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일다>는 새로운 페미니즘 담론을 구성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을 주제로 청년여성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자기 무릎 위에 나를 앉혔던 남자배우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면, 나는 독립영화 일을 한다고 대답한다. 내 작품을 연출하기도 하고 극영화 연출부 일을 하기도 한다. 영화 일을 하는 사람들, 특히 독립영화 쪽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래도 다른 분야보다는 영화판이 상대적으로 평등한 분위기라고 말하는 걸 자주 듣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경험과 내 경험의 온도차는 큰 것 같다. 내 생각에, 젠더 불평등한 사회에서 성차별로부터 자유로운 곳은 없다.
스무 살, 나는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독립 극영화 연출부 일을 했다. 한 단편영화의 조연출을 했을 때 일이다. 한겨울 야외에서, 게다가 밤 촬영이라 정말 추웠던 날로 기억한다. 난로 앞 의자에 앉아 불을 쬐고 있는데, 남자배우가 불을 쬐러왔길래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랬더니 그가 미안하다며 자신의 무릎 위에 앉으라고 했다.
내가 거절했는데도 그는 나를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가 매우 태연한 얼굴이었으므로, 그리고 주변을 지나가는 스태프들이 그 상황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내가 느끼는 당혹스러움이 잘못된 것인가 생각했다. 그 현장에는 여자 스태프가 나 말고 한 명밖에 없었다. 그게 내가 영화 현장에서 처음으로 겪은 성희롱이었다.
한 친구는 현장에서 촬영감독을 비롯한 남자 스태프들이 여자배우의 가슴을 카메라로 줌인, 줌아웃 하며 낄낄거리는 걸 봤다고 했다. 친구가 문제 제기하자, 그들은 도리어 ‘네가 잘 모르나본데, 그렇게 예민해서는 이 일을 계속할 수 없다’며 훈계했다고 한다. 만약 친구가 어린 여성이 아니고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면 그들이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날 한 남자 피디가 나에게 ‘독립영화계에서 남성 스태프가 여성 스태프를 성희롱한 일이 있냐’고 물었다. 자긴 들어본 적도 없고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다고 하길래 나는 친구가 겪은 그 사건에 대해 말해줬다. 그러자 그 피디는 “스태프가 배우에게 한 거 말고. 그런 건 나도 많이 알아”라고 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으나, 그런 사건이 배우뿐 아니라 같은 자리에 있던 여성 스태프에게도 모욕적인 일이라는 걸 그가 생각하지 못한다는 게 놀라웠다.
성희롱 피해자가 모든 고통을 혼자 감당하는 구조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자 영화판의 구조적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돈’인 촬영 현장의 특성상, 빠른 진행을 위해 조직은 수직적 구조를 띠고 개인보다는 ‘영화’라는 대의가 우선시된다. 촬영장에서 각 파트는 성별로 구조화 되어있다. 촬영이나 조명과 같이 장비를 다루는 파트가 다른 파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을 갖는데, 구성원은 대다수가 남성이다. 반면, 분장이나 의상과 같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파트에는 여성이 많다.
이 조직은 다른 조직과는 다르게 프로젝트성으로 진행된다. 대부분 짧게는 1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 정도의 계약직이다. 성희롱이나 폭력 등의 문제가 일어났을 때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인 것이다. 피해자는 자신이 참여하는 영화에 얼마나 많은 자본이 투자되었는지, 자신이 문제 제기를 했을 때 영화 제작에 어떠한 금전적, 시간적 손실이 생기는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성희롱 피해자가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 된다.
설령 문제 제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가해자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을 경우 제작사에서는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기는커녕 피해자와 분리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구조에서는 주로 피해자가 참고 넘어가거나 촬영장을 떠나게 된다. 일단 촬영이 끝나고 나면, 가해자도 제작사와 계약 관계가 끝나기 때문에 조직에서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피해자가 모든 고통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가해자는 문제를 저지르고도 제지받지 않으니 일을 계속할 수 있고, 피해자는 가해자를 다른 현장에서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다. 단편영화의 경우 촬영기간이 훨씬 짧고 제작사도 없이 인맥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내가 겪었던 성희롱들은 가해자의 웃음과 주변 사람들의 방관과 함께 일어났기 때문에 나는 화를 내도 될 일인지, 내가 예민한 것인지 빠르게 판단할 수 없었다. 성희롱 경험이 반복될수록, 나는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스스로를 탓하게 되었다. 동료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들이 내 편이 되어줄 것이라고 신뢰할 수는 없었다. 나는 너무 많은 침묵하는 사람들을 봐왔고, 나 역시 같은 상황에서 방관자가 되어 침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나와 친구들은 어떤 배우가 그랬다더라, 어떤 현장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더라 하며 ‘피해야 할 사람들’ 명단을 음지에서 공유할 뿐이었다. 나는 더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점점 극영화 스태프 일을 거절하게 되었다. 나는 그만큼 강하지 못했다.
남자감독은 노동 다큐, 여자감독은 사적 다큐?
그 뒤로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생겨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게 되었다. 다큐멘터리는 극영화보다 작업 방식에 대한 자율도가 높았고, 상대적으로 시간에 덜 쫓겼다. 그러다보니 ‘영화’라는 대의에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이 밀리는 것을 경계할 수 있었다. 부족하긴 하지만 작업 방식과 스태프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고민할 수 있었다. 비교적 소규모 인원으로 작업할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영화(남순아 <아빠가 죽으면 나는 어떡하지?> 32분, 2015)를 완성하고,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과정에서 나는 또 다른 문제와 마주하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감독으로 대하기보다 ‘어린 여성’으로 대했다. ‘이렇게 어리고 조그만 사람이 어떻게 영화를 찍었냐’라는 말을 칭찬으로 하기 일쑤였다. 쉽게 반말을 했으며, 자기 자식과 비교하거나 자식뻘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어떤 감독은 내가 더 이상 젊지 않다며 나를 ‘시든 꽃’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나는 사적인 만남이 아닌 공식적인 행사에 감독으로서 참석했는데도, 사람들은 내가 어리다는 이유로 나를 기특해하거나 무례하게 굴었다. 그러나 똑같이 영화 일을 하는 30대 중반의 남성인 나의 애인에게는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어린 여성’으로 바라보는 것만큼, 내 다큐멘터리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해주지 않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종종 내 다큐멘터리와 비교되는 한 남성 감독의 다큐멘터리가 있다. 그 감독이 자신의 이야기를 했을 때 사람들은 ‘노동에 대한 다큐멘터리’, ‘20대 청년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또한 그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사회적 담론과 연결했다. 하지만 내가 다큐멘터리에서 내 이야기를 통해 노동 이슈와 기본소득, 인간의 존엄에 대해 말했을 때, 사람들은 내 다큐멘터리를 ‘사적 다큐멘터리’라고 불렀다.
‘사적 다큐멘터리’ 역시 다큐멘터리의 한 분류일 뿐이고, 그렇게 분류되는 것 자체가 작품을 폄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사적 다큐멘터리인지, 그것이 누구의 기준에서 사적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유독 여성감독의 다큐멘터리들이 사적 다큐멘터리로 분류되고, 그렇게 분류된 영화들이 다양한 사회적 담론과 연결되지 못한 채 고립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사적 다큐멘터리라는 분류는 젠더화되어 있으며, 은연중에 그 다큐멘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덜 중요한 것’, ‘사소한 것’으로 만든다.
나는 내가 느끼는 불편함이 피해의식인지, 정당한 의심인지 헷갈렸다. 내가 연출을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영화에서 사적인 이야기 이상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너무 쉽게 사적 다큐멘터리로 분류당해 다양하게 읽힐 기회를 차단당한 것인지 말이다. 여성 극영화 감독들의 영화가 그들의 젠더가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섬세하다’는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만약 작품이 담고 있는 것보다 창작자의 성별이 작품의 평가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면, 많은 여성 창작자들은 나처럼 자신의 능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 프로덕션에 성희롱 예방교육을 제안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모든 것이 젠더 문제로 보이기 시작했다. 왜 영화제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여성감독들은 상업영화로 입봉하지 못하는지, 대학 영화과의 수많은 여학생들은 어디로 간 것인지, 어째서 촬영이나 조명 같은 파트에서 여성 스태프를 찾아보기 어려운지, 몇 개월의 촬영 기간 동안 여성 스태프들은 생리통을 어떻게 참아내는 것인지, 현장에서 발생하는 성희롱 같은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질문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페미니즘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면서 새로운 언어를 깨치듯 많은 것을 배워갔지만, 아무리 책을 봐도 이론과 현실 사이의 차이가 크게만 느껴졌다. 현실에서 나는 여전히 화가 나는 이유를 지적하지 못한 채 상황을 넘기고, 나중에 친구들을 만나 분노를 터트리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고민을 하던 중, 내가 시나리오 보조 작가로 참여한 작품이 제작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스크립터 제안을 받게 되었다. 애정이 큰 작품이라서 하겠다고 했지만 또다시 상처받게 될까 두려웠다. 반복되는 상황들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나는 나를 지키고 싶었다.
그러다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홈페이지에서 ‘모든 촬영장은 크랭크인(촬영 개시) 전에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할 의무가 있다’는 내용을 보게 되었다. 상업영화 기준인가 싶어 노조에 문의해보니, 저예산 영화에서도 교육 의무가 있다는 답이 왔다. 두근거렸지만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한 현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고, 과연 이 프로덕션에서 성희롱 예방교육에 시간과 돈을 쓰려고 할지 알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제안했더니 감독과 피디 모두 흔쾌히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피디가 알아본 바로는, 다른 현장에서는 대부분 제대로 된 교육 대신 영상이나 팜플렛으로 대체하는 것 같다고 했다. 특히나 독립영화 프로덕션에서는 성희롱 예방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신뢰할만한 강사를 모시기 위해 한국여성민우회에서 성희롱 예방교육을 받기로 했다.
약 두 시간동안 ‘평등한 조직문화 만들기’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강사는 성희롱이 ‘문제 있는 개인’에 의해 일어나는 게 아니라, 그러한 행위가 묵인되고 재생산되는 조직문화로 인해 발생하기 때문에 조직문화를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강의는 일반 기업을 대상으로 맞춰져있었기 때문에 영화 시스템에 섬세하게 적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만약 영화 현장을 전문으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하는 강사가 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 관계상 모든 스태프가 참석하지 못했고, 남성보다 여성 스태프의 참여율이 높은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스태프들이 함께 성희롱 예방교육을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리고 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페미니스트야”…우린 혼자가 아니다
나는 더 강해지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촬영장에서 만난 다른 스태프들과, 영화제에서 만난 영화제 스태프들과, 새로 알게 된 감독들과 각자의 경험을 나누고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지 공유했다. 마치 비밀조직의 일원인 것처럼 내가 먼저 페미니스트임을 고백하면, 많은 사람들이 나의 고백에 응답해 자신도 페미니스트임을 알려줬다.
나는 선배 페미니스트들과 동료 페미니스트들을 만났고,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페미니스트들을 만났으며,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나 말고 다른 페미니스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용기가 생겼다. 여전히 차별적인 말이나 성희롱에 빠르게 대응하기란 쉽지 않지만, 내가 문제제기 했을 때 혼자가 아닐 것이란 믿음이 생겼고, 그들의 존재만으로 든든했다. 외롭지 않기 위해 더 많은 동료 페미니스트들을 만나 서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는 말을 자주 생각한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 무기력하지 않기 위해서 앞으로 동료 페미니스트들을 더 많이 찾아볼 계획이다. 내가 다른 페미니스트를 만나 용기를 얻듯, 나도 다른 페미니스트 동료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만들 계획이다. 다큐멘터리를 완성할 즈음의 나는 더 강해져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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