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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정치적 욕망’에 대해 변명하지 않는 영화
존 매든 감독, 제시카 차스테인 주연 <미스 슬로운>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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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에 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들은 유의하세요. -편집자 주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은 유능한 로비스트다. 고객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위법도 마다하지 않는 그는 지금껏 높은 승률을 기록해왔다. 그런 그에게 한 남성 국회의원이 찾아온다. 그는 슬로운에게 총기규제 법안이 철회될 수 있도록 여성들을 설득하는 역할을 맡아달라고 말한다. 여성들은 개인의 무기 소유와 휴대 권리를 포함한 수정헌법 2조의 강력한 반대자들이기 때문이다. ‘총기 피해자 여성’에서 ‘총기로 가족을 지키는 강한 여성’으로 프레임을 옮겨, 총기 사용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려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 존 매든 감독, 제시카 차스테인 주연 영화 <미스 슬로운>(2016)

 

슬로운은 그의 계획을 듣고 격한 웃음을 터트린다. 옳지 않은 일을 위해 “핑크색 포장지”를 씌우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슬로운은 그의 반대편에 서서, 총기를 규제하기 위한 ‘히튼 해리슨 법안’(영화 속 가상 법안으로, 총기 판매 시 신원조회 의무를 포함한다)을 통과시키기 위한 활동을 시작한다.

 

영화 <미스 슬로운>(Miss Sloane, 존 매든 연출, 미국, 2016)은 로비스트 슬로운이 총기규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으며 분투하는 과정을 담은 정치 스릴러다. 슬로운은 자신의 커리어에 집착하고 승리를 욕망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이 영화에는 슬로운 외에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여성 조연들이 여럿 등장한다. 고교 총기난사 사고의 생존자로, 수년 간 총기규제를 강화하기 위해 힘써왔던 에스미(구구 바샤-로), 로비스트 업무에 환멸을 느끼며 진로를 고민하는 제인(알리슨 필)이 그들이다. <미스 슬로운>은 독보적인 여성 주연과 매력적인 조연들로 ‘벡델 테스트’(Bechdel test)를 가뿐히 통과한다.

 

※벡델 테스트(Bechdel test)란, 1985년 미국의 만화가 엘리슨 벡델에 의해 고안된 영화 성평등 테스트다. ①이름을 가진 여자가 두 명 이상 나올 것, ②이들이 서로 대화할 것, ③대화 내용에 남자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내용이 있을 것. 이 세 가지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 <미스 슬로운>존재감을 드러내는 여성 조연들이 여럿 등장한다.

 

이례적인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영화들은 그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손쉬운 도구로써 남편이나 자식 등 가족 이야기를 끌어오곤 했다. 여성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넓힌 것으로 평가받았던 <비밀은 없다>(이경미 연출, 2015)와 <미씽 사라진 여자>(이언희 연출, 2016) 역시 이런 한계를 넘지는 못했다.

 

반면, 슬로운은 철저하게 자신의 신념으로부터 움직이는 인물이다. 이 영화는 슬로운을 설명하기 위해 여성의 판단에 맹목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되는 가족 코드를 포함하지 않는다. 또한 이 영화는 ‘총기규제 강화’라는 신념의 근거로써 슬로운의 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사실상 이 영화는 슬로운을 이해하기 위한 장치를 관객에게 제공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슬로운은 목적을 위해 어떤 수단도 불사하는, 비뚤어진 자기개발의 주체일 뿐이다. 영화는 슬로운을 통해 정치 스릴러로서의 장르적 매력에 집중한다.

 

영화는 과거도, 주변도 없이 자신의 신념에 몰두하는 슬로운을 ‘욕망에 대해 변명하지 않는 여성 캐릭터’로 그려낸다. 영화에서 이런 캐릭터는 주로 남성으로 묘사되곤 했다. 정치 활동의 주체로서 욕망을 끝없이 표출하는 남성의 자화상 말이다.

 

총기규제를 반대하는 입장의 로비스트 팀은 슬로운의 프라이버시를 탈탈 털어 그의 경력을 끝장내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고, 정치적 이익을 사수하기 위해 수단을 불사하는 남성 캐릭터들의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위법 모의를 포함한 남성의 일탈은 익숙한 재현이기에 변명이 필요치 않다. 그 남성들은 그냥 그런 캐릭터로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남성 의원들의 얼굴에 슬로운의 얼굴이 오버랩 된다. 욕망에 변명하지 않는 슬로운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여성의 ‘일탈’에만 변명 거리를 기대하는 것일까. 어째서 슬로운이 ‘사이코패스’로 지목받는 것일까.

 

▶ 존 매든 감독, 제시카 차스테인 주연 영화 <미스 슬로운>(2016)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인생이나 감정에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 슬로운의 행보는 분명 논쟁적이다. 자신의 인생마저 무기로 삼아 총기규제 법안을 기어이 통과시키고, 미국 의회의 부패성까지 지적한 ‘성공적인’ 결말이어서 더욱 그렇다. 신념 있는 로비스트 슬로운은 개인의 승리를 넘어 공적 목표를 달성했지만, 그 과정에는 상처가 남았다. <미스 슬로운>은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 슬로운을 통해 관객에게 여러 질문들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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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4/26 [17:42]  최종편집: ⓒ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 17/04/26 [19:11] 수정 삭제  
  영화 보고싶어졌어요 스릴러 장르 원래 안좋아하는데... 제시카 차스테인 필모도 볼만 하겠어요. 호감가는 배우인데 매력적인 캐릭터 만들어갔으면...
바람지기 17/04/26 [19:50] 수정 삭제  
  결말의 내용이 꼭 글에 들어갔어야 했는지는 아쉽지만 흥미로운 영화를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7/04/27 [07:22] 수정 삭제  
  '성공적인 결말'이라는 말만 빼주세요. 그거 알고 보면 재미없는데....ㅠㅠ
얀새 17/05/11 [07:46] 수정 삭제  
  영화 꼭 봐야겠어요 주연배우도 너무 좋아하는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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