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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라는 이름의 청소년 ‘혐오’ 벗어나기
<연애와 사랑에 대한 십대들의 이야기>를 읽고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김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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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김혜림 님은 땡땡책협동조합과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입니다. -편집자 주


 

내가 속해있는 ‘교육공동체 벗’은 교육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협동조합이지만, 조합원 대다수는 초중등학교 교사다. 몇 해 전 교육공동체 벗은 뜻하지 않은 내분(?)에 휘말렸다. 청소년운동가들이 벗에서 발간하는 잡지 <오늘의 교육>에 글을 기고하면서부터였다. 벗의 주류를 이루는 전교조 교사들에 대한 청소년운동가들의 냉소와 비판에 대해, 어리둥절해하는 이도 있었고 화를 내는 이도 있었다. 나 역시 중등교사로서 이들의 주장을 접하고 교사들에 대한 냉소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불편한 기분을 직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청소년이 스스로의 삶을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사회는 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원조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청소년은 미성숙한 존재로서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었다. 솔직히 지금도 저 생각에서 벗어났다고 자신할 수 없다. 내가 일하는 중등학교는, 청소년은 미숙하므로 그런 점을 감안하여 적절한 보호와 지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한 전제로 작용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주류 교육담론은 청소년–이들 대다수는 ‘학생’으로만 정의되어 왔다–의 가장 큰 문제는 입시 위주의 교육에 있고, 입시교육이 해소되면 청소년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학업에 몰두하여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고 10대 동안 유예해왔던 욕망을 실현하며 순조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속에서 자신의 노동으로 먹고 사는 청소년, 가정을 벗어난 청소년, 연애하고 섹스하고 출산을 하는 청소년 등은 모두 가려져 있었고 그저 ‘일탈’로만 간주되었다. ‘학생’으로 스스로를 정의한 수많은 청소년들 역시 사회에서 정한 궤도를 벗어난 이러한 청소년들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

 

십대들의 연애와 사랑이야기가 불편한 이유는 뭘까

 

▶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연애와 사랑에 대한 십대들의 이야기>

<연애와 사랑에 대한 십대들의 이야기>(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저, 바다출판사, 2016)는 바로 이런 생각에 도전하며 청소년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책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며 학업에만 중점을 두는 삶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내가 바라는 대로 살 수 있는 삶의 권리를 주장한다. 이들의 목소리는 <오늘의 교육>에 실렸던 청소년운동가들의 글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참 불편한 부분들이 많았다. 나도 미처 깨닫지 못한 내 안의 청소년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멀티방에서 섹스를 시도한 청소년들, 성매매를 하고 그 과정에서 임신을 하고 낙태를 한 청소년, 피임 방법을 모른 채 애인과 성관계를 했다가 임신을 하고 그 아이를 낳아 키우려고 하는 청소년 커플의 이야기를 읽는 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런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일탈과 범법 행위로서, 타자화된 시선으로만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택한 삶이 너무 불안정하고 위험해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보인 까닭은 우리 사회가 그들을 비난하고 고립시키며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지, 그들의 잘못이나 과오가 아니라는 걸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이들의 이야기가 불편했던 또 다른 이유는, 청소년이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소년 대신 흔히 쓰는 ‘미성년자’, 즉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존재라는 표현에도 이런 생각은 녹아나 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미성숙한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허망한 소리인지 절감하게 되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들의 경험은 청소년을 ‘보호’하려는 한국 사회의 생각과 시도는 무용할뿐더러, 오히려 청소년에게 해가 되기까지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가령, 가정 내 폭력으로 인하여 집을 나온 이른바 ‘탈가정’ 청소년의 경우를 보자. 자신의 힘으로 노동하여 살고 싶어도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만 집을 얻는 것도, 일자리를 얻는 것도 가능한 사회다. 그러니 폭력을 휘두르는 가정으로 다시 돌아가든가, 가출청소년으로서 위법과 불안정을 견디며 불안한 삶을 지속하는 수밖에 없다. 그 어디에도 ‘보호’는 없다.

 

보호 못할뿐더러 보호할 의지도 없는 ‘청소년의 성’

 

▶ <연애와 사랑에 대한 십대들의 이야기> 뒷표지

청소년 ‘보호’의 본질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동청소년의 성’을 둘러싼 태도이다. 진냥의 글 <어린이의 성, 보호인가 박탈인가>는 그 본질을 잘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아동과 청소년의 성은 보호받아야 하고 스스로도 탐닉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일부러 성적 무지 상태에 머무르도록 정보를 통제 당한다. 그러나 실상 보호받아야 한다고 하는 이들의 성을 이 사회가 진정으로 보호하고 있는가? 여성청소년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문화는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지는 측면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문화예술계 성폭력 사건들 속에서도 성인-남성인 가해자들이 자신의 위계와 권력을 이용하여 여성청소년 피해자들을 성적으로 착취해 온 경우가 많았다. 이는 특이한 현상이라기보다 그저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이렇게 모순된 ‘보호’의 허망함은 피해자들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태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며 오히려 피해자들을 윽박지르고, 그들에게 책임을 돌린다.

 

‘보호’의 관점은 아동청소년이 성적 주체가 되어 실천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부인하며, 그들의 성적 실천에 대해 불행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저주를 퍼붓다시피 한다. 나 역시도 청소년 시절, 교사들에게 성적 접촉을 가지면 인생이 위기에 처하고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설교를 여러 차례 들었다.

 

그러나 성 때문에 인생을 망치리라는 저주는 약자에게로만 향한다. 많은 여성들은 어린 시절부터 자유로운 성생활이 낙태와 성병 등 건강상의 문제를 초래할 것이며, 계획하지 않은 임신으로 인하여 인생이 나락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를 들어왔다. 그러나 그 예기치 않은 임신의 파트너가 될 수 있는 남성들은 이렇게 인생을 위협하는 수준의 경고까지 들었던가? 오히려 그들이 성범죄의 가해자가 되어도 많은 경우 이들의 편을 들어주기까지 한다.

 

즉, 우리 사회가 가장 성적으로 ‘보호’하는 존재는 강자인 이성애자+성인+남성인 것이다. 이 사회는 기대하는 만큼 적절하게 청소년을 ‘보호’할 수 없을뿐더러 ‘보호’할 충분한 의지도 없는 셈이다. 보호를 위한 기관을 자처하는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에 대해 다룬 박예진의 글은 제목부터 <학교는 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아니!>이다. 오히려 그 ‘보호’를 핑계로 여성, 청소년 등 약자를 틀 안에 가둬놓고, 문제가 생기면 이들을 억압하거나 처벌하는 것으로 무마하려고 한다.

 

십대를 동등한 존재로 보지 않는 것이 ‘청소년 혐오’

 

▶ <연애와 사랑에 대한 십대들의 이야기> 중에서 

또한 ‘보호’는 통제에만 관심이 있지, 성장과 관계에 무관심하며 때로는 이에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책 속에 수록된 연애와 사랑에 대한 많은 청소년들의 경험을 고백한 짧은 글들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청소년의 연애를 위험시하며 규제하고 저지하려고만 하는 사회 속에서 상처입고 좌절된 마음들이 여실히 엿보인다.

 

이런 사회에서 청소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보호’가 아니라 그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뜻대로 삶을 살도록 도와줄 수 있는 ‘지원’과 그들이 선택한 삶에 대한 ‘존중’이다.

 

그렇다면 그 ‘지원’과 ‘존중’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책에서 주장하듯이 단순히 임신과 출산에 대한 정보 전달에 그치지 않는,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며 사회적 시야를 갖추고 자신의 삶을 기획하는 역량을 기를 수 있는 성교육이 필요하다. 피임뿐 아니라 청소년의 임신과 출산, 낙태를 지원하는 제도, 사회적으로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놓인 성소수자 청소년을 위한 조력 등 사회 전반의 변화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선 개인들 각자가 청소년에 대한 ‘존중’을 갖추는 것이 그 첫걸음일 것이다.

 

<오늘의 교육> 9, 10월호는 <나이주의를 넘어>라는 제목으로 ‘청소년 혐오’ 문제에 대해 다루었다. 그 글을 읽고 내가 청소년들이 자신의 삶에 있어 중대한 결정을 내리거나 그에 대해 책임지기엔 미성숙하다고 생각해왔던 것이 ‘청소년 혐오’에 해당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청소년 혐오는 사실 한국 사회 전반에 일상화되어 있다. ‘혐오’라는 표현 그대로 일명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무서운 십대들’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요즘 애들’이라는 방식으로 타자화한다. 또, 청소년이 집회에 참여하거나 공공질서를 유지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기특하다’고 표현하는 식으로 일견 칭찬하는 것 같지만 동등한 시민이자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그러나 청소년 역시 이 사회의 구성원이며, 미래를 위해 유예된 존재가 아니라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이다. 나와 동등한 동료시민이자, 스스로의 삶에 대한 결정권을 지닌 존재로서 청소년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비단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나 나처럼 일상적으로 청소년을 만나는 교사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가 마음에 새겨야 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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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11/26 [22:24]  최종편집: ⓒ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16/11/27 [19:09] 수정 삭제  
  침묵 속에 갇힌 말들이 담겨있겠군요...
coffin 16/11/29 [20:16] 수정 삭제  
  한국사회 답답해요. 십대를 만나는 교사의 서평이라 더 와닿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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