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친절을 베풀 권리를 원한다

<도영원의 젠더 프리즘> 내가 ‘아시아 여성’으로 불릴 때

도영원 | 기사입력 2017/02/18 [15:43]

나는 친절을 베풀 권리를 원한다

<도영원의 젠더 프리즘> 내가 ‘아시아 여성’으로 불릴 때

도영원 | 입력 : 2017/02/18 [15:43]

※ 세상을 바라보는 20-30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싣는 ‘젠더 프리즘’ 칼럼입니다. 필자 도영원님은 영국 글래스고대학교에서 인권과 국제정치 석사를 전공하고, 현재는 한국에서 프리랜서 인권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일반적인 사람들은 참고할 것: 타인을 배려하고 친절하게 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조금 덜 일반적인 사람들은 참고할 것: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양보하는 재능이 조금 더 뛰어나다! (그들보다 더 많은 연습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와 같은 입장에 있는 여성들에게, 당신이 친절한 사람이 될 권리를 갖는 순간을 파악해 친절한 행동을 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그 순간이란, 예컨대 적절하게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우이다. 친절의 미덕은 주는 사람의 의도와 받는 사람의 인식이 만나야 비로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외국 대학생들이 여름방학 동안 우리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함께 수업을 듣고 생활을 하면서 다른 문화권에서 온 자매학교 학생들과 친해질 수 있는 교류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그 중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다는 한 미국 백인 남학생과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은 문제의 사건이 우리가 고궁 견학을 간 날 일어났다.

 

그 날은 날씨가 찌는 듯이 더웠다. 나는 손수건에 찬 물을 적셔 그 친구의 팔에 둘러주었다. 그런데 그 때,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고마워”가 아니었다.

 

“역시 아시아 여성들은 참 친절해!”

 

친절을 베푼 건 나인데, 난데없이 약 이십억 명의 아시아 여성들이 칭찬을 받은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이런 칭찬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다면 이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어야 했던 나의 선행이 전혀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겠다. 그러나 이 글을 통해 칭찬을 전해들은, 대부분 아시아 여성일 내 독자들은 과연 기뻐할까? 추측이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나도 그 말을 들은 순간 불쾌감이 먼저 고개를 들었으니 말이다. 호의를 베푼 대가로 감사의 인사가 아닌 역할기대를 들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아시아 여성은 친절하고 가족을 잘 돌본다는 선입견이 사실이라면, 누구에게 이득인가? 여성이 본래 배려심이 빼어난 존재라면, 기뻐할 것은 그 배려를 취할 남성들이다. 현실의 가정이나 일터에서 종종 보듯이, 누군가 한 사람이 양보해야 할 때 집단 내에 여성이 존재한다면 합의는 훨씬 쉬워진다. 친절한 행동을 하기 위하여 여성이 감수해야 하는 희생(혹은 기회비용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지도)에 대해 감사하지 않아도 되고, 보상할 필요도 없다. 물론, 친절하지 않은 여성에게는 ‘여자답지 않다’는 말로 다른 여성들처럼 친절하게 행동하도록 강요할 수도 있다.

 

한 사회에서 성평등 의식이 보편화되어 ‘여성은 본래 희생적인 존재’ 따위의 인식이 자리잡을 수 없게 되면, 아이러니하게도 친절을 베푸는 외국인 여성의 존재는 더욱 간절해진다. 같은 나라의 여성은 잠정적으로라도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생각되는 데 비해, 다른 문화권의 여성에게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기대해도 흠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문화적 차이인 양 합리화하면 그만이다.

 

감사의 인사가 우리가 한 구체적인 행동이나 우리 자신을 직접적으로 가리키지 않는다면, 그가 우리의 호의가 가지는 의미를 정말로 인식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도 마찬가지로 덥고 힘들지만 옆에 있는 친구를 더 걱정해서 물에 적신 손수건을 건네는 것이 인간관계에 대한 열정이나 배려심보다 타고난 여성다움을 더욱 요하는 행동이라면, 그런 칭찬을 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친절이란 ‘여성의 덕목’ 이상의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순간에 깨닫는다. 나는 이 사회에서 친절을 베풀 권리를 갖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 “위험: 이 생물은 자발적으로 친절합니다.”

 

사회학에서 사람들은 타자(他者)를 자신이 가지지 않은 특징으로 정의한다고 한다. 누군가 여자는 어떻고 남자는 어떻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그가 편협한 인식의 편의를 위해 젠더를 이분(二分)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여성을 친절한 성이라고 말할 때, 남성인 화자는 자신은 ‘원래부터’ 친절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셈이다.

 

타인을 단순히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속성으로 상상하는 것은 쉽다. 어려운 일은, 상대방도 나와 마찬가지로 친절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며 기회비용을 지불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일이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게 하지 말라고, 유교 경전인 <논어>에도 나오지 않던가!

 

우연찮게도, 대중적 페미니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수행 중 하나가 ‘친절하지 않게 말하기’이다. 표현하는 방식은 다르겠지만, 아마도 내가 나 자신의 친절함으로부터 소외되는 경험을 했던 것처럼 다른 여성들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친절 콤플렉스’를 경험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많은 영 페미니스트들은 ‘막말에는 막말로, 비논리에는 비논리로’ 받아치기로 마음먹음으로써 페미니즘에 입문한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렇게 페미니스트로 거듭나면서 오히려 내가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새삼 깨달았다.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나를 페미니스트로 만들었을 테니, 이런 면이 있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페미니스트가 남성사회에서 얼마나 독하고 양보하기 싫어하는 여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일이지만 말이다.

 

남성중심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친절함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비판한다. 그러나 일방적인 친절의 굴레는 무엇보다 여성을 자신이 베푸는 친절함으로부터 소외시킨다는 점에서 모욕적이다. 가부장 남성이 바라보는 여성은 친절한 존재이며, 배려가 몸에 익은 존재, 그리고 모성애를 가진 존재이다. 그래서 자신의 것을 양보하고도 다른 사람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기뻐지는 존재이다.

 

그러한 시선 안에서 여성인 내가 행하는 친절은 의미를 잃는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친절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내가 친절을 행하는 순간 구체적인 행위는 사라지고 한 인간의 노력이 아닌 여성적인 수행이, 주어진 역할을 다하려는 여성이 있을 뿐이다. 성실한 인간으로서 양보하고 타인을 위해 손을 내미는 즐거움은 없고, 체제에 순응하는 태만한 즐거움만이 있다.

 

나는 친절을 베풀 권리를 원한다. 나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벗어나 자발적으로 배려할 자유를 원한다. 왜냐하면 나도 친절하기 위해서 노력이 필요한 인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 노력을 실천하고 싶은 인간, 공감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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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d 2017/03/25 [15:22] 수정 | 삭제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rasaka 2017/02/20 [09:49] 수정 | 삭제
  • 정말 정확한 지적입니다. 읽는 내내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같은 나라의 여성/외국인 여성의 구분되어 관찰된 시선은 정말 예리하네요. 너무 공감합니다. 친절함은 여성의 의무가 아니며, 사람이라면 누구나 타인을 위해서 배려하고 친절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 진심을 역할 분담인양 관습에 익숙해진 젠더 이분법으로 편협하게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남성의 입장에서도 깊이 생각해보아할 문제고, 여성 스스로 이것이 문제라는 인식도 중요할 것 같아요. 어렴풋하게 마음에 도사리고 있던 어떠한 인식을 이렇게 내 마음처럼 잘 풀어준 글을 만나면 힘이 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리며 저역시 열심히 읽으며 소리를 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독자 2017/02/19 [09:12] 수정 | 삭제
  • 참 좋은 문제의식을 던져주는 기사네요. 어떤 사람의 친절은 좋고 멋진 성품으로 인정받고 어떤 사람들의 친절은 오히려 만만한 대상으로 격하되곤 합니다. 그 부당함애는 계층과 인종과 성별!!!이 다 얽혀있죠.
  • day 2017/02/18 [18:25] 수정 | 삭제
  • 정말 공감합니다. 제가 무슨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 상대방이 '역시 여자라서 ㅇㅇㅇ하구나'라고 얘기할때 일일히 '여자라서 ㅇㅇㅇ한게 아니라 내가 ㅇㅇㅇ한 사람인거야' 라고 답하려고 노력하고있습니다. 조금 귀찮지만 말이죠
  • singing 2017/02/18 [16:38] 수정 | 삭제
  • 넘 공감가는 기사... 속이 후련하다.. 그리고 정말 친절하시네요 ^^ 남자였다면 다르게 얘기됐을 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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