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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함이 ‘여성적’ 특질이라고?
<반다의 질병 관통기> 몸이 아프다는 것과 성별 관념
<여성주의 저널 일다> 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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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병을 어떻게 만나고 해석할 지 다각도로 상상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질병을 관통하는 지혜와 힘을 찾아가는 <반다의 질병 관통기> 연재입니다. -편집자 주

 

몸이 아프다고 말하기가 싫은 이유

 

“아니, 괜찮아.”

 

몸이 아프던 초기에 사람들이 종종 물었다. 많이 아픈지, 도움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그럴 때마다 나는 저렇게 답변했다. 물론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는지 물을 때도 대부분 ‘문제없다, 할 수 있다’고 답했다. 실제 문제가 없는지, 할 수 있는지, 나도 잘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파서 무언가를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왠지 싫었다.

 

나는 아프다고 말하는 걸 무척 조심스러워하고, 싫어하는 편이었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렸을 적 늘 바빴던 부모님에게 사소하게 배탈이 나거나 했을 때 아프다는 말을 해서 귀찮게 해드리면 안될 것 같아서, 가능한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던 기억이 난다.

 

또 하나의 기억은 대학 때인데, 한 남자선배가 “여자애들은 집회 나가기 싫으면 아프다는 핑계를 대더라” 라고 말하는 걸 우연히 들은 적 있다. 그 순간, 불쾌감과 함께 복잡한 감정에 시달렸다. 내가 아파서 무언가를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걸 너무나 싫어하는 건, ‘여성성’에 대한 나의 검열과 연속선상에 있는 걸까?

  

연약한 여자 몸에 대한 칭송, 혹은 판타지

 

‘여성이기 때문에 아프다는 경험이 더 힘든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서야 나의 성별과 질병을 그닥 연결 지어 본 적이 없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찬찬히 생각해 보니, 오히려 여성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일할 나이’에 돈도 벌지 못하고 집에서 머무는 삶에 대해서, 내가 여성으로 호명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나마 사회적 ‘루저’로 취급당하는 게 덜하지 않았을까.

 

몸이 아프다는 건, 소위 말하는 여성성과 더 가까운 것 같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설명하는 단어들을 보면 강인함-나약함, 문명-자연, 정신-육체, 공적 영역-사적 영역 등등이다. 질병을 경험한다는 건 나약함을 경험하는 것이고, 질병인 자연이 의학이라는 문명에 의해 다스려져야 함을 의미하고, 아픈 육체를 강인한 정신력으로 극복해야 함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아프다는 건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고 사적 영역인 집에 머물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TV에선 마르고 연약해 보이는 여자배우에게 ‘보호해주고 싶은 천상여자’라며 추켜세우고, 그 옆에 앉은 건장한 여성에게 ‘여성인 줄 몰랐다’며 희화화한다. 건장한 여성은 스스로 ‘어머, 어지러워요’ 이러면서 쓰러져 보는 게 로망이라고 말하고, 주변에서 (비)웃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키와 몸무게만으로 건강을 평가할 순 없지만 대략 165cm에 55kg 정도의 단단해 보이는 여성보다 165cm에 43kg 정도의 마른 몸에 약간 아픈 것에 가까운 모습이 좀 더 여성다운 몸으로 칭송된다.

 

▶ 2015년 12월 27일 방영된 KBS2 <개그콘서트> 한 장면. 여성 몸은 개그 소재로 희화화되는 경우가 많다.

 

그 유명한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1953년)가 떠오른다. 여주인공이 아니라 남주인공이 질병으로 죽어갔다면 어땠을까? 가녀리고 창백한 소녀를 소년이 업고 개울을 건너는 게 아니라, 가녀리고 창백한 소년을 소녀가 업고 개울을 건너갔다면? 그래도 많은 독자에게 동일한 설렘, 아련함, 촉촉함을 줄 수 있었을까? <소나기>가 국민소설로 불리게 됐을까?

 

어쩌다가 아픈 것, 나약한 것은 여성다운 것에 가깝게 되었을까?

 

사회의 필요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규정된 ‘여성’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BC 427-BC 347)은 환생을 믿었다고 하는데, 유난히 용감한 수사자는 인간 남성의 모습으로 환생할 수 있는 반면, 용감하지 못한 남성은 여성 몸으로 환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다. 즉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건 남성성이 부족했던 벌을 받는 것으로 여겼으며, 심지어 아버지의 정액이 충분히 강하다면 사내아이 낳지만, 약하면 여자아이를 낳게 된다고 믿었다고 한다. 여성의 평등한 정치 참여 가능성을 이야기한 플라톤조차 여성은 남성의 결핍이자, 잔여이며, 나약함의 상징으로 사고했다.

 

그보다 한참 후인 18-19세기에 들어와서도 의사들은 여성이란 월경 때문에 몸이 허약한 존재라며, 교육 받는 것 같은 심한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또, 교육 받은 여성에게 생기는 독립심이 출산 능력을 방해한다고 여기기도 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사회(남성)의 필요에 따라 여성의 몸을 나약함(열등함)으로 설명한 주장들은 너무나 흔하다.

 

▶ 2차 세계대전 당시 여성노동을 장려하는 포스터.

19세기 미국에서 의사들은 여성에게 ‘난소에 필요한 정력을 다른 데 쏟으면 안 된다’는 경고를 했고, 상층 계급 여성들에게는 몇 달씩 심지어 몇 년씩 바깥활동을 하지 않고 침대에만 누워 사는 삶을 찬미하는 ‘병약 숭배’가 강요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대는 소녀부터 성인까지 많은 여성들이 공장, 상점, 다른 사람의 집에서 힘든 노동을 통해 삶을 이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이에, 당시 교육학자는 여성 직공이 여학생보다 병치레를 덜 하는 이유는 ‘뇌를 덜 쓰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사회적 모순을 봉합하려고 했다고 한다.

 

20세기 들어 1,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남성들이 전쟁터로 나간 자리를 채우기 위해 여성 노동력이 필요해졌다. 그러자 월경이 임금노동이나 사회생활에 전혀 불리한 조건이 아님을 밝히는 연구 발표가 속속 등장했다. 전쟁이 끝나자 돌아온 남성들이 일자리를 필요로 했고, 여성들을 일자리에서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필요해졌다. 결국 다시, 월경 때문에 여성은 허약한 몸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런 나약함은 사회생활에 적합하지 않다는 연구 발표가 이어졌다.

 

이처럼 역사 속에서 사회는 오랫동안 여성 몸을 나약함으로 또는 나약하지 않음으로 설명하면서, 교육이나 노동의 기회를 통제하는 합당한 근거로 이용해왔다. 현대 사회는 여성 몸 자체를 이유로 교육이나 노동에 제한을 두는 일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나약함을 여성 매력의 요소로 평가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이 아프다는 건 남성에 비해 사회적으로 더 잘 수용되는 것 같다.

 

“계집애처럼 굴지 마, 겨우 그 정도로”

 

이에 반해 남성들은 아프다는 걸 나약함, 남성성의 훼손으로 인지하는 것 같다. 의료인들이 쓴 글을 보면, 남성이 여성에 비해 병원을 찾는 경우가 더 적고 치료에 소극적이라는 내용이 많다. 남성들은 몸에 이상신호가 왔을 때 참고 참다가 병원에 오는 경우가 많고, 병원에 와서도 질환으로 인한 큰 증세만 설명할 뿐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자신의 불편함을 호소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고혈압이나 당뇨처럼 일상적 관리와 약물 복용이 필요한 질환에 대해서도 남성이 여성보다 치료에 소홀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한 현대인이 높은 유병율을 보이는 질환인 우울증은 자살로 이어질 수 있는 치명적인 병임에도, ‘정신이 나약’해서 생긴 병으로 인식되고 ‘여성적 질환’이라고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따라서 남성의 경우 실제 우울증을 갖고 있더라도 우울증 진단을 받고 치료로 이어지는 경우가 여성에 비해 더 낮다는 자료도 제시되고 있다.

 

남성들은 아프다는 사실 즉 나약함을 인정하는 걸 어려워하고, 어디가 불편하다고 세세하게 말하는 것이나, 일상적으로 약을 챙겨먹고 몸을 돌보는 게 ‘남자답지 않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또 한편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몸을 수치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토요일 오후 전철에서 본 두 장면이 떠오른다.

 

농구공을 든 한 무리의 남자아이들이 땀 냄새를 풍기며 왁자하게 지하철에 탔다. 서로 밀치며 격하게 장난을 치던 중 한 남자아이가 “야, 아파.” 라고 말했고, 곧이어 다른 남자아이가 “계집애처럼 굴지 마, 이 XX야. 겨우 그 정도로!” 라고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프다고 말했던 남자애는 “아이, 씨-” 짧게 뱉고는 가방을 바닥으로 격하게 내던지며 상대 남자아이를 노려봤다. 순간의 침묵이 지나가고, 계집애처럼 굴지 말라고 말했던 남자아이는 상대 아이의 등을 가볍게 쳤고, 그 둘을 포함한 무리의 남자아이들이 다 같이 웃었다.

 

내 눈에는 계집애처럼 굴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남자아이가 가방을 거칠게 던지고 강하게 노려봄으로써 ‘계집애가 아님’을 증명하자, ‘그럼 그래야지, 넌 남자야’ 라고 상대에게 승인받게 되고, 이제 ‘남자들끼리’ 호기롭게 웃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에게 나약함 혹은 아프다는 표현은 ‘계집애 같은 것’으로 당연히 지양해야할 덕목인 것이다.

 

전철 또 한쪽에는 젊은 남녀 커플이 보였다. 남성은 여성의 몸을 뒤에서 반쯤 안고 있었는데, 여성이 “나는 피부가 너무 약해서 햇볕이 힘들어” 라고 말하자, 남성이 여성의 몸을 움직여서 햇볕과 반대 방향으로 돌려세웠다. 여성은 온몸의 힘을 빼고 남성의 몸에 기대어 있었고, 남성은 여성의 몸을 마치 줄 인형을 조정하듯 통제하고 있었다. 이어서 여성은 “다음 주에 과 엠티 가도 돼?”라고 물었고, 남성은 “안 돼”라고 답했다. 이어지는 몇 가지 대화도 주로 질문과 승인으로 이어졌는데, 둘 다 그런 ‘역할’이 흡족한 표정으로 보였다.

 

그 커플의 모습은 반쯤은 장난스러운 서로의 애교였을 것 같지만, 여성은 나약함을 매력의 자원으로 여기고, 남성은 통제하는 걸 쾌감으로 여기는 것 같아 보여 씁쓸했다. 여성은 여왕처럼 상대에게 보호받는다는 착각을 할 지 모르지만, 남성은 왕처럼 상대를 마음대로 통제한다는 느낌을 즐기지 않을까? 라는 상상이 스쳤다.

 

▶ 나약함이나 아픈 것은 성별과 상관없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모든 생명체의 특질이다.  ⓒ제작: 조짱

 

누구나 아플 수 있고, 그것이 자연스럽다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아프다는 것에 대해 사회적으로 더 잘 수용 받는 것 이면에는 여성은 나약하다, 열등하다는 전제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미치자 소름이 끼쳤다. 이 사회에서 나약함은 보호가 필요함 즉 통제가 가능함, 그러니까 평등이 불가한 관계를 전제한다. 우리 삶 구석구석 젠더가 공기처럼 물처럼 스며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누구나 나약할 수 있고, 누구나 아플 수 있고,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약하고 아파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얘기하고 싶다. 하지만 약자에게 분노를 투사하고, 심지어 살해하고, 정당화하고, 그게 반복되는 사회에서 그런 말은 심장이 쓸려 나간 듯 공허할 뿐이다.

 

나약함이나 아프다는 것은 여성의 특질이 아니고, 굳이 말하면 모든 생명체의 특질이다.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건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는 명제를 인정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본다. 여성의 나약함이나 아프다는 것이 더 잘 수용되는 것이나, 남성의 나약함이나 아프다는 것을 남성성의 훼손으로 보는 것이나, 성차별과 성역할의 연장선상에 있을 뿐이다.

 

추모) 강남역 살인 사건 피해자 분의 명복을 빕니다. ‘생명체는 나약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이라서 나약한 건 아니다. 우리는 강하다, 연결될수록 더 강해진다.’

 

※ 참고 문헌

낸시 홈스트롬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역자 유강은, 메이데이, 2012)
니콜 바샤랑 외 <인문학 여성을 말하다>(역자 강금희, 이숲,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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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5/31 [00:12]  최종편집: ⓒ www.ildaro.com
 
독자 16/05/31 [13:35] 수정 삭제  
  동감이에요.. 약한척하게 키우면 진짜로 약해지기도 합니다. 여자아이들 운동에 남자아이들만큼 노출되지 않고 크는 거. 그것도 차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리 16/06/01 [11:48] 수정 삭제  
  잘읽었습니다
빨간 16/06/02 [00:59] 수정 삭제  
  읽다보니 반성을ㅜㅠ그게 동전의 양면인것 같기도 해요. 나약함 이미지가 결국 족쇄인데 그걸 매력이랄까 자원으로 써먹기도 하고. 꼭 연애나 그런거 아니래도. 잘 읽었습니다.고마워요
공감 16/06/10 [08:51]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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