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이름이 필요하다”

<영화로 읽는 페미니즘> 블루 재스민

지아(知我) | 기사입력 2017/01/08 [11:58]

“우리에게는 이름이 필요하다”

<영화로 읽는 페미니즘> 블루 재스민

지아(知我) | 입력 : 2017/01/08 [11:58]

※ 필자 소개: 지아(知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공연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영화칼럼을 비롯해 다양하고 새로운 실험으로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디 알렌 감독의 영화 <블루 재스민>

 

▶ 우디 알렌 감독의 영화 <블루 재스민>(2013) 포스터

영화 <블루 재스민>(우디 알렌 감독, 케이트 블란쳇 주연, 2013)은 삶의 뿌리를 상실한 재스민이라는 한 여자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블루는 삶의 이면에 포진해 있어서 쉽게 드러나지 않은 불안과 우울의 빛깔. 그렇기 때문에 “하늘과 바다의 색으로서의 파랑은, 이미 자신의 본질적 특성이 끝없이 먼 곳과 심연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이멘달은 말했던 것일까? 또, 괴테는 <색채론>에서 블루를 ‘불안하고 유약하며 동경하는 느낌의 색’으로 통찰했을까?

 

제목에서부터 주인공을 상징적으로 설명해주는 ‘블루’의 이미지 덕분에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테네시 윌리엄즈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쉬 드보아가 떠올랐다. 실제로 이 영화의 원작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1951년 감독 엘리아 카잔에 의해 영화로도 연출된 사실(비비안 리 주연)이 있다는 것은, 그래서 그리 놀랍지 않았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주인공 블랑쉬가 ‘하얀 숲’이란 뜻을 지닌 자신의 이름처럼 비현실적 여성인 것과 유사하게, 재스민 역시 현실과 동떨어진 채 스스로를 특화시켜 버린다. 어둠이 오면 꽃봉오리를 여는 이국적인 꽃 재스민, 그녀의 이름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원래 이름은 흔하디 흔한 ‘자넷’이 아니던가?

 

현실과 욕망의 낙차

 

재스민은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고 날마다 파티를 여는 뉴욕 상류층 여자였다. 그러나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면서 그녀의 삶은 곧바로 무너진다. 더구나 알고 보니 남편이란 사람의 정체는 억대의 돈을 사기 쳤던 사기꾼 사업가. 이혼하고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재스민은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슈퍼마켓 계산원으로 일하는 여동생 진저의 신세를 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가지만, 그곳에서의 삶도 녹록지는 않다. 여동생 진저와 그녀의 남자 친구 칠리의 삶이 재스민이 보기에 전형적인 ‘루저’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삶은 완벽히 달라졌다. 그리고 그 낙차는 재스민의 대상 없는 혼잣말을 점점 늘어나게 해주는 동인이다. 왜냐하면 귀족에서 평민으로 갑자기 신분 하락을 한 듯한 현실을 그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재스민에게 현실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차라리 환상과도 같은 것. 그녀의 의식은 여전히 뉴욕의 상류층이다. 현실의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아니 알고 싶어 하지 않은 채, 그녀는 블랑쉬처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현실 너머에 있는, 그전에 자신이 누렸던 욕망의 세계만을 꿈꾼다.

 

그러나 과거를 욕망할수록 현실은 점점 남루해져 갈 뿐. 점점 더 가혹해지는 현실은 재스민을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에 계속 머물게 하는데 그것은 일종의 가수면 상태로 현실과 환상, 그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는 사람의 아노미적인 상태다. 겉보기에는 현실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만의 환상 속에 거주하고 있는 상태가 아닐 수 없다.

 

▶ 우디 알렌 감독, 케이트 블란쳇 주연의 영화 <블루 재스민>(2013) 중에서

 

과거와 현실 장면이 계속 불편하게 교차해서 나오는 간격 편집은 재스민의 무의식 속에 통째로 버무려진 환상과 현실의 이러한 모호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수시로 신경안정제를 먹으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평온하게 현실에 가닿으려 하지만, 순간순간 터져 나오는 혼잣말은 그녀가 여전히 과거의 환상 속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 아닐 수 없을 터.

 

마침내, 재스민은 궁극적으로 욕망 자체가 되고 만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늘 또 다른 가능성을 갈망하는 히스테리성 인간형으로 발전한다. 그 욕망이 위험한 것은 한계선이 명확한 리얼리티가 부재한 탓인데, 그럴수록 현실과 환상의 낙차는 점점 벌어지고, 간극이 벌어질수록 가상현실에 대해 치러야 하는 대가도 점점 커져 버리기 때문이다. 또 현실과 환상, 그 간극의 차이만큼 절망도 비례하기에, ‘진짜 현실’로 돌아가는 길을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난 꿈이 없었다” 타자로서의 여성

 

이쯤에서 우리는 재스민의 욕망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식으로 표현하자면, 재스민의 욕망은 늘 ‘타자의 욕망’이었다. 사실 그녀는 욕망의 주체가 되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동생 진저가 파티에서 만난 남자와 모텔에서 섹스를 하는 몇 시간 동안 어린 조카들을 돌봐주면서 “난 꿈이 없었다.” 라고 말하는 재스민의 무심하지만 텅 빈 얼굴은 평생 타자의 욕망 속에서만 살아온 그녀의 인생을 전적으로 증명해준다.

 

그렇다. 어린 시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동생 진저와 함께 양부모에게 입양되었던 재스민, 아니 어린 자넷에게 어쩌면 삶은 그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타자의 욕망을 반영해주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삶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은 재스민처럼 타자의 욕망을 살아가게 되기 쉽다. 왜냐하면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남성이나 남성다움이 긍정적인 것으로, 또는 규범으로 세워지는 반면에 여성이나 여성다움은 부정적인 것, 즉 ‘타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주체로서의 삶이 아닌 타자의 삶은 스스로 진짜 원하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알려고 시도하지 않은 채 세상에서 ‘꿈’이라고 유통되는 다른 사람들의 욕망, 환상만을 따라갈 뿐이다.

 

▶ 우디 알렌 감독, 케이트 블란쳇 주연의 영화 <블루 재스민>(2013) 중에서

 

재스민에게 그 환상은 그녀를 다시 상류사회로 진입시켜줄 훈남 외교관 드와이트다. 그에게 거짓말을 할 때 재스민의 표정은, 그래서 영화의 그 어떤 장면보다도 가장 빛나고 진실해 보인다. ‘외과의사인 남편과 사별한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거짓된 포장은 재스민에게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적법한 방법처럼 보인다.

 

하지만 드와이트의 신뢰를 받게 된 재스민이 그와의 미래를 꿈꾸면서 인테리어 조언 차, 호화롭지만 가구가 아직 들어오지 않아 텅 빈 집을 구경을 하는 장면은, 과거의 한 장면과 너무도 똑같이 오버랩된다. 전남편 할이 재스민에게 크고 화려한 집을 통째로 선물해주던 장면에서도 역시 집은 텅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그 텅 빈 방은 “난 꿈이 없었다.” 라고 말하는, 타자의 욕망만을 줄기차게 살아왔던 재스민의 아프고 텅 빈 얼굴이기도 하다.

 

지하철 광고판을 도배하고 있는 성형수술 광고들에서 알 수 있듯, 외모지상주의와 자본주의와 결탁한 견고한 가부장제는 지금도 어쩌면 한국의 재스민들을 대량 생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위험한 것은, 욕망이 익숙해지게 되면 스스로 욕망 자체가 되어버리기도 한다는 것. 물질만능주의가 부패를 만들어내고, 과도한 외모지상주의 추구가 성형중독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이름이 필요한 여성들

 

여기서 한 가지 올라오는 질문은, 왜 재스민이라는 꽃은 어둠이 오면 꽃봉오리를 열까? 그것은 혹시 낮이라고 지칭되는 의식, 곧 타인의 욕망뿐이었던 일상에서 묻어두었던 ‘진짜 나’의 발화는 아닐까, 라는 궁금증이다.

 

왜냐하면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외부로부터 하나의 타자로 혹은 하나의 사물로 이해하려고 시도함으로써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재스민이 그토록 환상 속에 머무르고 싶었던 것에는 ‘진짜 나’를 대면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 있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둠이라는 절망 속에서는 그동안 내가 만나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진정한 나’를 찾을 가능성이 많을 터. 과연, 재스민은 그녀의 이름처럼 어둠 속에서 굳게 닫아놓았던 자신의 봉오리를 열었을까?

 

▶ 우디 알렌 감독, 케이트 블란쳇 주연의 영화 <블루 재스민>(2013) 중에서

 

재스민에게 아마도 유일한 희망이었을 드와이트, 그를 통해 욕망하던 장밋빛 미래는 그녀가 사기꾼 남편을 떠난 빈털터리 이혼녀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좌절되고 만다. 이제 재스민은 그녀만의 환상 속으로 온전히 들어간다. 동생 진저의 집을 나와 거리 벤치에 혼자 앉아 미친 여자처럼 계속 혼잣말을 해대는 마지막 장면은 우디 알렌의 전작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에 나오는 여자주인공과 아련하게 겹쳐진다. 대공황이라는 절망 속에서 <카이로의 붉은 장미>라는 영화 속 판타지 세상으로 도피해버린 주인공 미아 패로의 몽롱하게 꿈꾸는 눈빛 또한 재스민과 슬프게 오버랩된다.

 

그런데, 재스민이 더 아프다. 아직 환상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지도 못한 채 경계선을 머무는 고통스러움이 날카로운 유리조각처럼 손에 만져지는 것 같아서.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현실을 직면하지 않은 죄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삶의 진실이라고 하기에 재스민에게 현실은 너무도 가혹하고, 그녀는 이미 텅 빈 블루다. 삶의 뿌리를 상실했다고 하지만, 그녀가 과연 온전한 자신으로 삶에 뿌리를 내린 적이 있었던가? 이 세상에 타자로서의 여성이 아닌 주체로서의 자신으로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 재스민이 아닌 자넷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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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성 2017/01/21 [00:06] 수정 | 삭제
  • 케이트블란쳇의 미워할수도 사랑할수도 없는 연기에 감탄을 하면서 봤어요. 우디앨런이 뒤에서 짓고있는 냉소는 솔직함에 대한 질문을 계속 담고 있는것 같아요. 다른 캐릭터들의 플롯에서도 약간 그런걸 담았네요. 타자화된 자신의 삶. 묘하게 슬퍼지는건 아마 영화를 보는 사람의 삶이 그것과 닮아있다는걸 우디앨런이 캐치하고 있지 잃았을까요? 재스민과 자넷 사이, 우리는 어디에 있나.
  • 제비 2017/01/08 [19:23] 수정 | 삭제
  • 우연히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흑백영화를 보게되었는데, 너무 인상적이었고, 그렇지만 비극적인 주인공을 계속 보고 있기가 힘들었던 영화였어요. 21세기 판은 물론 다른 캐릭터로 그렸겠죠? 우디 앨런 감독이 그런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하긴 워낙 유명한 희곡이라고 하죠.) 케이트 블란쳇이 주연을 맡았다니, 영화적인 언어의 측면에서도 보고 싶어지네요.
  • 칼리나 2017/01/08 [18:50] 수정 | 삭제
  • 주체로서의 삶이 아닌 타자의 삶은 스스로 진짜 원하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공감이 많이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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