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정말 좋아해”

만화가 지망생 신위

홍문보미 | 기사입력 2003/10/13 [02:51]

“모두 정말 좋아해”

만화가 지망생 신위

홍문보미 | 입력 : 2003/10/13 [02:51]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그 중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이를 찾으면, 그 사람이 바로 ‘사수자리’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이 진실인지는 물론 알 수 없다. 다만 사수자리인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이야기라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녀의 핸드폰에는 웃음처럼 로고가 반짝인다. “모두 정말 좋아해.”

몸이 움직이는 대로, 투명하게

부산영화제 마지막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대구에 들려 신위를 만났다. 4년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그녀의 일러스트를 보고 메일을 보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계속 연락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거리 탓에 얼굴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2년 만에 잠깐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4년 전 대구에서 만난 스무 살의 그녀는 긴 머리를 파닥이며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울타리가 있으면 달려가 넘고 싶다며 뛰어다니던 그녀에게선 여자들이 몸에 대해 갖고 있는 어떤 터부가 없어보였다. 마치 단 한번도 “여자애가 왜 그러니? 조신하게 행동해!” 따위의 말을 듣지 않은 것처럼.

당시 그녀는 휴학생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학교를 자퇴하고 계속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화를 그리고 있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도 좋았고 수업도 괜찮았지만, 딱히 계속 대학을 다녀야 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반대하시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그냥 이렇게만 말씀하셨어요. 들어간 것도 네 마음대로였으니까 나오는 것도 네 마음대로 해라, 네가 결정한 거니까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단 이제 넌 학비를 대줘야 할 학생이 아니고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했으니, 앞으로의 네 인생은 네가 책임져라, 이렇게요.”

멋진 어머니라고 감탄하자 신위는 이내 눈을 반짝거린다. “네, 우리 어머니는 항상 멋있어요. 어머니가 곁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에너지도 많으시구요, 나이 드신 다음에도 공부해서 주택관리사나 이것저것 자격증도 많이 따시고요. 지금도...” 길어진 어머니 자랑은 ‘신위다운’ 말로 이어진다.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내가 예쁘게 자란 것 같아요, 헤헷.”

일과 사람에 대한 애정

몇 년간 그녀는 계속 아르바이트를 해왔다. “피씨방, 노래방, 비디오방, 방이란 방은 다 했고 호프집이나 옷가게, 피어싱 가게 안 해본 데 없이 다 했죠.” 그녀는 아르바이트 하는 것을 좋아한다. “알바를 해야 활력이 생겨요. 난 놀고는 못 살 거 같애. 바쁘면서 짬짬이 무얼 하는 게 좋아요.” “이상하게 난 조금만 일하면 그 공간에 애정이 생겨요. 지금까지 애정 없이 일 한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요.”

기억이 난다, 그녀가 노래방 알바를 할 때 그 작은 공간의 구석구석에 애정을 담아 이야기했던 것이. 사장님이 얼마나 괜찮은 분인지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고 노래방 귀퉁이의 작은 흡연공간에 대해 사랑스럽게 말했고, 그래서 그곳에서 마지막 청소를 할 때 서글펐다고 고백했다. 아마 그녀는 어디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왜 좋아지는 지는 잘 모르겠어요. 운이 좋았죠. 난 싫어하는 일은 정말 못 하거든요. 그래도 내가 일한 데에서는 사장님들도 다 좋았고, 계속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 데서 일했는데 난 사람들을 좋아하니까 잘 맞았던 거 같고.”

그녀는 정말 사람들을 좋아한다.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묻자 또다시 반짝이며 대답한다. “너무 예쁘지 않아요?” 할 말이 없어졌다. 스무 살 때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지금 그녀는 24살이다. 여전히 그녀는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예쁘다고 말한다. 최근 그녀가 들어간 직장의 상사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이야기한다. "P대리님은 속눈썹 끝 쪽이 길어서 예쁘구요, K대리님은 속눈썹은 짧은데 입 있는 데가. 그리고 지금 우리 앉은 테이블 대각선 쪽의 저 사람은...“

저 관찰솜씨. "나도 잘 몰랐는데 같이 여행간 친구가 말하길, 난 풍경이 아니라 사람들을 본대요. 자꾸 사람들에게 시선이 가요." 그래서 아는 사람도 많고 친구도 많다. 코스프레처럼 튀는 복장을 즐겨하는 바람에 여기저기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은 탓도 있다. "관계 때문에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이 좋고 신기해요. 난 다시 태어나도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어요. 그리고 꼭 여자로요."

색깔이 느껴지는 만화가 좋아

“여전히 만화를 그리냐”고 물었다. 그녀는 당연한 것을 물었다는 듯이 어처구니 없어했다. 그리고 있을 때 행복하다는 그녀에게 나는 왜인지 변명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3개월 전에 처음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고 해서, 회사를 다니게 되면 알바할 때와 다르게 바빠지니까 기타 등등.

“하긴 내가 회사 다닌다고 그러니까 다들 놀라더라구요. 나도 내가 어쩌다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런데 또 안 해봤던 일이라 재밌더라구요. 사람들도 다 좋고, 옷 가지고도 뭐라 안 하는 회사고. 음. 그런 이야기도 들었어요. 회사 다니기 시작하면 만화에서 멀어지고 포기하게 된다고. 그런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만화만 그리면 내 한계를 못 넘을 것 같고, 이런 경험들도 다 중요한 게 아닐까.” “데뷔에 초조해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나이제한 있는 게 아니니까. 언젠가 데뷔할 거라 생각하지만, 그게 당장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언제부터 만화가가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물었다. “딱히 계기는 없었는데, 그냥 자연스럽게 난 만화를 그려야지 생각했고, 그 거 외에 다른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이 만화방을 했는데, 음, 그 때부터인가?”

“일단 재미있고 느낌이 있는 만화. 딱 보고 ‘신위다’ 라고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내가 살아있는 만화를 그리고 싶어요. 색깔이 있는 만화요.” ‘색깔’을 느낀 만화들을 묻자 쿠스모토 마키와 한혜연의 만화를 이야기한다. 최근에 인상 깊게 읽었던 만화로는 이쿠미 료의 만화를 댄다. 그리고 싶은 스토리를 말해 달라 하니 SF고 공모전 준비용이라면서 잘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하기사 천천히 기다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느끼고 봐왔던 그녀의 만화에서 중요한 것은 스토리가 아니었다. 대담한 여백과 선의 사용, 자칫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색채들을 조합하는 그 능력에 반했었다. 그녀의 색채는 조금은 자폐적이고 내밀했다. 그러나 그 색채들을 그려내는 그녀는 거리낌 없이 열려있다. 그 모순이 만들어내는 틈새가 좋았던 것이다. 물론 그것을 이 인터뷰 글에서 다 드러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해를 향해 눈을 감지 않고 달리고 싶다.”

우리는 긴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대구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가 이미 8시가 넘은 시간이었던 것이다. 기차시간을 얼마 안 남기고 그녀가 자주 가는 클럽 ‘집시락’에 갔다. 그녀의 지인들과 인사를 했다. 그 곳의 알바생들은 우리에게 머그잔보더 더 큰 컵에 붉은 칵테일을 부어주었고, 서비스로 녹차 쉐이크를 만들어주었다. 잠시 후 DJ가 음악을 섞기 시작했다. 아무도 춤을 추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녀가 홀로 일어나 춤을 추었다. 거의 쉬지 않고 계속 홀로.

빈 스테이지에서의 그녀의 춤도 그녀의 그림만큼이나 내밀한 느낌이었다. 발산이 아니라 수렴인, 발끝에 내리는 달빛 같은 것이나 살짝 건드리는 느낌. 그녀의 눈은 가늘게 위로 올라가 있으며, 입술 역시 가늘다. 키는 큰 편이고 까만 매니큐어와 징이 박힌 옷들이 잘 어울린다. 얼핏 그녀를 본 사람은 차갑고 서늘한 아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녀의 춤과 그녀의 그림을 본 사람이라면 늪지대의 푸른 꽃 같은 것을 떠올릴지 모른다.

하지만 함께 이야기하고 웃고 걷고 달릴 때의 그녀는 태양을 향해 활을 쏘는 사수자리다. “해를 향해 눈을 감지 않고 달리고 싶어”라고 그녀는 쓰곤 했다. 그녀가 테이블에 놓고 간 핸드폰 로고가 웃음처럼 반짝인다. - 모두 정말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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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베끄 2003/10/14 [22:24] 수정 | 삭제
  • 만화가들은 자유롭게 사는 듯 보여서 부러워요.
  • 메일 2003/10/14 [02:04] 수정 | 삭제
  • 일해야 활력이 붙어 놀고는 못사는데다

    일하는 곳마다 애정을 듬뿍듬뿍 준다니

    사랑받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정력적으로 살 운명을 타고났다고 해야할까..

    나와 같은 만성 무기력 환자랑은 극과 극일세 T_T (운다..)
  • redArrow 2003/10/13 [06:04] 수정 | 삭제
  • '신위'라는 작가분 그림이, 그 작품이 보고 싶어집니다.
    작명이신가요? 이름도 이뿌고 투명하다는 느낌이에요.
    (솔직히 학생부군 '신위'가 떠오르던가, 어마어마한 내공의 무협지 쥔공 같지만요.^^ㅋㅋ)
    신위님 작품이나 일러를 글에 포함시켜주면 좋겠는데 말이죠.^^;;
    혹시 어렵지 않다면 말에요.
    그리고 작가가 허락한다면 제 이멜로 부탁드려요~!!
    이멜주소 아시죠? ^_____________^ v

    여전히 만화를 탐독하는 30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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