남자 혹은 여자와 뜨거운 섹스를 해왔다.

 

이러한 새삼스런 발견들은 트라우마를 돌아보기 앞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점검의 기회도 되고, 또 트라우마 기억을 ‘재처리’할 때 필요한 긍정적인 자아상/감정으로 요긴하게 쓰일 것 같다.

 

나를 지탱하는 긍정 에너지, 그 원천과 자원

 

이번 단계를 마무리하며 위의 좋은 기억들을 토대로 나의 긍정적인 에너지의 원천과 자원을 밝혀내는 과정도 이어졌다. 나는 내 에너지의 원천이 되는 감정이 자유로움, 강인함, 자신감, 예술적 고양이라고 썼다. 언어로 표현하기에 턱없이 부족할 만큼 수없이 다양한 감정들이 있는데, 이 네 가지가 공통적으로 걸러 나왔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진다.

 

▶ 싱잉볼(singing bowl). 다양한 크기와 재료로 만든 수십 개 볼로 곡을 연주하기도 하는데, 눈감고 들으면 새소리나 물소리와 닮지 않았어도 나는 묘하게 자연 속에 있는 듯한 체험을 한다. ⓒ출처: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사단 pogyosadan.org

 

나를 지지해주고 나의 성장을 이끌어준 사람(인적 자원)으로는 가족 구성원은 없지만 나를 각별하게 살펴주던 선생님 세 분과 가까운 친구들 세 명을 적었다. 또 다른 중요한 자원들로는 동서양 신화의 여신들, 날개도 없이 자유롭게 나는 꿈, 불교의 만다라와 싱잉볼(singing bowl, 명상할 때 쓰는 법구), 히피들이 추앙하는 총천연색의 평화 마크, 달, 폭포, 바다와 같은 대자연의 이미지들을 꼽았다. 흙냄새를 맡으며 땀 흘리는 밭일, 숲 트레킹, 북소리도 내게 큰 에너지를 준다고 했다.

 

자, 이렇게 해서 나의 패트로누스는 세상에 태어났다. 어떤 디멘터가 나타나도 내가 물러서지 않고 계속 길을 갈 수 있도록 이게 충분히 단단했으면 좋겠다. 이제 나쁜 기억으로 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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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3/29 [12:03]  최종편집: ⓒ 일다
 
마요 16/03/30 [19:56] 수정 삭제  
  연재 정말 잘 보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이 도움이 많이 됩니다. 저도 써봐야겠어요. 하리타님 심리치료가 좋은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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