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여성신문 지면에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뜨악한’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명색이 여성주의를 표방한 언론인데 이런 글들로 지면을 채워도 되는 건지 혼란스럽다.
2003년 1월. 여성신문. <외모도 분명 경쟁력이다> ‘외모가 경쟁력’이라는 광고카피를 내보냈다가 여성계의 강한 항의를 받고 수정한 회사도 있는데 여성신문에서 이게 무슨 소린가. 이 글의 요지는 ‘이미 외모가 채용 기준의 하나로 인정 받고 있는 만큼 외모가 경쟁력이라는 현실을 회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 끔찍한 외모차별의 사회에서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지 말고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지금까지 외모중심의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했던 여성운동은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었나. 거기에 덧붙여 아무리 아름다운 외모를 타고 난 사람일지라도 ‘가꾸지 않으면’ 지속될 수 없다면서 외모도 능력과 마찬가지로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어느 정도 개발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죽음을 각오한 성형수술과 다이어트가 횡횡한 이 병적인 사회에서 ‘외모도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개발이 가능하다’는 말을 위로라고 하는가. 2003년 2월. 여성신문. <우리에게 낙태문제는요> 아이들을 지우개로 지우는 장면이 담긴 사진. ‘지우면 싫어요’가 눈에 띈다. 아, 낙태! 낙태! 한동안 여성들의 낙태담론이 뜨거웠다. 콘돔 쓰면 섹스를 못하겠다는 한국남성들 특유의 문화로 인해, 학생들 섹스할까봐 피임교육 못 시키게 하는 학교와 부모의 의식수준 때문에, 강간인지 성관계인지 구분 못하는 남성들의 폭력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있단 말인가. 여성들이 낙태를 하기까지의 상황, 수술대 위에서의 경험, 그리고 그 후유증. 그런 공포와 상처는 또 고스란히 여성의 몫으로 남는다. 낙태를 반대한다는 사람들은 고결하게 ‘도덕’과 ‘생명의 존엄성’을 외치고 나오면서 여성을 ‘살인자’로 몰아댄다. 낙태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비난을 한 몸에 받아야 하는 여성들. 최근에야 비로소 여성들은 묻어두었던 그 고통에 대해, 낙태의 경험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시점에서 여성신문은 “낙태는 피임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라 한 생명을 빼앗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낙태를 피임이라고 생각하는 여성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낙태를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여성들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선택’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 그 절벽에서 수술대에 누워야 했던 여성들의 가슴에 ‘살인자’라는 낙인을 찍어야겠는가. 진정 그래야만 하겠는가. 2003년 3월. 여성신문. <‘호주머니 사정’도 평등해야지> “많은 여성들이 남녀평등을 외치지만 많은 경우 여성들은 ‘남녀평등’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해석하기도 한다.” 마초가 아니고서야 이런 발언하기 쉽지 않은데 근거가 무엇일까. 평소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던 선배가 혼수 준비할 땐 한 발 뒤로 물러섰는데, 신랑 쪽이 부담한 결혼비용에 비해 그 선배가 부담한 돈이 적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남성과 동등하게 경제 부담을 져야만 당당하게 여성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누가 보면 우리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호주머니’를 가진 줄 알겠다. 우리 사회에서 경제권을 가진 자가 누구인가. 입사도 하늘의 별 따기지만 남성과 같은 일을 해도 임금을 절반 밖에 못 받는 것이 여성들의 현실인데. 결혼비용을 여성 쪽에서 덜 들여서 고개를 숙였다는 예를 갖다 대면서 평등해지길 원한다면 남성과 동등하게 경제 부담을 져야 한다고? 2003년 4월. 여성신문. <‘커피타기’에 대한 다른 생각> “많은 여성들이 차 시중 요구에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맛있는 차를 내어놓곤 한다.” 이 글도 역시 압권이다. 차 시중을 요구 받는 상황에서 좀더 현명하게 논리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설명해주고 있다. 답은 ‘마음먹기에 달렸으니 발상의 전환을 하라’는 것. 4년 넘게 비서 일을 하면서 수백 번의 차 접대를 했고 어떤 때는 “내가 지금 무얼 하러 회사에 왔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는 필자. 그런데 발상을 바꾸었더니 손놀림이며 행동들이 하나같이 반듯해 졌고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접대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기 전 백인들은 ‘너희는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주인 밑에 사는 것이 행복이다’라고 흑인들을 세뇌시켰다지? 여성신문, 아무 글이나 막 싣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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