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보수적인 개신교 단체를 중심으로 정부가 ‘성평등’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선 안 된다는 압력이 가해지고 있는 가운데, 여성가족부의 정책 용어 사용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이들은 ‘성평등’ 용어가 다양한 성 정체성을 인정하고 있다며,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전통적 가치를 훼손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관련 기사: ‘성평등’을 반대하는 사람들)
박근혜 정권에서 적극 사용된 용어 ‘양성평등’
여성가족부가 개신교 측의 반발에 못 이겨 ‘성평등’ 대신 ‘양성평등’ 용어를 쓰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오며 논란이 일자, 여성가족부는 18일(월) 입장 설명 자료를 발표했다. ‘성평등’과 ‘양성평등’은 영어 “gender equality”를 번역한 용어로, 같은 의미라는 설명이다. 또 여성가족부는 제2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2018-2022)에서 두 용어를 ‘혼용’ 사용한다고 밝혔다.
이 설명 자료를 살펴보면, 김대중 정부 때 만들어진 여성발전기본법 내 기본계획은 1차에서 4차로 지나오면서 ‘남녀평등’에서 더 포괄적인 용어인 ‘성평등’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때 양성평등기본법으로 법이 개정되면서, 다시 ‘여성’ ‘남성’이라는 말이 재등장하고 ‘양성평등’ 용어가 나오게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2012년 12월 발표된 제4차 여성정책 기본계획(2013∼2017)에서는 기본적으로 ‘성평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박근혜 정권에서 ‘양성평등’이라는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현재 일부 보수 개신교 세력의 엄청난 압력을 받으며 ‘성평등’을 대체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정부는 흔들림 없이 ‘성평등’ 정책 추진해야
두 용어를 ‘혼용’하겠다며 여성가족부가 보수 개신교 세력의 반발에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자, 여성-사회-인권단체들은 정부에 흔들림 없이 ‘성평등’ 정책을 추진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한국여성단체연합과 회원단체들, 녹색당,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 장애여성공감,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한국미혼모가족협회, 한국여성정치연구소 등은 지난 20일(수) 오전 10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성가족부에 항의했다.
“우리는 지난 정부에서도 성평등을 부정하고 양성평등을 운운한 정부의 정책이 양성평등을 가장하여 오히려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혐오와 차별을 조장한다는 것을 외쳐왔습니다.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에 대한 공격은 반영해야 할 의견이 아니라 근절해야 할 폭력입니다. 지금 이런 여성가족부의 움직임이 촛불민주주의로 탄생한 정부가 적폐를 청산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성평등은 단지 성소수자를 포함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조건이 지금의 여성에 대한 차별의 조건과 동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요구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여성가족부가, 문재인 정부가 단지 성소수자를 배재하기 위해서,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보수 기독교의 요구를 들어주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계산하고 있다면 앞으로도 우리는 문재인 정부에게서 박근혜 정부보다 한 치도 더 나은 상황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집행위원장)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던, 적폐를 청산하고 민주 사회를 이루겠다던 이 정부는 왜 여성과 소수자 관련해서는 적폐를 청산하지 못하는가?’ 라는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여성가족부가 지난 정권의 적폐에서 벗어나 당당히 ‘성평등’을 말하고, 정책의 근본 원칙과 내용을 명확히 하여 흔들림 없이 성평등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같은 날 오후, 여성가족부는 제2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2018~2022)을 발표했다. 기본적으로 ‘양성평등’, ‘성평등’ 용어를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지만, ‘성평등’ 용어 사용에 한 발 물러선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난 11월 16일 정책 수립을 위한 공청회 때 발표된 비전은 ‘함께하는 성평등, 지속가능한 민주사회’였으나, 이번에 발표된 비전은 ‘여성과 남성이 함께 만드는 평등하고 지속가능한 민주사회’다. ‘성평등’이라는 용어가 지워진 것이다.
여성운동이 제기해왔던 “gender equality”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왜 여성가족부가 ‘성평등’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주저해야 하는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언한 문재인 정부는 “왜 여성과 소수자 관련해서는 적폐를 청산하지 못하는가?”라는 여성운동계의 외침에 화답해야 할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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