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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회에서 길거리 성추행의 정치학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독일에서 심리치료하기⑪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하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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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에 거주하는 20대 후반 여성 하리타님이 심리치료 과정을 거치며 탐색한 섹슈얼리티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자신의 상처를 짊어지고 국경을 넘어 문화적, 사회적, 제도적 차이 속에서 삶의 변화와 사회와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실천해가는 여정이 전개됩니다. –편집자 주

 

성추행을 당한다는 것은…

 

지난 칼럼에서 나는 개인의 트라우마를 ‘용서’라는 이름으로 섣불리 덮어버리기를 거부하면서, 그 트라우마를 만든 배경에 대한 ‘사회적 분노’를 토로했다. 나에게 폭력을 가한 사람뿐 아니라 무수한 가해자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폭력에 침묵하거나 은폐하거나 부추기는 사회에 분노하는 것이 용서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말이다.

 

특히,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폭력에 대해서는 사회적 분노가 지금보다 더 지속적으로, 더 거세게 일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중에서도 길거리 성추행-모든 여성들이 살면서 여러 번 겪는다고 일반화시켜도 무리가 없을 만큼 흔하며, 모든 문화권과 모든 시대에 존재해온 고질적인 폭력으로서의 성추행-에 대해 2016년 현재, 독일 남부 소도시에 거주하는 아시아계 젊은 외국인 여성으로서 얘기하고자 한다.

 

성추행을 당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심각한 성폭력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에게 발생하면 더욱 파괴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체험하고 있다. 거리를 걷고, 주말 저녁 술 한잔 하러가고, 모처럼 원피스를 입고 나들이를 하는 것처럼 매우 일상적인 차원에서 예고 없이 빈번히 성추행을 당하는 일은 “아 뭐야, 재수 없어”로 끝나지 않는다. 그때마다 그 ‘더 심각한’ 성폭력 트라우마가 연쇄적으로 상기되고 강화되고 확장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스쳐가는 눈빛이든, 잠깐의 손길이든, 툭 던진 한마디나 위협적인 몸짓이든 간에, 남성들에 의한 폭력은 한데 뒤엉켜 거대한 검은 형상으로 우뚝 서서 나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쉽게 억누르기도 쫒아내기도 어려운 그 형상이 불러일으키는 남성에 대한 불안-공포-혐오는 한 패가 되어 내 생존본능에 새빨간 위험 신호를 보낸다.

 

독일 소도시에서 겪는 길거리 성추행

 

▶프랑스 남자 토마 마티외 그림책 <악어 프로젝트: 남자들만 모르는 성폭력과 새로운 페미니즘>(푸른지식, 2016) 중. 포식자 악어들의 껄떡대는 말들과 여성 성기를 움켜쥐는 길거리 성추행. 프랑스도 이 꼴인 모양이다.

“저는 23살 여자입니다. 저는 참 무섭습니다. 길을 걸을 때, 특히 밤이고, 골목길일 때, 남자가 걸어오면 무섭습니다. 혼자 자취를 하는데, 7층에 살지만 어떻게든 창문을 타고 넘어올까 무섭습니다. 화장실에 갈 때면 누가 옆 칸에서 몰래 찍고 있지 않을까 무서워 아래 위를 번갈아 쳐다봅니다. (…) 누군가는 저에게 ‘예민하다’고 말합니다. 네, 저는 예민한 여자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이렇게 경계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언제 칼에 찔려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늘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23살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추모현장에 붙은 포스트잇에 적힌 내용의 일부다. 이 글귀를 번역해 독일여성 몇 명에게 들려줬다. 다들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한다. 강남역 살인 사건의 여파로 새삼스레 재조명되고 있는 길거리 성추행 문제는 뿌리 깊은 범지구적 사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 독일에서도 종종 길거리 성추행을 당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주로 서울의 만원 지하철이나 클럽, 노래방, 주점이 즐비한 번화가에서 남자들의 노골적 시선이나 고의적인 신체 접촉 같은 성추행을 겪었다. 지하철이 없고 인구 밀도가 적은 소도시인 이곳에서는 밤의 번화가 뿐 아니라 한적한 낮에도 성추행을 당한다. 수풀이 우거진 개천변, 지하도, 공원 같은 곳들에서.

 

남자들은 아래위로 훑는 시선과 함께 휘파람을 불고, 어김없이 경박한 어투로 “니하오!”를 외치며 들이댄다. 혼자보다는 여럿이 몰려다니는 남자들의 소행이 많다. 내가 조금 움츠러드는 기색을 보이거나 못 들은 척하고 지나가려 하면 더 기가 살아서 목소리를 높인다. 한참 쫒아오며 툭툭 건드리는 놈들도 있다.

 

인상을 쓰며 째려보거나 몇 마디 맞대응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 잠깐 주춤하는 듯하다가도 이내 내가 멀어져 갈 때까지 더 길길이 날뛴다. 분하고 억울하게도, 길건 짧건 치마를 두른 날, 잘 보이는 액세서리를 한 날은 더하다. 나는 화장을 안 하고 향수도 안 뿌리지만, 그 둘이 보태지면 더 많은 성추행을 당하리라 짐작된다.

 

작년에 대학원 공부를 함께하는 케냐 출신의 흑인친구는 대중교통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짧은 밤길에 어떤 남성에게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졌다. (천만다행으로 치명적인 부상은 입지 않아서 신체적 외상은 곧 회복되었다.) 흑인 혐오인지 여성 혐오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확인할 길 없는 범죄였다. 독일여성들의 반응처럼, 한국의 독자들도 이와 같은 얘기가 새롭지는 않을 것이다. 독일의 도시-더구나 대도시도 아닌 곳의 치안은 다른 유럽 도시(파리, 런던, 로마, 바르셀로나 등)보다 한결 나은 편이라는 데도, 내가 사는 현실이 이렇다.

 

젠더, 인종, 문화와 교차하는 편견들

 

당하는 여성으로서,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편견이 하나 생겼다. 늦은 밤 혼자 귀가할 때, 축구경기를 보며 흥분하는 남자들이 모여 있는 술집에서, 남성관객이 많은 공연장에서, 나는 내 시야에 들어오는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고 경계하게 된다. 또 특정한 외모나 행동에 대해서 마치 조건반사처럼 불안감과 공포심, 나아가 혐오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른바 ‘마초남’ 코드. 과장된 문신이나 피어싱, 밀리터리 패션, 술에 취해 풀린 얼굴과 비틀대며 활보하는 몸짓, 거리에서 성기를 내놓고 소변보기, 무리지어 다니는 10대 후반 청소년들(이곳 십대들은 교복을 입지 않고 술담배를 공공연히 많이 하고 발육이 빨라서, 보기에 성인남자와 엇비슷하다)이 여기 해당된다. 이들을 목격하거나, 지나치거나, 대면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불쾌-불안-초조 같은 감정 상태는 그 순간이 지나가도 오래 지속되곤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마초남’ 편견은 으레 통용되어 온 것이라 사회적으로 크게 논란의 대상은 아니다. 문제는 인종과 출신 문화권을 기준으로 한 편견이다. 잠재적 피해자로서 나는 다음 문장에 어느 정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북아프리카/ 아랍/ 무슬림계 남성들은 빈번한 성추행 가해자다.’

 

내 경험만 놓고 보더라도, 가해남성들이 백인 유럽인인 경우는 아직 없었다. 대다수가 북아프리카/ 아랍/ 무슬림 이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이와 유사한 ‘직접 경험’ 사례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회자되기도 하고 온라인 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여러 시간과 공간에서 수집된 부정적인 사례들은 하나의 편견이 되어 축적되고 공유되고 강화된다.

 

▶ 재독한인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 중 일부. ‘아랍인’들로부터 절도와 추행을 당한 글쓴이는 편견을 의식하면서도 분노와 혐오를 드러냈다. 댓글은 아시아 여성으로서의 입장을 독일여성과 구분해서 말하고 있다. ⓒ출처: 베를린 리포트

 

비슷한 편견은 독일 미디어와 여론에도 자주 보인다. ‘북아프리카/ 아랍/ 무슬림 배경의 이주민 남성들은 젠더평등 의식이 현저히 떨어지며, 이들 때문에 독일 내 여성폭력이 증가하고 있다’는 정치적 프레임이다. 주로 우파 성향, 민족주의 성향의 미디어를 통해 최근 몇 년 동안 꾸준히 유포되어 왔다. 이러한 여론은 반(反)이주민, 반(反)외국인, 반(反)난민 정서와 결합되어 편견을 공고하게 만드는 장치가 되어왔다.

 

특히 2016년 새해 첫 날, 독일 퀼른 등에서 집단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고 용의자 상당수가 해당 지역의 이주민이나 난민 신청자들로 밝혀졌을 때는 한동안 모든 매체가 이 정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강간(rape)과 난민(refugee)의 합성어인 ‘Rapefugee’가 회자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한 민족을 말살하는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정책을 온 나라가 협력해 추진한 역사를 가진 독일의 풍토에서, 독일 국민들은 인종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 혐오 비슷한 얘기만 나와도 집단 알러지를 일으킨다. 독일의 학교에서는 역사 시간에 ‘죄의식을 가르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따라서 개개인은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상당히 조심스럽다. 체면 때문에, 혹은 인종차별주의자 소리를 들을까 두려워서, 사람들은 자신의 부정적 견해를 감추는 경우가 많다. 특정 인종이나 문화권에 대한 독일인들의 편견은 실은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그 규모와 깊이가 더 클 것이다.

 

누가 피해자가 되고, 누가 가해자가 되는가

 

여기서 나는 먼저, 편견은 사실 가해자 쪽에도 작용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바로 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이다. 나는 이것 때문에 우리는 더 자주 성추행의 표적이 된다고 의심하고 있다. ‘검은 눈, 검은 머리, 작은 체구’의 아시아 여성에 대한 흔한 편견은 “아시아 여성=치마와 화장 등 꾸밈새가 화려함=수줍음 많고 수동적임”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아시아 여성들은 (잠재적) 가해자들에게는 더 만만한 공격 대상이다. 어차피 이 여자들은 찍소리 못하고 당해줄 거란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언어가 서툴고 현지 법규에 어두워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법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같은 외국인이어도 피부색과 생김새가 비슷한 서양 여성들에 비해 한눈에 골라낼 수 있다. 아쉽지만 아시아 여성들이 서양 여성들에 비해 대체로 체구가 작고 의사 표현이 덜 활발하다는 경향성은 ‘나약한 이미지’로 연결된다. 편견은, 여러 방향에서 교차되고 있다.

 

▶ 길거리 성추행을 비판하는 포스터들. 내 옷차림은 초대장이 아니다, 성추행은 칭찬이 아니다 등. 아시아 여성의 얼굴 밑에 “나는 당신의 게이샤, 중국인형, 아시안 페티쉬가 아니다”라고 적힌 게 눈에 띈다. ⓒ출처: mic.com

 

내가 앞서 나의 편견이 자연스럽게 생겼다고 말한 것은, 편견은 나쁜 것이니 마땅히 없어야 한다고 간단히 얘기하는 많은 ‘지성인’들을 겨냥한 것이다. 편견은 사회적으로 해악을 끼친다. 현실을 보는 시선이 고정되어 버린다는 점에서, 편견은 제약이고 오류이다. 다수가 편견을 가질 때, 편견어린 현실 인식이 실제 현실에 자기예언과도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하지만 길거리 성추행의 맥락에서 물어 보자. 여성의, 남성에 대한 편견은 애초에 왜 생기나?

 

나, 피해여성은 직접 겪은 경험을 우선적인 데이터로 삼아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의 이미지를 만든다. 다음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이때 가해자들 간의 공통점이 판단 기준이 된다. 눈에 보이는 기준만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편견이라고 쉽게 정의한다면, 이 ‘편견 생산 기제’는 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사람의 인지활동에서 빈번하게 쓰는 기능이 사물이나 개념을 공통점, 차이점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잠재적 피해여성은 자신의 공통점 분류 능력을 활용해, 감각기관으로 들어온 수많은 정보들을 효과적으로 걸러냄으로써 ‘누가 잠재적 가해자’인지 나름의 판단을 내리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나는 ‘편견에 치우친 사람’이라는 비난에서(이 비난은 내 내면에서도 자주 들려온다)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수도 없이 많은 편견이 있고, 편견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들이 여러 형태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이 길거리 성폭력 사안에 있어서만큼은, 자기방어에 많은 에너지를 써야만 하는 위험 때문에 나오는 생존 본능으로 먼저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진 사고’ 어쩌고 하는 비난부터 할 게 아니라.

 

유럽인 백인친구들과 논쟁하다

 

요즘 가까운 친구들과 있을 때, 길거리 성추행을 둘러싸고 내가 가진 ‘편견’의 문제를 자주 대화 소재로 끄집어낸다. 계속 고민하는 지점이기도 하고, 비(非)아시아, 비(非)여성들의 관점이 궁금해서다.

 

한번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금발 백인여성인 M에게 내 고민을 얘기했다. 나도 너처럼 인종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에 반대하지만, 내가 당한 성추행 가해자들의 정체성 때문에 그런 정치적 신념에 균열이 와서 괴롭다고 말했다. 그러자 M은 평소 내게 보이는 공감적 태도 없이 다소 건조하게 답했다. 자신이라면 그때 가해자들이 이곳에서 이주민, 소수자로서 겪는 아픔과 어려움을 생각해볼 것 같다고.

 

의외의 답에 나는 아연실색했다. 그리고 이내 발끈했다. 그들에게 성추행을 당한 적이 없는 당당한 체격을 가진 금발의 백인 유럽여성인 너는 그런 ‘고귀한’ 포용적 태도를 취할 수 있겠지만, 일상적으로 그런 일을 겪고 사는 나는 바로 네가 연민하는 그 ‘소수자’들이 자기 발아래 두는 먹잇감인 셈이라고.

 

M은 내가 그녀의 아킬레스건인 ‘백인 유럽인 특혜’를 입에 올리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렇지만 내 말에 기분이 상한 티가 역력했다. 우리의 대화는 그 자리에서는 어떻게든 무마가 되었지만 나는 곱씹어볼수록 친구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어 나중에 문자까지 보냈다. “네 말대로 그들이 나와는 다른 측면에서 더 어려운 처지일 수 있다는 점은 잘 알겠어. 그런데 자기 처지가 어렵다고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어? 폭력은 그 자체로서 그냥 나쁜 거야. 그런 식으로 남성의 폭력을 더 용인해선 안 돼.” 친구도 낙담한 내 심정을 마침내 공감했는지 며칠 뒤 전화를 걸어왔다. 한참 길게 통화하고 나서야 마음이 풀렸다.

 

매주 나가는 페미니즘 모임에서 만난 H는 스웨덴 출신의 백인여성이다. 내 고민을 듣고서 그녀는 자기가 겪은 혼란스러운 경험을 들려줬다. H는 최근 시리아 난민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남성을 대낮에 길에서 마주쳐 한참을 대화한 적이 있다고 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 남자가 ‘독일에 망명 와서 제일 어려운 점은 친구가 없다는 것’이라며 외로움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나도 남잔데 여자가 필요하다’, ‘당신같이 참 아름답고 마음씨도 고운 여자가 좋다’며 눈을 빛내더라는 것이다.

 

그녀는 기분이 확 상해서 자리를 뜨면서도 혼란스러웠단다. 저 사람의 상식 선에서는 이게 성추행이 아니고, 자기네 문화권 여성들에게는 하지 않는 예외적인 존중의 태도로 진심어린 칭찬을 한 것뿐이 아니었는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를 마냥 관용해야 하는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자국에서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을 환영하고 복지국가 시민으로서 윤리의식을 갖춘 그녀도 성폭력에 있어서는 약자인 여성이며, 스웨덴이나 독일보다 성평등 지수가 훨씬 뒤떨어진 곳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에게 공감하는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던 것이다.

 

백인남성들의 생각을 듣다

 

한편, 아버지는 안정적인 직장에서 평생 돈을 벌었고 어머니는 육아와 살림, 돈벌이를 병행하는 ‘전통적’ 가정에서 자란 백인남성 N은 대학 때 페미니스트 여성들과 어울렸고, 큰 차별 없이 자란 여동생과 여자친구를 통해 ‘여성’을 간접 경험할 기회가 많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N은 주변에 성추행 피해 사례가 별로 없었다며, 내 이야기에 크게 공감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N은 오히려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로 낙인찍힌 북아프리카/ 아랍/ 무슬림 남성 그룹의 심리에 관심을 가지고 자기만의 해석을 내놓았다.

 

간단히 말해 독일 사회에서 널려있는 성(sex)과 관련한 문화적 코드들이 그들에게는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개방적이라서, 잘못된 신호(wrong signal)를 주는 것 같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정류장마다 대문짝만하게 붙어있는 콘돔 공익 광고에도, 학생들이 보는 캠퍼스 잡지에도, 섹스에 대한 묘사나 담론이 별 여과 없이 전면에 등장한다.

 

▶ 트램 정거장에 게시되어 있는 건강한 성생활을 권장하는 공익광고.  왼쪽은 “전 남친이 아직도 당신을 가렵게 하나요? 의사에게 가세요”라는 문구와 질가려움증을 겪는 여성 이미지. 오른쪽은 “위 혹은 아래. 콘돔을 사용하세요”라는 문구와, 오르고 내리는 엘리베이터 그림.  N은 이 광고가 너무 직접적이고 천박한 느낌이라 마음에 안든다고 했다. © 하리타

 

이슬람권에서는 섹스는 물론 성에 관한 전반이 아직도 철저한 금기인데, 이러한 문화권에서 살다가 온 남성들이 어느 날 갑자기 독일에 떨어져 주변을 둘러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냐고 N은 반문했다. ‘아 섹스가 이렇게 가볍고 캐주얼한 거야? 그럼 여기선 맘껏 즐길 수 있겠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고 했다. N의 논리를 정리하자면, 다른 문화권에서 온 이주민 남성들이 행하는 성추행은 남성으로서 누리던 수많은 특권을 하루아침에 잃고 규범과 가치관에 혼란을 느끼는 와중에 나오는 이상행동이라는 것이다.

 

또 한 명의 백인남성 K는 순순히 인정했다. 자신은 덩치 큰 백인남자라서 내가 느끼는 감정을 모른다고 말이다. 그는 자신의 신체적 특징에서 오는 이점을 부정할 수 없고, 그 때문에 치안이 좋지 않은 중남미 지역을 여행할 때도 자신은 한 번도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고도 했다.

 

K역시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자국에 이주민이나 외국인, 난민이 많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 지지하는 입장이다. 그는 성범죄 문제를 핑계 삼아 외국인 혐오 정서를 표출하는 무리들이 역겹다고 했다. 이주민이 이렇게 많지 않을 때에도 백인 독일인 남성에 의한 여성폭력은 늘 있어왔고, 지금도 파스나흐트(Fastnacht, 기독교문화가 많이 남아있는 독일 남부의 카니발 축제)나 가을 옥토버페스트(맥주 축제) 때마다 꼭지가 돌도록 술을 마신 남자들이 추행, 강간, 폭행을 일삼는데, 하도 닳고 닳은 문제라 더 이상 신문에 나오지 않는 것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마치 이주민들이 새로운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외국인 혐오 세력들이 위선을 떨고 있다는 것이다.

 

K의 이야기는 시원한 지적이고, 나도 동의한다. 서구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남성들은 젠더 평등이 좀더 구현된 사회분위기의 압력과 강한 법적 구속에 길들여진 것뿐, 뒤틀린 욕망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걸 여기서도 여전히 성행하는 포르노와 성매매, 가정폭력 사건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외국인, 이주민만 탓하는 건 위선’이라는 양심선언이 현실에서 곪아가는 인종 갈등과 성폭력 피해를 해결해주진 못한다.

 

낡은 관념의 집을 허물기 위한 실천들

 

나는 길거리 성추행 문제에 있어서 이 인종적 편견을 그만두고 싶다. 아니, 그만둔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깊이 고찰하고 행동하고 싶다고 말하겠다. 성적으로 나를 학대하고 추행한 남성들에 대한 용서는 유보하겠다는 입장이 내 안에서 명확한데 반해, 아직 무엇도 저지르지 않은 잠재적 가해자로서의 남성들에 대한 편견은 껄끄럽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적대감과 경계심은 일상 생활에 결코 긍정적 요소가 아닐뿐더러, 무수한 잠재적 우호와 연대의 기회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또한 안 그래도 이 사회에 넘쳐나는 편견의 벽과 혐오의 물결에 내 몫까지 보태고 싶지 않다.

 

허나, 이것은 진정한 나의 욕망인가? 아니면 내 머릿속에 있는 쿨한 지성인, 간지 나는 좌파 이미지에 불과한가. 아니면 좀 배우고 깨쳤다고 똘레랑스(관용)의 시혜를 베풀어보겠다는 심보인가. 나는 아직 ‘덜 당해봐서’ 관용, 포용, 화합을 말할 수 있는가? 잘 모르겠다. 다만 궁극적으로 나는 경계를 넘나들며 젠더에 대한 낡은 관념의 집들을 허물고 새로 평평하고 열린 집을 짓는 ‘목수’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다.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궁리해본다. 무시와 회피 말고, 자책이나 자기검열 말고, 우리의 전략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대면해야 한다. 더 큰 공격을 당할 위험 부담이 따르고 심장 떨리는 공포에 에너지 소모가 크더라도, 자꾸 더 대면함으로써 가해남성들의 견고한 사고를 깨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대면해야 할까. 얼굴 붉히며 성난 언어로 꾸짖기, 과장된 몸짓으로 대꾸하기. 신고하겠다고 으름장 놓기? 내가 속한 페미니즘 모임에서는 비꼬기와 미러링(거울처럼 상대방의 언행을 똑같이 따라 해서 상대에게 역지사지해볼 기회를 주는 것), 그리고 가시 박힌 유머가 성추행 가해자들의 허를 찌르는 효과가 있었다는 얘기도 오갔다. 공격성이 덜하되 메시지는 더 분명하기 때문에 가해자들이 쪽팔려서 꼬리를 내리더라는 것이다.

 

50대인 나의 심리치료사 베아트리체는 시계를 거꾸로 돌린다. 알리스 슈바르처(Alice Schwarzer: 독일의 페미니즘 잡지 ‘엠마 Emma’의 창립자이자 발행인) 등의 페미니스트들이 1970년대 독일에서 여성들의 안전한 길거리 보행을 위해 운동하던(캐나다에서 시작된 슬럿워크 Slut Walk나 우리나라의 달빛시위와 비슷한 맥락) 시절을 잠시 소회했다. 그러더니 내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프레임을 제안했다.

 

남자들을 볼 때 인종이나 출신 배경을 암시하는 생김새에 대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행위를 기준으로 한 ‘좋은 혹은 나쁜 남자’라는 범주만 두라는 것이다. 이는 한 개인이 속한 수많은 층위와 갈래의 다중 정체성들에 민감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자체 내장된 필터링 습관을 거부하는 것이므로 많은 노력이 요구될 것이다.

 

▶ 동네 축제에서 자신이 속한 나라의 전통춤을 선보이는 난민들. 음악이 시작되길 기다리며 검은 옷을 입고 일렬로 서 있다. 남녀노소 흥겹게 따라 추다가 마지막에 사람들이 둘러선 거대한 원이 만들어졌다.  ⓒ 하리타

 

나는 또 다른 실천으로써 북아프리카/ 아랍/ 무슬림 난민 남성들과 만날 수 있는 프로그램에 나가보았다. 내가 편견을 갖고 바라보던 난민 남성들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지속적인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과정이었다. 정부가 시간과 예산을 핑계로 대충 지어준 무미건조하고 삭막한 수용소보다는, 민간 차원에서 카페나 주민센터 공간에 다과와 보드게임을 준비해놓고 사람들을 초대하는 자리가 훨씬 편안하고 즐겁다.

 

축구 얘기는 백발백중 안전한 대화 소재인데 아쉽게도 내가 전혀 관심이 없다. 이들 중에는 종종 한국 드라마를 거론하는 한류 팬들도 있다. 독일어나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연신 스마트폰 번역 앱을 두드리기 바쁘고, 청하지도 않은 가족 사진을 보여주며 나의 시덥잖은 얘기에도 즐거워한다.

 

물론 몇 번 봤다고 사람 속내를 어찌 알까. 쿠키를 사이에 놓고 한가로운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는 내게는 한없이 부드러워도, 이들이 자기 부인을 어떻게 대할지, 길 가는 여자들의 훤히 내놓은 살결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내 마음이 한결 누그러지는 것을 느낀다. 오길 잘 했다.

 

다시 길거리 성추행 문제로 돌아와서, 우리는 안전하지 않은 사회 시스템을 폭로하며 거기에 균열을 내고, 끊임없이 다른 세상을 그려내는 작업을 계속해야할 것이다. 여성학은 길거리 성추행이 사소하고(trivialization) 평범한(normalization) 영역이라는 평가절하를 거부하며 더 크고 중요한 담론들을 계속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연구소나 시민단체들은 성추행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대상으로 예방과 대응, 회복과 교육 프로그램 등을 더 적극적으로 실행해나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친구끼리, 가족과 학교와 동네와 직장에서 여성들끼리 더 말해도 된다고, 다 말해버려도 된다고, 서로 격려하며 더욱 풍부한 증언과 주장들을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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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7/04 [10:02]  최종편집: ⓒ 일다
 
4208 16/07/04 [14:09] 수정 삭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나에게 해를 가한 가해자가 또다른 소수자일 때 나는 어떻게 분노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이런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그저 눈을 돌리며 복잡한 생각을 피해왔던 것
애독자 16/07/04 [16:09] 수정 삭제  
  이 주제로 고민이 많았는데, 현지에서 직접 체험하며 고민하고 행동하는 하리타님의 글을 읽으니 답답했던 마음이 좀 뚫리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들 늘 잘 읽고 있습니다!
cosmos 16/07/04 [16:21] 수정 삭제  
  편견을 깨기 위한 실천에 감동 받았어요..
warubi 16/07/05 [03:46] 수정 삭제  
  현재 독일에 거주하고 있고, 얼마전 함부르크에서 길거리 성추행을 당한 사람으로서 굉장히 공감이 가는 얘기네요
good 16/07/05 [09:35] 수정 삭제  
  강력한 실천 중이시라는 생각입니다! 혐오와 공포는 '잠재적 기회'를 뺏았아갑니다.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고민 중에 지혜 얻어갑니다!
지나가다 16/07/06 [20:00] 수정 삭제  
  네오나치에 의한 경험담, 간접체험은 빠졌네요. 아무래도 사시는 곳이 풍족한 남독일이고, 구동독지역이 아니라서 그럴까요?
불루 16/07/07 [13:37] 수정 삭제  
  아 정말 공감!! 가해자가 장애인, 노숙인인 경우도 무척 갈등이 되었습니다. 인종 편견이 교차하는 문제.., 정말 생각할 거리 많이 던져준 기사네요..
호러블 16/07/07 [18:00] 수정 삭제  
  일다가 이 글에 깊은 공감을 했고 그러니 이 글을 올린 것이겠고 정말 놀랍군요! 북아프리카, 무슬림, 아랍 난민 남성이라는 구체적 카테고리화를 통해서 남성을 세밀히 분류하고, 나에게 피해를 입힐지도 모르는 가해자들이 소수자라는 점을 고려해 그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 프로그램에 나가 지속적 관계 맺기를 '실천' 했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이군요! 어디서부터 짚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공간스런 혼란이지만 첫째, 한국 남자에게 피해를 입어 한국 남자에 대한 피해를 입은 여자는 그 편견을 없애기 위해 한국 남자와 지속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프로그램에 나가야 할까요? 여기서 지속적 관계 맺기 프로그램에 나간다는 게 '실천'에 해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모욕적인 일이고 이미 남성에 여성 피해자에게 가하고 있는 폭력인지 인지 할 수가 없으신지요? 만약 소수자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폭 넓은 배려심! 을 발휘해야 하고! 그러니 한국 남자와 그 남자들은 다르다! 라고 한다면 이것은 더욱 심각한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아닐런지? 둘째, 왜 나에게 피해를 입힌 자들에 대한 편견을 지니고 살아서는 안 되는지요? 단 한 번의 역한 경험만을 지녔다 하더라도 자신의 고통을 타인에 의해 재단질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기사는 그동안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포용심을 갖고 '여자답게' 행동하라는 것에서 무슨 다른 점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편견을 지니게 하는 인간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인류의 평화, 가해남이 아닌 더 많은 남성들의 안위와 평화를 위해서! 상냥해야 하고 이해심 넓어야 하며 상대 남성을 보살펴야 한다는 것 아닌가요! 아 제발, 여자에게 더 이상 무엇을 하라 고 하지 마십시오. 피해자의 사상 행동거지를 교정하려 하지 마세요.
와우 16/07/07 [18:12] 수정 삭제  
  내 댓글이 기사와 관련이 없어서 지워졌습니까. 기사 의견에 반하는 댓글은 삭제한다. 라고 정확히 쓰던지 내 댓글을 다시 살려내시면 좋겠네요. 이 댓글도 지우면 캡쳐본과 함께 일다의 스토커가 되겠어요. 기사와 상관 없는 댓글 달지 말라니까 기사 내용도 말하겠음. 가해 남성과 방관 남성이 일상적으로 즐겁게 여성에게 바라는 "가해남 입장 헤아리기" 가 이 기사 의견의 한 줄 요약이라 동의 못 합니다. 소수자라는 이름 아래서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운 가해 남성은 없습니다. 피해 여성이 가해 남성의 국적과 그 국적 관련 된 비극에 의해서 피해 받은 일을 희석시키고 그들을 배려해야 할 의무 어디에도 없고 이 글에 나타난 실천은 여성에 대한 또 다른 2차 폭력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반박 의견 삭제하실거면 댓글 창을 닫으세요 지우지 마시고요.
일다 16/07/07 [18:15] 수정 삭제  
  해당 기사의 댓글을 관리자가 삭제하지 않았습니다~ 새로고침 하여 보세요..
120 16/07/07 [18:49] 수정 삭제  
  유럽권에 사는 한국 여성으로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프레임을 지우면 남는 것은 무엇이 있죠? 그저 아 힘들고 외로운 난민을 이해하려 하며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식은 페미니즘이 걸어온 길을 역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문화권도 비판받아야 할 지점들은 비판을 받아야합니다. 우리는 계속 비판을 하고 분노를 하며 세계관을 바꾸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르웨이는 이미 난민에게 여성관 교육을 실시하고 있고 많은 eu국가들이 실시 고려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제점을 국가들이 자각하고 바꾸어나가려 하는 이러한 시점에서 피해자가 굳이 관용과 화합을 이야기하는 것이 유의미한 것인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120 16/07/07 [18:57] 수정 삭제  
  글의 논점에 동의하지 않으면 댓글을 지우시는 건가요? 무척 당황스럽습니다. 일다 계속 읽어오던 독자였고 하리타님의 글도 많이 읽었는데 이런 식으로 대처하시다니 실망스럽습니다.
--+
댓글 확인 됩니다. 잠시 나타나지 않은 듯 합니다. 성급한 댓글에 사과드립니다.
일다 16/07/07 [19:10] 수정 삭제  
  다시 안내드립니다. 일다 관리자는 댓글을 삭제하지 않았습니다. 기사나 댓글이 PC가 아닌 모바일 상에서 구현되는데에 몇 분 소요되는 것이니, 새로고침하여 다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김강 16/07/08 [00:32] 수정 삭제  
  글 마지막에 나오는 필자의 실천은 치유의 맥락에서, 즉 어떤 한 인종집단 전체에게 가해의 프레임을 씌우는 게 필자에게 심리적 고통을 주기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치유적 노력으로 읽혀요. 저는 여기에서 어떠한 종류의 '남성을 보살피고 이해해야 하는 여성' 이라는 사회적 압박을 읽어내는 게 매우 이상해 보여요.

게다가 필자는 가해자를 옹호하고 있는 게 아니라 가해자가 아닌 사람들이 인종주의적 프레임으로 인해서 곧장 가해자로 여겨지는 상상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을 뿐이죠. 이것은 '남성이 다 잠재적 가해자는 아닌데 너네 왜 그러냐…' 식의 말과는 아주 다른 것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백인 남성은 소수인종 남성이 곧장 잠재적 가해자의 이미지를 획득함으로써 잠재적 가해자의 지위를 벗어버리는, 남성성 내부에서의 인종주의가 이 글에서 문제삼고 있는 인종주의와 성의 정치학이니까요.

잠재적 가해자의 이미지로 여겨지는 이유가 이유가 여성에 대해 권력을 가지고 있는 남성이라서가 아니라, 무슬림이라서, 터키인이라서, 집시라서, 북아프리카계라서면, 그건 분명 다른 문제죠. 그런 점에서 '한국남자에게 피해를 입었으면 한국남자 이해하려 가야 하냐'라는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라고 보여요.

그리고 120 님 댓글에서 '프레임을 지우면 남는 것이 무엇이 있죠?'라는 말에서 아연해집니다. 네. 문제는 어떤 프레임에 아예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에요. '백인남성'이죠. 이들의 범죄는 백인남성의 범죄가 아니라 범인 개인의 범행이 되고, 어떤 프레임에 들어간 사람 중 하나의 범죄는 그 '프레임(무슬림이라서, 난민이라서, 집시라서)'의 범죄가 된다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가장 큰 피해는 누가 볼까요. 전 그 '프레임' 안의 '여성들'이 될 것 같네요. '남성'의 문제인 것이 '인종'의 문제가 되어 버렸으니까요.
아니 16/07/08 [02:00] 수정 삭제  
  글의 전체 맥락을 보기 보다 특정 문단에 꽂히신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글쓴이는 "허나, 이것은 진정한 나의 욕망인가?"로 시작하는 문단에서 자신도 아직 혼란스럽다는 것을 인정했고, 남성을 무조건적으로 포용하는 게 아니라 비백인남성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잠재적 우호와 연대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얘기했습니다. 난민을 만나는 프로그램에 나가보았다고 했지, 나가서 모든 편견이 없어졌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조금 다른 시각을 얻었다고 했을 뿐이네요. "자꾸 더 대면함으로써 가해남성들의 견고한 사고를 깨어야 한다."라는 말에서 보듯 구체적인 성추행 상황에서의 행동전략도 고민하고 있고요. 위에 어떤 댓글은 더이상 여자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건 여성이 아닌, 주체가 아닌 이들이 자꾸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할때 유효한 반박이지, 지금처럼 '피해자' 여성이 스스로 뭔가 하겠다는데 나올 말을 아닌 것 같습니다. 여성은 자꾸 뭔가 해야됩니다. 스스로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다른 여성과 연대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주체적으로 계속 해나가야 한다고 저는 봅니다. 그게 여성이 하는 여성주의 아닌가요
고민 16/07/08 [02:06] 수정 삭제  
  120님,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보신 것 맞나요? 필자는 " 아 힘들고 외로운 난민을 이해하려 하며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을 제안한 것이 전혀 아닌 것 같은데요. 여러가지 가능한 전략과 실천 중에 이미 생긴 편견을 깨보려고 난민도 만나보았다. 는 것 뿐이지요. 그 외에 사회적 정책적 대안도 언급했고, 여전히 분노가 많이 필요하다는 내용도 나옵니다. 120님이 말씀하신 "난민에게 여성관 교육을 실시"와 유사하게 글쓴이 하리타님도 가해자를 위한 교육, 피해자를 위한 교육 둘 다 필요하다고 마지막에 썼네요. 제발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비판에만 날 세우지 마세요. 답답합니다.
글쎄요 16/07/08 [02:13] 수정 삭제  
  120님 말에 따르면 EU차원에서 교육프로그램이 생기고 있다니 반가운 얘기네요. 그런데 그래서 "피해자가 굳이 관용과 화합을 이야기하는 것이 유의미한가"라고 물으시는것엔 동의하기 어렵네요. 사회가 변하려면 구성원이 각자 위치에서 같이 고민해야되는 것 아닌가요? 그러면 피해자'도' 자기 위치에서 어떤 새로운 시도들을 해야겠지요. 피해자여성들이 관용과 화합을 전혀 말 안하고 여전히 분노하고만 있어도 문제라고 봅니다. 또 정책입안자, 시행자는 따로 있습니까? 피해자 여성도 그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야된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120님 말씀은 어떻게 보면 국가가, 정책과 제도가 뭔가 하고 있으니 피해자는 그대로 있어도 된다는 뜻으로 읽힐 위험도 있습니다. 그런 뜻은 아닐거라고 믿지만요.
ㅇㅇ 16/07/08 [08:43] 수정 삭제  
  집단간 평균적인 사고/행동양식의 차이가 유의미하고 이를 바탕으로 실질적 억압 주체로 기능할 우려가 있음에도, 그 구체성을 삭제하고 행위에만 초점을 두라는 얘긴 위험 요소가 커보입니다. 대의를 위해 개개인의 피해를 축소시킨다는 인상도 있고요. 게다가 이러한 실천이 지적 만족감을 제외하고 어떤 효용이 있습니까. PC 관념의 추구는 옳은 일이지만 현실의 실체적 함의 또한 고려해야죠.
어휴 16/07/08 [08:46] 수정 삭제  
  "나를 자주 성추행하는 난민/이민자 남성들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 그들의 커뮤니티에 가서 직접 만나보자"(???!!!)라는 결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사고의 점핑인지, 얼마나 혼자만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것인지 안 보이십니까? 주변 백인 친구들한테 자기 경험 설득시키느라 힘 빼지 마시고(도대체 이런 인정욕구는 뭡니까) 온오프에서 다른 아시안 여성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논의하고 행동들을 조직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수천수만 가지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나요? 이게 훨씬 건강한 방식 아닌가요? 성폭력 가해자들은 저기 밖에 있는데 왜 '혼자만의 여행'을 하고 계십니까.
bell 16/07/08 [10:49] 수정 삭제  
  이 기사 너무 좋은데요!! 가해자를 이해하는게 아니라 가해자가 아닌 사람들을 오해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보이는데, 난민과 직접 만남은 멋진 액션인 거 같아요. 타지에서 인종차별에 항상 노출되는, 특히 아시아 여성으로서 이런 주제의 고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놓칠 수도 없는 걸수도. 덧붙여, 백인남성에 의한 강간, 추행, 폭력도 많고 무섭습니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이들을 국가나 생김새로 평가하진 않아요. 좋은 사람들도 언제나 있다는 걸 알고, 나역시 인종적 편견의 족쇄에서 벗어나고 싶은 아시안이니까요.
김강 16/07/08 [22:48] 수정 삭제  
  라고 ㅇㅇ 님이 말씀하시고, 심지어 집단으로 개인을 바라보는 것을 '구체성'이라고까지 하셨는데 제 상식으로는 사람들은 그것을 '추상성'이라고 부르는 것 같아요.. 게다가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게 어떻게 개개인의 피해를 축소시키는 걸까요? 글쎄요 님의 '현실'은 무엇인지요.

'구체적'이라고 한다면 단지 문화가 가부장적이다 이런 게 아니라 문화가 각 개개인들의 구체적인 수행 현장에서 작동하는 방식, 그 문화의 수행자들이 사회 안에서 놓인 위치, 문화에서 범죄로 이어지는 구체적인 프로세스를 따질 때에야, 구체적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설마 "인종적 소수자인 사람들이 길거리 성범죄를 더 많이 저질르더라"와 "그 사람들이 가부장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더라."라는 말만 가지고 이 각종 범죄 사건을 설명해주는 '구체성'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일은 아닐 거라 생각해요.

오히려 성범죄를 '무슬림들의 문화탓' 이런 걸로 돌릴 때 정말로 구체적 행위자들의 구체적 악행의 그 구체성이 휘발되는 건 아닐까요? 무슬림(남성) 전체를 프레이밍해서 범죄적 집단으로 상상하지 않으면 아시아인 피해자 개개인들의 피해가 축소되는 것인가요? 오히려 그렇게 할 때 아시아인 피해자 개개인들의 피해가 축소되는 것만 같은데요. 구체적 성폭력 문제가 "그가 무슬림이기 때문에"(인종문제)로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과연 '백인 남성'은 그럼 '한 집단'으로 여겨지긴 하는 것일까요. 백인들은 '그냥 사람'이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각 집단에 속한 사람'이 되는 프레임이 작동한다면 백인 마초들, 백인 잠재적 성범죄자들, 백인들의 강간의 문화(rape culture)은 단지 소수인종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도 너무나 손쉽게 면죄부를 받게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죠. 이것은 "현실"아닌가요.

쾰른에서의 성폭력 사건 이후 독일 페미니스트들이 계속 하는 말도 "성폭력과 강간의 문화는 수입품이 아니다." "우리는 옛날부터 계속해서 강간의 문화와 성범죄 관련 법안의 미비함을 지적했는데, 외국인들이 범죄를 저지른 뒤에야 그게 개정이 된다" 이런 말들이에요.
아이고 16/07/09 [06:44] 수정 삭제  
  어휴님-->주변 백인 친구들한테 자기 경험 설득시키느라 힘 빼지 마시고(도대체 이런 인정욕구는 뭡니까)에 대하여. 글쓴이는 평소 친했던 사람들과 대화했다고 뿐인데, 그걸 인정욕구라고 보는 님의 사고방식이 더 의심스럽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적은 소수자로서의 경험때문에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는 백인들에게 비백인의 경험과 시각을 던져주는것, 의미있다고 봅니다. 힘뺄 가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아시아인은 영미권서유럽백인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역할을 해야지요. 어쨌거나 그 집단이 아직도 거의 모든 사회문화정치적 헤게모니를 다 쥐고있거든요? 거기서 당당히 할말하고 입장밝히고 논쟁하고..그거 중요해요. 사람마다 다 자기 싸움터가 따로 있어요.
실천이문제 16/07/09 [06:50] 수정 삭제  
  '수천수만 가지 함께 할 수 있는 일' 중에 몇가지를 글쓴이가 제시했네요. 글쓴이는 자기가 직접 듣고 보고 고민하고 실행한 선에서만 해결책을 말한거죠. 사고의 점핑? 좀 하면 어때요. 컴퓨터 앞에서 머리싸움만 하자면 누군들 못하겠어요. 어휴님은 온오프에서 많이 행동하고 계신가요? 비난은 참 쉽죠.
놀랍네요. 16/07/09 [07:22] 수정 삭제  
  댓글이 많이 달렸네요. 그런데, 부정적인 의견을 내신 분들은 대부분 글쓴이가 난민 커뮤니티에 가서 '잠재적 가해자'로 지목되는 사람들을 만났다는 것에만 지나치게 골몰하는것 같네요. 솔직히 놀랍습니다. " 내가 편견을 갖고 바라보던 난민 남성들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지속적인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과정이었다." 라고 글쓴이는 딱 한마디 했는데, 이에 대한 곡해와 상상력이 지나쳐보여서요. 잠재적 가해자 (그것도 단지 인종때문에 필터링된)와 우리는 계속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한 시공간에서. 글쓴이가 용기를 내어 적극적으로 이 현실에 응답했다는 걸 전 높게 평가합니다. 여기 반대하고 열올리시는 분들은 그럼, 어쩌자는 건가요? 앞으로도 난민들과 절대 섞이지 말고 무조건 피하고 색안경끼고 보자는 건가요? 단지 그들이 특정 문화권에서 특정인종의 남성이라서? 님들이 당장 매일 난민과 함께 학교다니고 직장다니고 대중교통 같이타고 같은 곳에서 장본다고 상상해보세요. 글쓴이의 대처가 지극히 상식적으로까지 여겨질겁니다. 편견을 극복하겠다는 건 글쓴이의 생활조건에선 필수처럼 보이기까지 하고요.
gomu 16/07/14 [18:03] 수정 삭제  
  외국인들이랑 같이 읽고 얘기해보고 싶은 기사다. 즐독 했습니다~
tk 16/08/19 [13:43] 수정 삭제  
  미국에 거주하는 50대 남성입니다. 우연히 트위터를 타고 들어오게 되었는데 필자의 고뇌의 심도가 참 인상 깊어 몇 자 남깁니다. 미국에서 흑인들, 특히 흑인남성에 대한 편견의 문제와 흡사하여 더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어느 유명한 진보적 백인여성이 오래전 자신이 웨이트레스로 일하며 법대에 다닐 때 흑인에게 간강당한 얘기를 하며 필자와 비슷한 고뇌를 풀어놓았던 기억도 나고요. 백인 남성성이 '보편'의 '척도'가 되고 그 외의 모든 것이 그 밑에서 그 척도에 따라 위계를 이루며 분류되는 이 권력의 구조는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정치, 사회, 문화 나아가 비판적 지식을 생산한다는 학문까지도 지배하는 아직도 견고한 틀입니다. 이를 간파하고 그것을 깰 수 있는 실천을 하지 않으면 인종차별주의, 여성차별주의는 건재할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 글에서 필자의 고뇌와 실천은 이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나아가 구체적 실천으로까지 옮긴 아주 드물고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건필하시기를...
berllin 16/08/21 [21:53]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만, 니하오가 어떻게 그렇게 들릴 수 있는지.. 필자님이 민족주의적이지 않은가 의문이 드는군요. 아니면, 유럽 45개국 사람들의 외모만 보고도 그 나라를 알아보고 그 나라 말로 인사가 가능한 능력자시던가요. 유엔이 한민족이란 단어를 강조하지 말것을 권고한지가 한두해가 아닌데.. 아직도 이런 국가주의적 편견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은 아직도 한국이 약소국 컴플렉스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이겠죠. 국가 이름을 물어보고, 상대를 가능하는..
duseldorf 17/01/29 [01:20] 수정 삭제  
  berllin님.. 길을 걸으며 모르는 여자에게 니하오 라고 소리치는건 빈정대는 인종차별적 인사 맞습니다. 진짜 친구가 되고싶으면... 가까이 다가가서 hello.. excuse me.. 예의바르게 다가가야죠.
프랑스거주 17/02/14 [05:37] 수정 삭제  
  프랑스 거주 한인 여성으로서 크게 공감했으며 한편 이 글 공감 이상의 기능하지는 못한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댓글란이 엉망이 된 거겠고요.. 보니 공부하시는 분 같은데 같은입장으로서, 학업적 가치와 일상을 딱 끊을 것을 추천드립니다. 학계에서는 생각하는 가치대로 다문화를 주장하시고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댓글에 언급된대로 국가적 차원에서 이민자 재사회화를 주장하세요. 마음 대로 하세요. 하지만 일상에서는 이런이들을 차별하고 피하십시다. 되는 대로 생존 본능으로 기피하고 적극적 차별해야 합니다. 이에 백인남성이라도 된듯 기득권 차별자로서의 죄책감은 느끼지도 상상하지 맙시다. 월권입니다. 우린 기득권이 아니고 되도 않을 출처분명의 해피해피 다문화 양심 차리다가 뒤지는 수가 있는, 모국을 떠나면 생태계 최하층이 되는 아시안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17/03/24 [20:07] 수정 삭제  
  전형적인 남성혐오성 글이네요.
독일거주자 17/06/01 [23:13] 수정 삭제  
  지나가다님, 네오나치를 독일에서 얼마나 많이 경험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독일 사회에서도 네오나치에 대한 시위는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그 시위가 매년 일어나는 도시 근처에 사는 사람으로서 독일 근 3년 가까이 살았는데도 네오나치 한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어요. 가끔 뭘 모르는 청소년들이 길거리에서 성추행 하는 그런 일은 딱 2번 겪었고 오히려 대도시에서 더 성추행을 많이 당했네요. 전 글쓴 분 입장에 충분히 공감하고 방안에도 크게 동감합니다. 길거리에서 성추행 하는 집단이 인종, 특유의 지역 나라 출신이라고 해서 일반화 하는 것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난민 몇몇을 알고 있고 대부분의 난민 친구들은 정말 독일 사회에서 잘 적응하고 싶어하고 또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합니다. 물론 안 그런 사람들도 많겠지만, 어쨌든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일은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독일도 일반화 오류의 역사의 과오를 저질렀던...유대인 학살 같은 선례를 남겼지 않나요. 난민 문제가 커진지 아직 10년도 안되었고 우리는 지금 그들과 화합하는 과도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느것도 성공했다 실패했다 장담할수는 없지만, 어쨌든 난민들에 대해 절대 일반화 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세상 살아 가는 방법을 좀 더 경험하고 찾아야 한다는 것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아시안 여성이라고 해서, 절대 주눅들지 말고요. 이상 독일에서 사는 평범한 아시안 여성으로서 댓글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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