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여신’을 찾아가는 여성들의 연대

<영화로 읽는 페미니즘> 루나사에서 춤을

지아(知我) | 기사입력 2017/05/03 [18:07]

‘내 안의 여신’을 찾아가는 여성들의 연대

<영화로 읽는 페미니즘> 루나사에서 춤을

지아(知我) | 입력 : 2017/05/03 [18:07]

※ 필자 소개: 지아(知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공연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영화칼럼을 비롯해 다양하고 새로운 실험으로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운명을 자신의 손에 움켜쥐고, 몸으로 직접 살라’

 

몇 해 전 가을, 강화도의 여신 영성모임에서 만난 그녀는 마치 안데스 산맥을 횡단하는 인디오 여자 같았다.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에 이국적인 모자,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를 닮은 어둡고 진한 눈썹, 투박하고 무표정한 얼굴은 지상에 강렬하고도 단단히 서 있는 것 같았다.

 

(※ 1970년대 초 미국에서 시작된 여신 영성운동은 여신을 중심 상징으로 한 영성을 추구하는 대안문화이며, 가부장제 사회의 폐단으로 인한 고통을 치유하는 페미니즘 운동으로서 현재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나가고 있다.)

 

여름밤 나신(裸身)이 되어, 고향인 강화의 부드러운 진흙 갯벌에 누워 쏟아지는 별을 바라본다는 이야기는, 또 얼마나 야생적인 자유로움으로 다가왔었는지! 그 날 모임에서 만난 여성들 중에서 그녀는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가장 독자적인 사람이었다.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인 ‘야생의 춤’처럼, 몸을 열어 자연과 소통하는 사람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침에 눈을 뜨고 만나는 모든 존재, 작은 들꽃 하나에도 마음을 다해 건네는 인사였다. 우주의 중심인 ‘내’가 우주의 중심인 ‘너’에게 전하는 인사법이라는 설명은 나에게 왠지 모를 영감과 힘을 주었다. 운명을 자신의 손에 움켜쥔 채 스스로를 주체적으로 세워나가는 여신 영성운동의 모토를, 그녀는 몸으로 직접 살고 있었던 것이다.

 

가부장제가 만든 갑옷을 입고 사는 여성들

 

▶ 팻 오코너 감독, 메릴 스트립 주연 <루나사에서 춤을> 1998.

여성들 스스로 몸이 전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들에게 강요한 갑옷을 벗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영화 <루나사에서 춤을>(Dancing at Lughnasa, 팻 오코너 감독, 메릴 스트립, 마이클 갬본 주연, 1998)에서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통로로 춤과 음악을 이야기한다.

 

영화의 배경은 1936년, 남자가 여자를 다스림이 마땅하다는 의식이 팽배했던 시대 아일랜드의 작은 시골 마을. 부모가 죽은 후 집을 지키기 위해서 결혼하지 않은 채 모여 사는 다섯 자매의 소박한 일상이 원초적이고 아름다운 자연풍경 속에서 펼쳐진다.

 

교사이면서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인 첫째 케이트는 종교적인 전통을 중요시하는 도덕주의자로, 완고하고 깐깐하다. 그에 반해 둘째 매기는 담배 피는 것을 즐겨하는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다. 뜨개질로 집안의 생활비를 보탤 정도로 손재주가 좋은 셋째 아그네스는 자매들 중에서 가장 속이 깊고 과묵하다.

 

정신적으로 미성숙해서 언니들의 걱정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넷째 로즈에게서는 아이 같은 순수함이 가득하다. 다섯 자매의 막내 크리스티나는 싱글맘이다. 크리스티나는 여덟 살배기 어린 아들 마이클을 네 언니와 함께 키우고 있는데, 영화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마이클의 내레이션을 통해 담담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전개된다.

 

춤과 음악이 있는 축제, 루나사의 의미

 

어느 날, 큰 오빠 잭이 아프리카에서 25년 만에 집에 돌아오면서 평온했던 일상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가톨릭 사제로 오랫동안 아프리카에서 선교 활동을 했던 잭이 정신이 온전치 않은 상태로 귀향하자, 오빠 잭을 못마땅하게 여긴 지역 신부의 모략으로 교사인 케이트가 학교에서 갑자기 해고를 당하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방직공장이 마을에 들어서면서, 그동안 뜨개질로 생활비를 보태던 셋째 아그네스도 하루아침에 일감을 잃게 된다. 아내가 도망간 유부남 대니 브래들리와 연애를 하고 싶어 하는 넷째 로즈가 케이트와 보이지 않는 갈등을 일으키던 차였다. 또 막내 크리스티나는 마이클의 아버지이자, 18개월 만에 찾아온 애인 제리가 민주주의라는 이상(理想)을 위해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다는 말을 듣고 힘겨워한다.

 

이런저런 삶의 부침을 견디고 있는 그들에게 해마다 돌아오는 축제 루나사는 틀에 박힌 일상을 떠날 수 있는 달콤한 일탈이다. 그 해 풍작을 기원하는 루나사 축제에는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춤과 음악이 풍성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 1936년 아일랜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다섯 자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루나사에서 춤을>


그러나 루나사를 이교도의 방종한 축제라고 생각하는 케이트(메릴 스트립 분)는 동생들이 루나사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을 마뜩지 않게 여긴다. 다 큰 여자들이 춤이라니! 그녀는 정숙해야 하는 가톨릭 여자 신자에게 춤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수확 철에 땅의 여신 오비에게 바치는 축제를 웃고 즐긴다고 말하며 노래 부르고 춤추는 걸 좋아하는, 고향을 떠나기 전과는 너무도 달라진 오빠 잭을 다섯 자매들, 특히 케이트는 낯설게 바라본다.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넷째 동생 로즈와 싱글맘인 막내 크리스티나, 춤추는 걸 마치 신에게 예배드리는 것처럼 여기는 큰 오빠 잭 모두가, 그녀에게는 단정한 일상에 균열을 내는 존재들인 것이다.

 

어린 시절 교회의 청교도적인 문화 속에서 성장한 나는 케이트에게 왠지 모를 연민이 들었다. 몸의 본능을 죄악시하며 강박적인 금욕주의에 짓눌려 있던 교회 사람들을 그녀는 다시금 떠올려주었다.

 

‘이교도의 문란한 축제’라는 근본주의적 종교관

 

오래전, 아마도 성탄절 이브였을 것이다. 교회의 청년들과 함께 무리지어 마을을 돌아다니며 캐럴을 부르고 있는데, 띠리릭 문자가 왔다. 남자친구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들고 마을 입구의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였다. 한 시간 넘게, 집집마다 돌아다녔던 캐럴 합창도 거의 끝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합창 대열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평소 틈만 나면 혼전순결을 삶의 중요한 가치로 강조하던 한 여자 청년이 야심한 밤에, 그것도 크리스마스를 앞둔 날밤 남자친구를 만나는 것이 마치 문란한 것인 양 나를 비아냥대는 것이 아닌가. 당시 난 그녀의 생각이 도통 이해되지 않고 황당하기만 했다.

 

이후 그녀가 교회의 한 남자 청년과 사귀며 빈번히 여행을 다니다가, 헤어진 후에는 ‘순결을 책임지라’며 전 남자친구를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그녀의 이중적인 면모에 놀라면서도 씁쓸했던 기억이 있다.

 

한국 교회에서 그녀와 같은, 회칠한 무덤의 위선적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 그들의 특징 중 하나는 이분법적인 사고다. 진리가 오로지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팻 오코너 감독, 메릴 스트립 마이클 갬본 주연 <루나사에서 춤을>(Dancing at Lughnasa, 1998) 

 

영화에서 케이트가 춤을 이교도의 문란한 축제로 바라보는 것 역시 이원론적인 시각 아닌가. 그녀는 춤 안에 치유의 힘이 들어 있음을 보지 못한다. 여성들이 자신의 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자신 안의 생명력을 자각하며 자신을 사랑해가는 과정임을 알지 못한다.

 

결국, 내가 교회를 떠난 이유 중 하나도 이분법적 사고와 공생하는 근본주의적 신앙이 다양한 존재의 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신은 때론 어머니요, 때론 친구요, 때론 아버지인데, 꼭 ‘아버지’로만 부르라는 강요는 억지스러워 보였다. 창조의 질서라면서 남성 밑에 여성을 서열화하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모든 것을 대립적으로 갈라놓은 채, 서로 다른 것이 함께 존재할 수 있음을, 서로 다른 것 사이에 또 다양한 층위들이 존재할 수 있음을 부정하는 믿음은 위험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흥미로운 점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을 남성의 하위 존재로 대하며 통제하고 억압하는 현상이 이원론적인 근본주의 신앙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페미니즘은 많은 사람들이 대립된 두 가지만을 바라볼 때, 두 가지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주목하는 존재 발언이 아닐까. ‘사이’에 숨어있는 직관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여정은 아닐는지.

 

그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인정할 때만이, 우리는 여성과 남성이 창조적으로 공존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살아있음, 존재함…다섯 자매가 함께 추는 춤

 

그러나 그 세상으로 가는 여정은 아직도 깊은 어둠이다. 영화에서 집은 낮에도 어둑어둑하고, 후반부에 라디오의 음악에 맞춰 다섯 자매가 몸을 던져 춤을 출 때도 역시 밤의 어둠이 그들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어둠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춤을 추는 검은 그림자들, 그 쉼 없는 열정의 꿈틀거림이었다. 마치 어두운 빛의 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들 안에서 숨을 쉬고 있는 눈부신 무의식의 소리들이 춤으로 발현된 것처럼 느껴졌다.

 

▶ 김용님    달을 빚는 여신(좌)  달을 들어올리는 여신(우)   ⓒ 김용님 화가   

 

그 무의식이 전하는 춤을 여신 영성모임에서 만날 수 있었다. 밤에 바닷가에 모여 여성들과 함께 춤을 추면서 내 몸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가 기울여졌는데 그 순간, 그동안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했던 내 안의 묵은 감정들이 자유롭게 풀어지는 걸 느꼈다.

 

문득, 들숨과 날숨이 나를 감싸 안는 걸 느꼈다. 숨이 내 안의 빈 공간을 채우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나를 지지해줄 무언가가 내 안에 단단하게 존재하는 믿음과도 같았다. 생에서 만나는 슬픔과 고통을 넉넉히 품어주고 받아줄 수 있는 커다란 쿠션이 내 안에 있는 따스한 느낌이었다.

 

그렇다. 춤은 살아있음, 바로 현존의 감정이었다. 낮에 들었던, 미국에서 온 한국인 여성학자(자신만의 틀에 사로잡힌 그녀는 마치 영화 속 케이트와 비슷했다)의 관념적인 강연보다 훨씬 의미 있고 충만한 시간이었다. 그날은 마침 3년 만에 찾아온 개기월식의 밤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바닷가에서 춤을 추고 숙소(고향인 강화도에서 오랫동안 여신영성에 관한 그림을 그리는 김용님 화가의 집)로 걸어 돌아오는 길, 달빛 한 점 없는 칠흑 같은 밤하늘에 오월의 라일락처럼 무수히 돋아난 별들은 내가 이제까지 만난 그 어떤 별보다도 찬란했던 것이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이 더 빛난다는 걸, 그 날 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 살아있음, 현존의 정점은 다섯 자매가 함께 어우러져 웃으며 춤을 추던 햇살 난만한 여름날이다. ‘내 안의 여신’을 찾아가는 여성들과의 연대가 아름다웠던 강화도의 밤처럼, 자신 안에 숨 쉬는 생명력을 느끼는 순간, 그들은 자유롭고 행복했다. 교회라는 관습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을 벗어나 오히려 춤을 추면서, 자연 도처에서 내가 신을 더 가깝게 만날 수 있었던 것처럼.

 

▶  몇 해 전 가을, 강화도에서 열린 여신 영성모임 참가자들.   ⓒ 지아(知我)

 

언어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

 

벨기에 출신의 철학자이자 언어학자인 뤼스 이리가레는 페미니즘에 관해 여성과 남성의 평등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여성들 스스로 단지 어머니로서가 아닌 ‘여성’ 그 자체로서 가치를 발견할 때, 여성들이 평등의 권리도 더 잘 누릴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여성들 스스로 존재 자체로서 자신을 알아가고 사랑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일 터.

 

바닷가에서 춤을 추고 돌아온 화가의 집에서 그녀, ‘야생의 춤’은 몇 십 년간 살았던 고향인 강화에 대해 어느 날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배낭 하나 짊어지고 강화도 구석구석을 직접 발로 찾아다니며 몸으로 순례했는데, 그 이야기는 내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은 기존에 사회에서 주입된 관념일 가능성이 많은 탓이다.

 

인간이 최초로 신을 여성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나, 이제는 잊힌 이야기로 전락해버리지 않았던가. 역사에서 우리는 여신의 흔적을 꾸준히 지워나갔다. 자연의 생명과 죽음, 재탄생을 관장하던 여신은 단순히 남성성에 반하는 여성성만을 가진 존재는 아니었다. 인간의 의식의 관점에서는 여성적인 이미지로 보이지만. 여신은 여성성과 남성성 이 두 가지를 함께 지닌 존재, 이원론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였던 것이다.

 

아그네스가 로즈를 데리고 런던으로 떠나버린 뒤에도 남은 가족들의 삶은 지속되었지만, 함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던 찬란했던 여름날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마이클의 내레이션은 그래서 그 기억을 잊지 말라고, 힘들어도 계속 따라가라고, 종국에는 회복하라고, 낮지만 간절히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만 같다.

 

“난 어른이 돼서 이곳을 떠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그 해 여름은 꿈처럼 기억에 남았다.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상상한 음악의 꿈. 음악과 그 메아리가 한데 어우러진 꿈. 그때를 회상하면 춤이 떠오른다. 언어가 몸짓에 굴복한 듯한 춤이. 말이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기에 언어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춤이.”

 

<루나사에서 춤을>을 더 잘 읽기 위한 영화 미학

 

▶ 팻 오코너 감독, 메릴 스트립 마이클 갬본 주연 <루나사에서 춤을> 1998

루나사는 아일랜드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 고대부터 수확 철에 풍작을 기원하며 열린 축제였다. 루나사는 농업의 풍요를 주관하는 태양의 신 ‘루’를 기념하는 축제였는데, 영화에서 루나사라는 이름을 지닌 라디오는 바로 루나사 축제의 생명력을 전하는 오브제로서 작용한다.

 

다섯 자매는 라디오 루나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 루나사에 가고 싶은 갈망을 키우고 아마도 오래전에 갔었던 루나사의 기억도 떠올렸을 것이다.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여성 안에 유전인자로 새겨진 여신의 기억, 지치지 않고 무한히 샘솟는 생명력을 말이다.

 

영화 후반부에 라디오 루나사가 잡음으로 지지직거리자, 주파수를 애써 맞춘 다음에 어둠 속에서 광란의 춤을 추는 장면이야말로 여성 안에 존재하는 생명의 기운을 찾아가기 위해 여성들이 통과해야 하는 고통의 여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 해 처음으로 갖게 된 라디오 루나사를 보고 큰 오빠 잭이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에 반해, ‘과학’일 뿐이라고 케이트가 심드렁하게 말하는 장면 또한 잊히고 왜곡된 여신문화의 아픔을 역설적으로 만나게 해준다.

 

한편, 연을 날리다가 그만 줄을 놓쳐 하늘 높이 사라져 가는 연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는 어린 마이클이 처음과 마지막에 반복해서 나오는 것은 지금은 잊힌 여신문화, 그 생명력을 기억하고 찾아가라는 간절한 바람으로 다가온다.

 

큰 오빠 잭이 위대한 땅의 여신 오비를 기리는 축제를 말하고, 나뭇가지로 양동이를 북처럼 두드리며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마치 주술처럼 반복하는 장면은 그래서 눈물이 난다. 영화 속 두 남자 큰 오빠 잭과 크리스티나의 아들 마이클이 여성과 함께 연대하며 여신의 기억을 함께 따라가려는 남성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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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름 2017/05/04 [14:02] 수정 | 삭제
  • 전원적인 풍경 정말 좋아하는데 기사 보니까 꼭 봐야겠어요. ㅎㅎ
  • 루루 2017/05/04 [11:28] 수정 | 삭제
  • 여신 영성운동이라는 멋진 페미니즘이 있다는 걸 알게돼서 감사합니다! 솔직한 고백이 담겨있어서 더 감동~ 이영화 꼭 보고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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