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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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의 곳간, 몸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몸 탐구①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김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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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편집자 주

 

▶ 아름다운 몸. 새끼 들고양이 ⓒ김혜련

 

몸에 관한, 불편하고 힘든 글쓰기

 

“혜련씨, 아픈 자랑 많이 했더군요~”

 

<일다>에 연재한, 몸에 대한 전반기의 글을 읽은 지인이 농담처럼 한 말이다. 그 말을 들으니 몸에 대해 글을 쓸 때의 내 상태가 떠올랐다.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 숨 쉬기가 불편하고 가슴이 답답했다. 강한 저항이 올라오기도 했다. ‘왜 굳이 이런 글을 써야 하지? 그럴듯하지도 않고 자신을 너무 까발리는 것 같고, 도대체 우아하지 않은 글 아니야?’ 그냥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난 몸과 마음의 오랜 분리에 대해 이해하고 싶었다. 거의 정신적 마비 상태라고 여겨지는 몸에 대한 무시와 학대에 대해, 그 결과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몸을 통한 자기인식을 분명하게 해야 하는 건 내 삶의 주요 과제 중 하나였다. 아픈 다리 한 쪽을 질질 끌며 걷듯, 불편하고 힘든 글쓰기였다.

 

그런데 쓰면서 ‘쓰길 잘 했다’고 느꼈다. 쓰는 과정에서 막연하던 많은 것들이 선명해졌다. 깊고 치밀하게 사유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뿌옇게 흐린 시선이 말개지는 경험. 새로운 통찰과 창조가 일어나기도 했다.

 

몸에 대한 글을 쓰면서 깨닫게 된 게 있다. 몸에 대한 무시가 결국 일상에 대한 무시라는 거였다. 내가 일상을 살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도 알게 되었다. 단지 일상이 지루하고 단순 반복이어서만은 아니었다. 몸의 감각을 잃은 것은 일상을 잃은 것이었다.

 

글을 쓰면서 내가 전환한 삶이 ‘몸으로 사는 삶’이라는 게 명료해졌다. 집을 가꾸고, 밥을 하고, 나무와 꽃을 심고, 비를 맞으며 감자를 캐고, 벼들이 자라는 들판을 매일 걷는… 이 모든 것들이 몸의 삶이었다. 나는 몸에 쌓이는 시간과 공간을 만나고 가꾸어 온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써 온 집, 밥, 자연에 관한 이야기는 몸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 몸을 통해 살고, 느끼고, 경험한 것들인 것이다. 나는 비로소 일상을 즐기고 일상을 통해 삶을 가꾸어가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내가 전환한 삶의 핵심에 ‘몸’이 있다.

 

▶ 아름다운 몸. 은행나무 고목 ⓒ김혜련

 

‘몸으로 사는 삶’으로의 전환

 

몸은 삶의 곳간이다, 풍요의 곳간. 지성을 아무리 벼려도 몸의 느낌을 풍요롭게 쌓지 않으면 삶이 풍요로워지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 충만한 자’가 되고 싶어서 온갖 심리학을 섭렵하고 영성을 찾고 수행을 했지만, 언제나 몸은 배재되어 있었다. 충만한 삶을 생각하면서, 그 삶과 몸을 연결시켜보지 못했다. 몸이 뭔지, 몸이 건강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고민해보지 않았다.

 

몸은 감수성의 덩어리다. 죽어있는 몸, 백지장 같이 핼쑥해져 있는 몸으로 어떻게 감수성의 풍요를 누릴 것인가? 감수성의 풍요 없이 어떻게 삶이 풍요로울 것인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이치를, 나는 온갖 관념의 세계를 헤맨 뒤에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건강한 몸이야말로 감수성이 풍부한 몸이다. 그렇다면 어떤 몸이 건강한 몸인가? 안 아픈 몸인가? 건강검진에서 별 문제 없으면 건강한 것인가?

 

몸을 관찰하면 하루에도 수없이 변하고 있다. 일상을 잘 보면 단 한 순간도 몸에 완전성이란 없다. 손톱에 가시가 박히고, 머리가 띵하고, 배가 아프고, 허리에 뻐근한 통증이 있고, 무좀과 냉증에, 어깨가 결리고… 안 아플 때가 별로 없다. 천만가지 몸의 변화가 있다. 몸이 바로 그런 거다. 통짜로 산다는 게 이런 모습이다.

 

몸이 건강하다는 것은 안 아픈 상태가 아니라 아픈 상황에 대처하는 유연성을 말한다. 몸에 문제가 생기거나 아플 때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명민한 감각’을 갖는 것이다. 아픔에 대해 명민한 몸은 기쁨에 대해서도 명민하다. 몸이 섬세한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섬세하게 대응할 수 있다.

 

평생 머리로만 살아온 나 같은 사람은 명민한 몸을 갖기 힘들다. 그렇게 되면 평범한 일상에서 오는 기쁨을 누릴 수 없다. 그저 밋밋해 보이는 것들, 이를테면 날씨의 변화라든가, 몸의 변화 등 삶의 기초적인 것들에 둔감하다. 밋밋한 행위에서 빛을 느끼지 못한다면 삶에 빛이 들어오기는 어렵다. 삶의 구십 프로는 그런 밋밋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지층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하고 당연한 세계가 근원적인 세계다. 이것을 무시하고 특별한 무엇을 아무리 해도 실은 허망하다. 늘 특별한 것을 추구하면 일상에 무뎌진다. 내가 그토록 공허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공허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이유다. 우리 삶의 근원적인 토대를 단련시키지 않으면 허무해지기 마련이다.

 

한 땀 한 땀 손바느질 하듯 걸어서 건강을 얻는 것과 비타민 한 알 먹어서 얻는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 구체적으로 몸에 쌓이는 것과 소비하는 것의 차이다. 그 차이는 몸의 느낌의 차이로 온다. 걸으면 다양한 느낌이 몸에 쌓인다. 그 느낌들이 몸을 풍요롭게 한다.

 

산에 오를 때 걸어서 오를 수도 있고 케이블카를 타고 오를 수도 있다.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쁘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 몸에 쌓이는 느낌의 깊이는 다르다. 걸어서 가면 구체적인 상황들을 만난다. 들꽃의 향기도 맡고, 새소리도 듣고, 스치는 바람의 서늘함과 들풀들이 발에 닿는 부드러움을 느낀다. 다양한 상황들을 거치면서 그 과정에서 생기는 내 몸의 풍요로움이 있다.

 

▶ 아름다운 몸. 규련 아기의 모습 ⓒ김혜련

 

얼마 전 우리나라 기타계의 일 세대인 분의 연주를 가까이에서 보고 듣는 호사를 했다. 평생 기타로 살아온 사람의 모습은 온몸이 기타처럼 보였다. 줄을 타는 손가락이 줄밖으로 나오는데, 음도 손가락을 따라 나오는 듯 했다. 거미가 거미줄을 뽑듯 음을 자유자재로 뽑아냈다. 모든 유위(有爲)의 끝에서 무위(無爲)를 이룬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는 연주를 하면서 계속 기타를 조율했다. 모든 연주자들이 그렇다. 피아노를 조율하고, 첼로를, 바이올린을 조율한다. 몸도 마찬가지다. 내 몸도 계속 조율해 가야 한다. 사실 몸보다 더 아름답고 섬세한 악기가 어디 있겠는가? 아름다운 악기를 섬세하게 조율하듯 내 몸을 민감하게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평범한 일상을 만나도 빛이 난다. 일상의 평범하고 밋밋한 세계가 신성한 빛으로 가득 빛나게 되는 일, 그것이 내적인 초월이다.

 

몸의 경험이 점점 사라져 가는 시대

 

나는 몸에 대한 탐구를 하면서 나처럼 일찍 죽은 몸들을 수없이 보았다. 어릴 때의 생생한 기쁨 덩어리인 몸이 압살되어 버린 몸들 말이다.

 

청소년의 몸은 누구보다 명랑한 몸이다. 이십 대의 몸은 유쾌하다. 명랑함이 통통 튀기는 몸이다. 그런데 현실은 주눅 들고, 죽은 몸들이 너무도 많다.

 

집에 찾아오는 어린 들고양이는 먹이를 주면 즐거워 어쩔 줄 모른다. 먹으면서 계속 ‘양양양야아양, 야아앙, 양양양앙앙…’ 기쁨에 겨운 옹알이를 한다. 온몸이 통짜로 즐겁다. 내가 잘 아는 한 십대 아이는 배가 고파 밥을 열심히 먹는데, 몸은 먹는 행위와 상관없이 생기가 없다. 몸의 가장 기초적인 즐거움을 못 느끼는 몸이다.

 

거부당하거나 부정당하고, 학대 받은 몸들 또한 많다. 특히 여성들의 몸이 그렇다. 주변 도처에 비극적인 몸들이 서성이고 있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주눅 들고 죽은 몸을 만들어내고 있다.

 

몸의 경험이 점점 사라져 가는 시대에 ‘몸의 풍요’는 근원적 질문이 된다. 어떻게 풍요로운 몸을 만들 것인가?

 

▶ 장항리 아기 사자 ⓒ김혜련

 

악기 같은 몸이 되고 싶다

 

“흐린 날 산에 오른다. 날이 흐리면 숲은 더욱 고요하고, 어둑한 정기로 가득 차 있다. 보이지 않는 빽빽한 에너지 장을 뚫으며 나가는 듯 몸은 자신과 숲의 질감으로 벅차다. 날이 흐리니 산에 사람이 없다. 홀로 걷는다.

 

숲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 숲의 강한 향기가 폐를 찌른다.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정적을 깨고 지저귄다. 소나무 숲에 들어서니 어둡고 울울한 태고의 숲에 들어온 듯하다. 늘 앉던 자리에 앉는다.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육중하고도 모호한 몸의 느낌, 몸은 활짝 열려 있다.

 

하루 종일 비가 오다 말다 한다. 우산을 쓰고 마당에 풀을 뽑는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촉촉한 땅에서 풀을 뽑아낼 때의 감촉, 청각과 촉각 모두 생생히 즐겁다.” (2015년 여름)

 

일상을 소중히 하면 몸이 풍요로워진다. 몸의 감수성이 깊어진다. 저절로 기뻐진다. 그러면 외부의 욕망, 소비 욕망, 타자 지향적 욕망이 줄어든다. 일상을 귀하게 다룰수록 그러해진다. 감각을 투명하게 벼려, 스스로 깊어지는 악기 같은 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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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1/03 [09:54]  최종편집: ⓒ 일다
 
18/01/17 [14:05] 수정 삭제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뿌옇던 생각이 조곤조곤 정리되어 편안해져요. 선생님의 글이 참 좋습니다. 선생님도 좋고 선생님의 글도 좋아요. 자신에 대한 배려를 많이 하려면 지금보다는 개인시간이 많아져야 할 것 같아요. 어서어서 주4일제가 되고 3일제가 되어서 우리들이 이 지상엔 온 목적으로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나비 18/01/17 [15:21] 수정 삭제  
  선생님의 바램이 참 고귀하게 느껴져요~ 고귀한 몸을 만들어가는 선생님의 일상을 응원해요!!^^

안녕 18/02/04 [11:59] 수정 삭제  
  연초 체력측정을 했는데 6개로 분류된 제 체력의 상태와 제 성격 및 평소 태도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몸으로 사는 일상을 꾸린다는 건 일상을 사는 일 자체가 곧 내 삶의 전부가 되는 일인데다 성과를 중시하며 살았던 생활방식을 바꾸는 일이라 쉽지 않지만, 악기와 같은 몸이 갖는 아름다움은 다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지요.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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