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을밤 우리는 쿵쾅쿵쾅 놀았다”

<페미니즘과 논다>② 여성들의 음악축제를 만든 사람들

박주연 | 기사입력 2017/11/06 [11:59]

“그 가을밤 우리는 쿵쾅쿵쾅 놀았다”

<페미니즘과 논다>② 여성들의 음악축제를 만든 사람들

박주연 | 입력 : 2017/11/06 [11:59]

(※쿵쾅쿵쾅: 모 여성혐오 사이트에서 ‘메퇘지(메갈리아 돼지)들이 쿵쾅거리며 시끄럽게 한다’는 말이 나오면서부터 페미니스트를 비하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보라X뮤직페스티벌 기획단을 비롯해 페미니스트들 중에는 이를 전복적으로 사용하는 이들이 생겼다.)

 

여성 뮤지션들과 여성 관객들이 만나다

 

지난 추석 연휴의 끝자락이었던 지난 10월 8일 일요일, 홍대 웨스트브릿지 라이브 극장에서는 ‘음악하는 여성들과 즐기는 여성들이 함께 하는 축제’라는 컨셉의 여성들만의 뮤직 페스티벌이 열렸다. 제1회 보라X뮤직페스티벌.

 

▶ 제1회 보라X뮤직페스티벌이 열린 공연장 외관 ⓒ보라X뮤직페스티벌기획단

 

사실 여성들만의 공간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논쟁이 계속되어 왔다. 그 논쟁이 여전히 진행 중인 지금, 누군가는 여성들만의 뮤직 페스티벌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또 ‘여성만의’ 행사는 남성과 여성을 구분 짓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실제로 여성들의 음악축제로 유명한, 1976년부터 시작된 ‘미시건 여성음악축제’(Michigan Womyn's Music Festival)는 참가자를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Women born Women)으로 한정하여 트랜스젠더 커뮤니티를 비롯한 LGBT 단체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의 범주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여성만의 공간, 여성만의 음악 축제에 대한 요구는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작년, 세계 최대 음악축제 중 하나인 영국의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Glastonbury Festival)에서는 ‘여성으로 정체화하는 모든 사람들’(all people who identify as women)이 입장할 수 있는 ‘더 시스터후드’(The sisterhood) 구역을 처음으로 운영했다. 그리고 남성이 없는(Men-free) 음악축제가 내년, 스웨덴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지난 7월에 들려왔다.

 

그런 흐름 속에서 국내에서도 여성들의 음악축제로 기획된 보라X뮤직페스티벌이 열렸다. ‘추석 연휴 기간 동안에 받은 스트레스를 뮤직페스티벌 와서 풀어라!’ 라고 홍보했던 축제는 오후 1시부터 다양한 페미니스트 모임들이 참여하는 사전 부스 행사를 진행했다. 전국디바협회, 불꽃페미액션, 은하선토이즈, 버자이너빅토리,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등이 페미 굿즈를 판매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리고 오후 2시 30분, 홍대입구역에서 페미 풍물패 ‘페악질’의 거리 행진 공연을 시작으로 데드가카스(DEAD GAKKAHS), 슬릭(SLEEQ), 시와, 최삼, 에이퍼스(A-FUZZ), 오지은, 디제이 씨씨(DJ SEESEA)로 이어지는 라이브 공연이 지하 공연장에서 진행됐다.

 

▶ 싱어송라이터 오지은과 래퍼 슬릭의 서프라이즈 콜라보 공연 장면  ⓒ보라X뮤직페스티벌기획단

 

인디 싱어송라이터 오지은과 래퍼 슬릭의 서프라이즈 콜라보와, 퓨전 재즈밴드 에이퍼즈와 래퍼 최삼의 콜라보는 여느 공연에서 볼 수 없었던 레퍼토리다. 각자 다른 장르에서 활동하는 여성아티스트들이 연대하여 호흡을 맞추는 모습과, 공연이 끝나고 아티스트들이 서로를 토닥이며 안는 모습은 보라X뮤직페스티벌의 기획 의도를 알 수 있는 장면이기도 했다.

 

아티스트들은 공연이 끝나고 사인회에 참여해 관객들 그리고 다른 아티스트들과 교감을 나누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기도 하며 감사와 응원의 말을 건넸다. 그 모습은 단순한 팬과 가수의 만남이라기보다는 진짜 나의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 나의 야이기를 들어주는 사람의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끈끈한 무언가와 행복처럼 보였다.

 

주최 측 추산 약 5백여 명의 여성들이 행사장을 찾았다. SNS에는 즐거웠던 경험을 생생히 전하는 후기들과 함께, 내년에도 꼭 열렸으면 좋겠다는 얘기들이 연이어 올라왔다. 무엇이 사람들을 그렇게 즐겁게 했을까? 페미니즘으로 재밌게 노는 사람들을 찾는 기획 <페미니즘과 논다>에서, 이번에는 보라X뮤직페스티벌을 만든 ‘보라X뮤직페스티벌 기획단’(이하 ‘보라X기획단’)을 만나보았다.

 

▶ 보라X뮤직페스티벌 후기 공모 당선작   ⓒ보라X뮤직페스티벌기획단

 

자기검열 없이, 편안하게 즐기는 장을 만들고 싶어

 

보라X뮤직페스티벌의 시작은 올해 2월에 열린 ‘2030 페미캠프’였다고 한다. 페미니스트들이 모이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기획된 2030 페미캠프는 텀블벅 모금에서 목표액을 훌쩍 넘기는 283%를 달성하고 약 850만원의 후원금을 모으는 등 큰 호응을 얻었다. 페미캠프 참가자였다가가 보라X뮤직페스티벌 기획단이 된 ‘라꾸’는 ‘고독사, 고립사 할 뻔한 페미니스트들이 모여서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며 웃는다.

 

“페미니즘 공부하고 페미니스트 되면 인간관계 박살나잖아요.(웃음) 아버지랑 사이 안 좋아지고 그러다가 엄마랑도 사이 안 좋아지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예민한 애 되고. 그래서 혼자 지내다가 페미캠프에 갔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집회나 시위에 가야 만날 수 있었던 페미니스트들을 이런 자리에서도 만날 수 있구나 싶어서 너무 좋았어요.”(라꾸)

 

페미캠프가 끝나고도 참가자들은 그 여운을 계속 잊지 못했다. 캠프 행사 중 함께 춤추고 놀 수 있는 파티 시간이 있었는데, 재미있었다고 이야기하는 참가자들이 많았다. 그러면서 락페스티벌을 비롯한 음악 공연장에서 남성들로부터 겪은 시선강간과 성추행, 불쾌함, 두려움 등을 토로하게 되었다. 왜 우리는 즐거운 페스티벌에서 이런 경험을 할 수밖에 없는가, 왜 그런 경험들 때문에 우리는 공연장 가는 걸 꺼리게 되었을까에 이야기도 나왔다.

 

그 즈음, 스웨덴의 가장 큰 음악축제인 브라발라(Bråvalla)에서 다수의 성범죄가 발생했고 계속되는 성범죄 때문에 내년 행사는 취소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그리고 맨프리(Men-free) 음악축제가 열릴 것이라는 뉴스가 연이어 나왔다. 보라X기획단은 ‘우리도 한번 해 볼까’하는 영감을 얻었다. 페미캠프 참가자들 위주로 기획단이 꾸려졌고 주최 단위도 모집하기 시작했다.

 

▶ 보라X뮤직페스티벌 공연 모습   ⓒ보라X뮤직페스티벌기획단

 

보라X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시선강간, 몰카, 성범죄 없는 뮤직페스티벌을 만들어서 참가자들이 편하고 자유롭게 즐길 수 있게 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 축제를 여성들만의 공간으로 만들기로 했다.

 

“여성들만 참여한다고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만, 여성들만 있는 공간이 주는 안정감이 있잖아요. 전 중학교 때 남녀공학이었는데 여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손 드는 일이 별로 없었어요. 손 들고 이야기하거나 의견을 말하면, 여자애가 깝친다고 남자들이 놀렸거든요. 그런데 고등학교를 여고로 진학했는데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거예요. 눈치 보거나 고민할 일 없이 내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게 너무 좋았어요.”(미현)

 

두 번째 목표는 여성 아티스트들에게 즐길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주자는 것이다. 많은 여성 아티스트들이 무대에 설 기회를 별로 얻지 못하고 있다. 또 무대 위에서 성적으로 대상화되거나 성희롱을 당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음악축제를 만들고자 했다. 실제로 공연 당일, 무대에 오른 여성 아티스트들은 이런 무대에 올라와 너무 기쁘다며 여성으로서, 여성 아티스트로서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오늘 여기 있으신 분들 1%잖아요. 헬페미 1%’ 라고 말하며 관객과 소통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 동안 많은 것들이 남성 기준이었으니까…

 

보라X뮤직페스티벌에서는 그 외에도 여느 음악축제나 행사에서 보기 어려웠던 반차별-비폭력 서명 후 입장, 베리어프리존, 비건푸드존, 아이돌봄존이라는 특이점이 있었다. 공연 보러 와서 무슨 서명까지 해야 하나, 페미니스트들은 역시 피곤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반차별-비폭력 서명’은 기획단이 가장 신경 쓰고 고민하면서 준비한 일이었다.

 

“그런 서명이 피곤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순 있지만 또 그런 서명이 반가운 사람도 있을 거예요. 보호받을 수 있으니까요. (서명 없이도) 당연히 지켜야 하는 일들인데 그 동안 지켜지지 않았던 거죠.”(미현)

 

여성이면 ‘누구나’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축제를 표방한 만큼, 보라X기획단은 다양한 여성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많은 고민을 했다. 락페(락페스티벌)가서 먹을 게 없어 맥주로 배를 채웠다는, 기획단 내부의 채식인의 경험이 반영되기도 했다. 또 여러 단체에 자문을 얻으면서 만들어진 것이 베리어프리존, 비건푸드존, 아이돌봄존이다.

 

“다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해요. 그 동안 많은 것들이 건장한 남성 기준으로 되어있었잖아요. 그게 아니라 장애여성, 기혼여성의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 나아가 암컷 젖소가 얼마나 착취를 당하는가 등의 ‘비거니즘’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미현)

 

▶ 비건 타코를 판매하고 있는 부스   ⓒ보라X뮤직페스티벌기획단

 

행사 당일 공연장 베리어프리존(barrier free zone: 장애인과 노인 등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지장이 되는 물리적 심리적 장벽을 없앤 공간. 보라X기획단은 휠체어 이용자와 청각장애인, 그리고 아이들이 안전하게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공간을 지정함)에서는 휠체어를 이용하는 관객이 공연을 즐겼다.

 

또 아이 둘의 손을 잡고 온 관객이 아이돌봄존에 아이를 맡기고 공연을 관람했으며, 나중엔 베리어프리존에서 아이와 함께 춤추며 놀기도 했다. ‘즐기는 여성들의 축제’라는 건 ‘모든 여성들이 장벽 없이 즐길 수 있는 축제’를 뜻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장면이었다.

 

‘이제 진짜 재미가 뭔지 알았어요’

 

집회나 시위, 세미나 등에 참석해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 페미니스트들을 놀면서 만날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고, 그런 장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축제를 만들었다고 몇 번이나 강조한 보라X기획단. 이들은 이번 행사에 친구들과 지인들을 초대하기 용이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친구한테 시위 가자, 집회 가자고 말하기 쉽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페스티벌에 놀러 오라고 하긴 쉬웠어요. 왔던 친구들도 반차별-비폭력 서명하는 게 참신하고 좋았다고 하고… 이런 행사에 참여하면서 정치적 행동을 할 수 있을지 몰랐다고 하더라구요.”(미현)

 

이제는 페미니즘을 몰랐던 삶, 페미니스트가 아닌 삶을 상상하기 어려워졌다고 공통적으로 이야기한 보라X기획단은 페미니즘으로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한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페미캠프 이전에 진짜 재미가 뭔지 몰랐던 것 같아요. 대학 들어가서 모임이나 MT 같은 거 가면 남학생들이 섹드립 치고 누구 놀리고 갈구고,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런 게 재미라고 생각하고…. 페미니스트로 살면서 친구 관계가 불편해졌지만 그 전의 재미가 (진짜) 재미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제 더 많은 재미를 찾고 알게된 것 같아요. 새로운 친구도 많이 생겼고 이렇게 살 수 있고 저렇게도 살 수 있다는 걸 느껴서 너무 좋아요.”(세정)

 

첫 행사를 치른 보라X기획단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벌써 물어보는 것이 조심스럽긴 했지만 의외로 대답이 술술 나왔다.

 

▶ 축제에서 서로 지켜야 하는 약속을 담은 스텝 티셔츠   ⓒ보라X뮤직페스티벌기획단

 

“어떤 식으로든, 홀로 고독사하진 않겠다! 재미있게 살고 싶은 욕구,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하고 싶어요. 페미캠프에서 손에 잡히는 페미니스트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게 너무 좋았어요. 그런 기회가 생기는 장을 더 만들고 싶어요.”(라꾸)

 

“다음에는 장벽을 더 낮추고 싶어요. 최저임금으로 두 시간 일하고 올 수 있는 행사라던가, 부스 행사도 사람들이 조금 더 친해질 수 있는 프로그램을 넣는다거나. 퀴어대명절처럼 ‘페미대명절’ 같은 지속성 있는 행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페미니즘이 이런 것이라는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걸 계속하고 싶어요.”(미현)

 

“여성 버전 알쓸신잡 같은 유튜브도 하고 싶고, 대중적인 콘텐츠와 연결하는 방식으로 행사를 만들해보고 싶어요.”(세정)

 

보라X뮤직페스티벌은 페미니스트들이 모여 함께할 수 있는 영역이 그 동안 알려져 있던 전형적인 것들이 아니라 훨씬 더 넓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쿵쾅쿵쾅 뛰어 놀 수 있다는 희망, 그 설렘으로 나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 보라X뮤직페스티벌의 생생한 현장이 담긴 관객 후기 영상들
-굴러라! 구르미 https://youtube.com/watch?v=OEOiKXaJovE
-생각많은 둘째언니 https://youtube.com/watch?v=d-eQdt_bwJI
-그래Gre https://youtube.com/watch?v=DwJ47hDUIJ4
-AKWI https://youtube.com/watch?v=JsHuvoUzl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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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리 2017/11/07 [00:24] 수정 | 삭제
  • 쿵쾅쿵쾅 이 말이 어쩜 맘에 꼭 들어~~
  • 통하였느니라 2017/11/06 [14:40] 수정 | 삭제
  • 알탕 알쓸신잡 대신 여성판 알쓸신잡이 있음 어떨까 싶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나만은 아니구나 싶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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